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황제라도 안 돼
97. 황제라도 안 돼
바르통은 오랫동안 델타 기지 정비부장으로 일해 왔다.
루산의 제안이 아무리 마음에 든다 해도 델타 기지에 손해를 끼치거나 너무 야멸치게 박차고 나와 호른 영감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본부 정비창장과 의논해 후임을 물색하고 기회를 봐 호른 영감을 찾아가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델타 기지 주변 화단에서 돌을 줍고 있던 호른이 잠시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부장님?”
“그게··· 레이크 시티에서 멕 나이트 검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검투용 멕 나이트도 새로이 제작해야 하고 정비 소요도 크게 늘어난다고 제게 와 달라고 부탁을 하더라고요. 고민하다 가기로 했습니다.”
“음······.”
바르통을 바라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호른 영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델타 기지에 지장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후임을 알아 봤습니다. 본부 정비창에 있는 혹스터나 알파 기지의 시센이 실력도 좋고 성실하더군요.”
호른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심이 선 사람을 잡을 수는 없었다.
정기 인사 시즌은 아니지만, 보내 주기로 했다.
“혹스터와 시센, 둘 다 유능한 정비 요원이지만, 아무래도 알파 기지 정비소에서 넘버 투 노릇을 하고 있던 시센이 우리 쪽으로 와서 정비부장을 하는 게 본인한테 더 성취감이 있을 것 같군요.”
“대장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서운하게 한 게 있다면 다 풀어 버리세요.”
“아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서운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레이크 시티가 무척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서 도울 수 있도록 인수인계를 서두르세요.”
“알겠습니다, 대장님.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허허허! 우리 8구역 발전을 위한 일이고, 모두 다 잘 돼야죠.”
바르통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호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르통이 멀어지자 손에 들고 있던 자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한참 동안 씩씩대던 호른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유······! 기세 좋은 폭풍우에는 맞서는 게 아니지.”
그런 뒤 땅바닥에 흩어진 자갈을 줍기 시작했다.
***
바르통은 인수인계를 마치고 델타 기지를 떠나 레이크 시티로 넘어왔다.
레이크 시티에도 멕의 수리와 정비를 담당하는 인력이 이미 있었다.
레오파드 시제기를 정비하고 상태를 검사하는 가프 마법 연구소 마법사들과 정비 요원들.
3전대의 멕을 담당하기 위해 파견된 8군단 정비 요원들.
그러나 레이크 시티가 공식적인 전진 기지가 아니다 보니 그동안의 8군단 편제와 달라 소속이 애매했다.
누구는 레이크 시티 소속이라 하고 누구는 3전대 소속이라 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을 루산이 본부로 가서 레이크 시티 정비부로 확실히 정리하고 왔다.
루산이 바르통에게 말했다.
“임시 정비소가 있기는 하지만, 멕이 계속 늘어날 테니까 넓은 부지에 대규모 정비소를 만드는 게 좋겠어요.”
“얼마나 크게 만들려고요?”
“7군단은 멕 나이트가 300대가 넘더라고요.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
바르통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은 백 대도 안 되지만, 괴수 부산물 수입 증가 폭을 보면 우리도 빠르게 늘어날 겁니다. 반달 호수 지역 멕들이 원시의 땅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빈번해지겠죠. 그걸 다 부장님이 관리하는 거예요.”
단지 글라디아토르 몇 대를 추가로 제작하고 3전대 멕을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장차 멕 나이트와 멕 워커 수백 대를 관리하는 정비 기지를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가프 마법 연구소 멕 나이트, 멕 워커 공단이 완성되고 본격적으로 멕들이 쏟아져 나오면 수리 공장도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손상이 심한 멕이나 분해 정비에 들어가게 되는 멕이 아닌 나머지 레오파드는 레이크 정비소에 맡기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어쩌면 가프 측 수리 공장에서 밀려드는 물량을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한테 의뢰해 올 수도 있고.”
향후 전쟁이 터지고, 파손된 물량이 실려 오게 되면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루산은 그 물량을 처리할 때를 대비해 레이크 정비소를 크게 키울 생각이었다.
멕은 구입비도 비싸지만, 유지비도 많이 들어간다.
수리, 정비, 부품 시장에는 막대한 돈이 풀리는 것이다.
루산은 나중에 레이크 시티를 8구역 관리 체제로 넘겨주더라도 레이크 정비소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 지분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레이크 정비소는 엄청난 규모가 될 겁니다. 경정비, 수리 점검, 분해 정비, 조립 멕 생산에 이르기까지, 자체 멕 나이트 생산을 제외하고는 다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거예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나중에 본부와 협의해서 부장님이 레이크 정비소의 사장이 되고, 본부와 내가 지분을 나눠 갖는 방향도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히 사장님도 일정한 지분을 받게 되겠죠?”
“아······!”
바르통은 루산의 스케일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레이크 시티 서쪽, 레오파드 생산 단지 남쪽에 레이크 정비소를 건설할 겁니다. 부장님이 설계부터 참여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대규모 정비 공장의 사장이라니, 루산의 말을 들으면 불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3전대만 해도 몇 달 만에 멕 나이트가 급격히 늘지 않았는가?
레오파드 생산 단지가 건설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제국군에 수백 대를 납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변경 8군단에 레오파드 제품들을 원가에 저렴하게 공급하기로 협상이 끝났다는 이야기도 익히 알고 있었다.
바르통은 의욕이 솟구쳤다.
레이크 시티 서쪽 넓은 부지에 들어설 정비소를 설계하고, 그동안의 정비 경험으로 필요한 시설을 구상하고 제작소에 의뢰했다.
한편으로는 임시 정비소에서 새로운 요원들을 가르치고, 3전대의 멕들을 정비하고 수리했다.
글라디아토르 장갑판을 붙이는 일도 그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다.
휴일에 시간이 날 때는 글라디아토르 3호, 4호 제작을 위해 5구역과 7구역 중고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다.
전에 가져 보지 못한 크고 선명한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통은 레이크 시티로 와서 신 나게 일했다.
“부장님, 그러다 쓰러져요. 쉬엄쉬엄 하세요.”
“하하하, 강철 체력이라네. 걱정 마.”
주변의 걱정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
스텐커가 노바 역에서 율리안을 기다렸다.
율리안은 스텐커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경찰 출신의 스텐커는 루산의 편지 덕에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 중에서 감색 코트를 입고 있는 통통한 젊은 통치자를 금방 찾아냈다.
눈매가 날카로운 호위 기사가 옆에서 경호하는 모습도 율리안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통치자님. 저는 스텐커라고 합니다. 기사 보름스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럼 노바에 머무는 동안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영광이지요. 이쪽으로 가시죠.”
스텐커가 앞장서서 인파를 뚫고 길을 열었다.
역 밖으로 나오니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휘이잉~
“확실히 노바의 겨울은 춥군.”
율리안이 코트 깃을 세우며 말했다.
스텐커는 역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동 마차로 율리안을 이끌었다.
활동 폭이 넓어지면서 말을 관리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한 대 구입한 것이다.
그렇다고 마차를 처분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늘면서 탈것도 많이 필요해서 다른 사람들이 잘 타고 있었다.
“타시죠.”
“고마워요.”
율리안이 뒷좌석에 타고 그 옆에 경호 기사가 앉았다.
스텐커가 조수석에 탄 뒤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판코브 공원 북쪽 주택가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스텐커의 조수가 자동 마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혼잡한 역 주변을 지나자 자동 마차가 속도를 높였다.
“보름스 부장님 말로는 스텐커 씨가 많은 일을 해 왔다고 하더군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가는 동안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주시면 고맙죠.”
말투에서부터 상대에 대한 존중이 묻어 있는 율리안에게 스텐커는 기꺼이 그동안의 조사 내용을 설명해 나갔다.
율리안은 중간중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질문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휘우웅~
자동 마차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차 안에서는 설명과 청취의 뜨거운 열기가 이어졌다.
자동 마차는 어느새 판코브 공원 북쪽에 있는 고급 주택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위 귀족들이 주로 사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동네였다.
집집마다 매일매일 윤이 나게 닦는 자동 마차들이 여러 대씩 반짝이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율리안이 생각을 정리하느라 이맛살을 찡그리다 물었다.
“그런데 스텐커 씨, 이 사건에 확실히 개입한 몇 사람은 알겠는데, 최종적으로 주모자를 확정하지는 못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이 정도 왔으면 오베론 공작이 주모자인데, 그렇게 단정하는 것을 국구 꺼리고 있어요. 왜 그런 겁니까?”
“오베론 공작이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으니까요.”
“이유가 그것뿐인가요?”
“우리를 돕고 있는 군무부 감찰관도, 그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오베론 공작이 책임자는 아닐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음······.”
스텐커는 잠시 고민했다.
‘이런 말을 황족 앞에서 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까지 온 마당에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제가 알기로, 그러니까 고위층의 세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제가 알기로, 우리 제국에는 소위 귀족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스텐커는 잠시 단어를 고르려다 말았다.
불필요한 수고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반 황제 이후로 황제의 힘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국립 마법 연구소나 마찬가지라는 필센 마법 연구소의 물건이 밖으로 나돌고, 굉장히 많은 남방군 파일럿들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녕 황제께서 이 일들을 모르고 계신다는 것이 말이 될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 눈엣가시 같던 세력을 다 쓸어버리기 위해 이 사태를 묵인하거나 조장하거나 유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습니다.”
“······!”
“······!”
운전대를 잡은 조수와 율리안의 경호 기사가 깜짝 놀랐다.
‘황족 앞에서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다니!’
그러나 율리안은 놀라지도 않았고 타박하지도 않았다.
이미 루산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루산은 이 가능성 외에도 아우로라 연합의 책동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럼에도 율리안은 그동안 직접 조사해 온 스텐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스텐커가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황실, 정부, 권력층에 대해 잘 모르는 보통 사람의 섣부른 생각이었습니다.”
“하하하, 이제 와서 물러날 생각 말아요.”
책임 추궁이 아니라 분위기 전환용 농담이었다.
율리안의 농담에 차 안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확실한 건 우리에게 별로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며칠 동안 최선을 다해 봅시다. 저기 보이는 저택 앞에서 세워 주세요.”
“알겠습니다.”
스텐커의 조수가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 자동 마차를 세웠다.
“기다리고 있어요.”
“네, 통치자님.”
율리안과 그의 경호 기사가 자동 마차에서 내렸다.
율리안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오베론 공작이나 아우로라 연합의 책동이라면 상관없었으나 이 모든 것이 황제가 그린 그림이라면 자신의 개입은 황제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셈이 된다.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후우······.”
율리안은 숨을 길게 내쉰 뒤 가슴을 폈다.
‘황제라도 옳지 않은 일을 할 권리는 없다!’
대전쟁을 앞두고 나라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반 황제께서 많은 업적을 이루셨지만, 정적들을 불법적으로 제거하는 바람에 갈등이 더욱 깊어진 게 아닌가?
율리안은 그렇게 생각하고 대문으로 다가갔다.
문지기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율리안 볼프스 마이센이 외숙을 뵙고자 왔네.”
문지기가 깜짝 놀라 문을 열었고, 다른 사람이 서둘러 안에 기별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