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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96화 (96/450)

96. 혼자서 감당해 왔나요?

96. 혼자서 감당해 왔나요?

율리안은 편지를 개봉하지 않은 상태로 루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의 편지를 함부로 보는 일은 옳지 않죠. 굳이 해당 법 조항을 몰라도 그게 상식입니다.”

율리안이 루산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궁금할 만도 한데 개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뜻이 이러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는 것이었다.

루산은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는 변경 최고 지배자의 엄격한 도덕성 앞에서 진정한 귀족적 태도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러나 당신을 신뢰하기에 나의 기준에 예외를 두었습니다.’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루산은 율리안에게 존경심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보다 더 진하게 애틋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부터 율리안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이번 일로 인해 필센 제국에 대해서 흔적만 남고 사라져 버린 충성심이 새로운 대상을 향해 간질간질 우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장 중요한 것은 눈앞의 편지들이었다.

루산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고, 책임감 이전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파펜을 변경부 특별 감찰관이라 생각하고 미끼를 던진 것인데, 레보르크까지 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루산은 율리안 앞에서 종이칼로 봉투를 썩썩 잘랐다.

먼저 꺼낸 것은 파펜의 편지였다.

변경 8구역에서 입수한 첩보.

변경 구역에서 반란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긴급히 보고함.

제보자의 지위나 능력, 평소 언행을 볼 때 그냥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판단함.

첩보 입수는 한 달 전이지만, 그 사이에 편지를 보낼 틈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변경 각 구역에 조속히 특별 감사를 실행할 필요가 있음.

루산이 했던 이야기를 간추린 다음 이런 내용들이 이어져 있었다.

‘변경부 특별 감찰관이 틀림없구나!’

형식과 내용을 볼 때 확실해 보였다.

루산은 편지를 율리안에게 공손히 전달했다.

편지를 읽는 율리안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루산은 그 사이 레보르크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변경 8군단 제3 기동 전대장 루산 보름스라는 자의 입에서 거사 가능성이 언급되었습니다. 변경 도시 개척과 자기 이익 증대에만 골몰하는 자이고, 나름의 정보통을 가지고 자신이 관장하는 개척 도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지나가듯 언급하였으며, 역풍에 대한 우려로 외부에 알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판단되지만, 어디에선가 우리의 거사와 관련된 일들이 새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사를 망치지 않도록 주변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루산 보름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시 바랍니다.>

이 이야기를 획득한 상세한 경위와 함께 적힌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레보르크가 남방군 파일럿이었나?’

루산은 레보르크의 편지를 찬찬히 다시 읽었다.

자신을 자기 이익 증대에만 골몰하는 자라고 평한 부분이 다소 불쾌하기는 했으나 전체 내용에 비하면 사소한 부분이었다.

다 읽고 나서 편지를 율리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율리안은 레보르크의 편지까지 마저 읽었다.

그러고 나서 굳은 표정으로 루산을 바라보고 물었다.

“이게 대체 뭔가요?”

루산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대답했다.

“3전대가 이번에 원시의 땅으로 원정 사냥을 나갔을 때 편지에 적힌 대로 이 두 사람에게 반란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군요.”

“예상했다는 겁니까?”

“파펜이 변경부 감찰관이 아닐까 추측해 봤습니다.”

“그걸 알아보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가요? 반란이라니! 정체를 숨기고 일하는 관리를 굳이 찾아내기 위해 그런 위험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변경 각 구역이 쑥대밭이 될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한 겁니까?”

율리안이 처음으로 루산에게 호통을 쳤다.

파펜의 요청대로 특별 감사가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변경 모든 구역이 탈탈 털릴 것이다.

반란이라니!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율리안은 아직까지 반란 이야기를, 낚시를 위한 미끼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보르크가 쓴 이 편지는 또 뭡니까?”

루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율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현실로 닥치니 율리안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텐커를 통해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한계에 부딪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믿을 사람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 난리를 계획하는 쪽이 공작 쪽인지 황제 쪽인지 그것도 아니면 제3의 세력인지, 노바의 관리들이 황제 쪽인지 공작 쪽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크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그동안 확보한 증거와 일의 경과를 전해 주고 조사를 진행하게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율리안은 황족이면서 오랫동안 겪어 온 사람이기에 믿을 수 있다!’

만약 율리안마저 이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다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믿음이란 악마가 심어준 환상일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전쟁이 다가오고 있고 그 전에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황들을 속속 입수하고 있는 이때, 루산은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끌어들여 이 조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므로.

율리안에 대한 믿음은 도박이지만, 그동안 겪어 본 사람에 대한 믿음이므로 확률이 매우 높은 도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전에 변경 백서를 보고 제가 반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죠.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괜히 해 본 이야기가 아닙니다.”

“······!”

루산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율리안에게 보름스 가문의 멸망, 사기 사건 조사, 오베론 가문의 차남과 공업 은행과 툴롱 마법 연구소, 슈텐달 남작 사기 미수 사건에 엮인 남방군 파일럿, 용의자들을 풀어 주라는 내무대신의 지시, 재무부 관리들의 개입, 남방군에 대한 조사, 남방군 은퇴 파일럿들의 기이한 이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제 생각에 반란은, 대전쟁 발발 전후에 일어납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율리안은 이야기의 무게감에 짓눌려 붉게 달아올랐다.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묵직한 이야기를 소화하기 위해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던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하아! 그토록 힘든 일을 당하고도 그동안 혼자서 이 일을 여기까지 진행해 온 겁니까?”

율리안의 말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밀려온, 따뜻한 위로의 음성에 루산은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들어 보지 못한,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이었던 것이다.

‘황족 교육이 대단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 다정한 성품인가? 이 상황에서 우스운 꼴을 보이면 안 되는데······.’

루산은 괜히 율리안을 품평하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이 붉게 충혈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율리안이 그 모습을 못 본 체하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뿌리 깊은 갈등을 겪고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기는 했지만, 예전에는 어려서, 지금은 변경에 살고 있어서 그 심각함을 알지 못했는데, 부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곪을 대로 곪았군요.”

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제국이 무너져서는 안 되죠. 내가 뭘 해야 좋겠습니까?”

현 황제를 당숙으로 두고 있는 변경 8구역의 통치자가 마침내 루산의 손을 잡았다.

***

파펜과 레보르크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레이크 시티로 복귀했다.

루산은 그들보다 먼저 와 있었다.

“휴가는 잘 보냈나요?”

“잘 보내고 말 게 있어야지. 휑하니 볼 것도 없고······.”

파펜이 대답하고, 레보르크는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갔다.

루산 역시 가벼운 미소로 휴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동안 우리 3전대 전력이 많이 늘었어요. 그래서 나 혼자 통솔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해 3개 소대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멕 나이트 수가 많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우르사.

레오파드 10대.

중고 아이언 워리어 2대.

이렇게 총 13대를 운용하던 것이,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약속대로 레오파드 시제기를 꾸준히 생산해 넘겨주었고, 장벽 생산 시설로 갑자기 8군단의 수입이 크게 늘어난 덕에 단장이 아이언 워리어를 추가로 구입해 배정해 주어 총 21대로 늘어난 것이다.

“1소대는 직할 소대로 내가 지휘하고, 2소대는 파펜이 맡습니다.”

“정말?”

파펜은 깜짝 놀랐다.

변경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승진한 것이다.

어쨌든 승진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3소대 캡틴은 레보르크가 맡습니다.”

“음!”

파펜이 2소대 캡틴이 되었으니 충분히 예상 가능 했지만,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캡틴이지만, 아직 정식 직책은 아니에요. 3전대가 급격히 커져서 불가피하게 맡겼다고 생각하세요. 캡틴 수당도 본부에서 지급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별도로 주는 겁니다.”

그럴 만했다.

멕 나이트 여러 대를 지휘하는 캡틴을 몇 개월 만에 임명하는 경우는 없었다.

루산도 5년 차에 캡틴이 되었던 것이다.

“캡틴 수당은 지급하지만, 성과 보상금 분배 비율은 앞으로 성과를 보고 조정할지 말지 결정할 겁니다. 일단 3소대는 원정 사냥을 맡아요.”

“알았소.”

레보르크가 군말 없이 지시에 따랐다.

“2소대는 레이크 시티를 담당하세요. 장벽 북쪽에 세 대, 레이크 시티 안전과 확장 임무에 네 대.”

“그러지.”

파펜도 이번에는 투덜대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럼 1소대는?”

“1소대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레이크 시티에 멕이 필요하면 레이크 시티에, 원정 사냥 팀에 지원이 필요하면 그쪽으로. 그리고 다른 곳에 투입할 필요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겠죠.”

“음.”

파펜과 레보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순환 근무를 실시하겠지만, 너무 빨리 근무가 바뀌면 파일럿들의 업무 숙련도에 문제가 생기니까 내가 상황을 봐서 순환할 거예요.”

“알았소.”

레보르크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산은 추가로 배정되는 정찰병들과 지원 팀에 대해서도 알려 준 뒤 당부 또한 잊지 않았다.

“잘 알겠지만, 우리 3전대는 실력이 다소 부족한 파일럿들이 많아요. 너무 다그치지 말고 너무 감싸지도 말고 적당히 잘해 봐요.”

“겁나 어려운 일을 해내라고 하네.”

결국 파펜이 투덜거렸다.

“하하하. 어쩔 수 없죠. 우리 사정 알잖아요.”

“뭐, 알았어. 해 봐야지 어쩌겠어?”

업무 지시가 끝나자마자 레보르크는 3소대를 이끌고 반달 호수 지역 서쪽으로 이동해 원시의 땅으로 다시 들어갔다.

2소대 역시 루산의 지시대로 장벽 북쪽과 레이크 시티 안전 근무를 담당했다.

루산은 1소대 멕 나이트들을 레이크 시티 안전과 확장 임무에 투입한 채 한동안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전대장님, 제가 서운한 건 아닌데요. 그래도 파펜이나 레보르크보다는 제가 3전대에 오래 있었는데······. 그래도 원년 멤버인데······.]

루산은 1소대에 배속된 바이크의 볼멘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흘렸다.

[언젠가는 되겠지.]

[그 언젠가가 언제죠?]

[언젠가는?]

[···네.]

금방 시무룩해지는 바이크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루산은 이런 투정까지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8구역 바깥에서 급박하게 진행되는 일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

“부장님, 편지를 그대로 보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봉인이 돼 있는 것도 아니고, 겉봉투 하나 다시 써서 보내면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 굳이 이 소식을 알려서 저쪽에서 경계하게 만들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레보르크의 편지가 도착하는 곳에 사람을 미리 보내야 합니다. 편지를 받고 놈들이 움직일 게 아닙니까?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추적해서 관련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는 겁니다.”

“음!”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이 일을 해 주셔야 해요. 믿을 수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그런 힘센 사람을 움직여야 일거에 잡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파펜의 편지는 굳이 보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죠. 변경부가 들쑤셔서 실제로 반란을 일으켜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이 반란 사건은 완성이 되고 주모자가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지는 것이죠.”

“으음······!”

“변경에서 멕 나이트를 일으키는 것이 피해가 적겠습니까, 노바에서 멕 나이트를 움직이는 것이 피해가 적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은 스텐커에게 이 상황을 모두 알리는 편지를 썼다.

율리안은 파펜과 레보르크의 편지를 필사해 소지하고 노바행 열차를 탔다. 호위 기사 한 명이 외로운 그를 뒤따랐다.

그로부터 며칠 후, 파펜과 레보르크의 편지가 새로운 봉투에 담겨 부쳐졌다.

마나 열차는 이 무거운 것들을 실어 나르면서도 힘겹다 하소연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간간이 기적 소리를 낼 뿐이었다.

츄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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