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밥이나 먹고 가라
98. 밥이나 먹고 가라
“조카님이 무슨 일이신가?”
밤베르크 백작이 율리안을 반갑게 맞이했다.
체격이 건장하고 허리가 꼿꼿하여 전혀 노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노바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외숙 생각이 나서 왔습니다.”
“그래, 잘 왔어. 식사는 하셨나?”
“식사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율리안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밤베르크 백작은 그를 서재로 이끌었다.
밤베르크 백작 가문은 필센 제국 중부의 유서 깊은 영주 가문으로 드넓은 농지와 목장을 바탕으로 농업, 축산업, 섬유 산업이 발달해 예로부터 풍요를 누려 왔다.
공작이나 후작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재력과 무력을 보유해, 직접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거나 방해할 정도의 힘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개혁 헌법이 수립되고 많은 개혁 조치들이 시행되면서 드넓은 농지와 목장을 보유하고 있던 밤베르크 가문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제국의 자영농 육성 정책에 따라 보유하고 있던 농지 대부분을 농민들에게 장기 유상 이전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밤베르크 백작은, 대부분의 영주들이 저항하고, 거부하고, 시늉만 하는 것과는 달리, 따를 수밖에 없다면 적극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보고 정부 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밤베르크 지방의 농지를 농민들에게 신속히 분배했다.
그 덕분에 정부의 우호적인 태도 속에서 정책 지원 자금을 가장 먼저 받게 되었고 거기에 가문의 재산을 더해 산업 전환에 쏟아부었다.
사회 개혁으로 가세가 크게 꺾일 뻔했던 밤베르크 백작 가문은 축산물 가공 산업, 피혁 산업, 섬유 산업의 규모화와 효율화를 이룩하여 필센 제국 중부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밤베르크 백작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른 영역에서도 정부의 정책을 적극 수용했다.
먼저,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대학에 보냈다.
큰아들은 제국 기사 아카데미, 둘째 아들은 제국 대학 법학과, 딸은 노바 대학 문예과에 보낸 것이다.
특히 딸까지 대학에 보낸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다음으로, 대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큰아들이 가문의 병력을 직접 이끌고 바다 건너 동방 전선으로 이동했을 뿐 아니라 밤베르크 백작은 가문의 모든 유동 자산으로 전쟁 채권을 구입했다.
이러한 애국심과 충성심은 이반 황제의 눈에 들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은 밤베르크 백작 가문을 황제파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시작은 격변의 시대를 헤치고 살아남기 위한 전대 밤베르크 백작의 선택에서 비롯되었지만, 밤베르크 가문을 이처럼 튼튼하게 세운 것은 현 밤베르크 백작 - 율리안의 외숙 - 덕분이었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갈 만큼 우수한 실력을 지닌 그는 동방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가문의 기여와 자신의 실력 덕분에 나중에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수도 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기나긴 전쟁으로 유능한 군인들이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유능한 군인이었던 것이다.
밤베르크 백작 - 율리안의 외숙 - 은 이반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현 황제의 친구였으며, 전선에서 직접 많은 전공을 쌓았기 때문에 훗날 제국군을 통솔하는 자리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군 경력은 수도 군단 사령관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여동생이 현 황제의 사촌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방계 황족의 처남을 제국군 총사령관 자리에 앉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반 황제와 현 황제는 그의 재능을 아깝다 여겨 북방의 골칫거리 오베리 왕국의 대사로, 아우로라 연합의 중심 페르보 제국의 대사로 임명했다.
그러다 귀국하여 지금은 무역 공사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밤베르크 백작은 여동생 - 율리안의 어머니 - 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야심이 크고, 능력이 야심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었던 그는 여동생을 현 황제와 이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노바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여동생은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네 사네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결국은 힘없는 황족에게 시집을 가서 오빠의 앞날을 가로막았다는 생각에 싫은 소리를 몇 번 했더니 그 뒤로 여동생은 그의 얼굴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밤베르크 백작이 수도 군단 사령관까지 올라간 것은, 그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으며 황제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쨌든 여동생과의 사이는 소원했으나 조카는 또 아껴서 율리안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변경 8구역 개척 자금이 부족할 때 최종 자금줄 역할을 기꺼이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중요한 일이기에······.”
“외숙, 외숙께서는 황제 폐하와 친분이 깊으시죠?”
왜 묻는지 몰랐지만, 밤베르크 백작은 조카의 진지한 표정에 일단 진지하게 대답했다.
“친분이 깊지.”
“황제 폐하에 대해 잘 아시죠?”
“잘 알지.”
율리안은 여기까지 와서도 고민했다.
누가 뭐라 해도 밤베르크 백작은 황제파였다.
그럼에도 이제는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승승장구하던 엘리트였으나 지금은 군인도 아니고, 관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공사 사장이라는 한 단계 떨어진 자리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원로에 속했다.
황제와 함께 모략을 꾸미는 자리가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여기로 온 것이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대답해 주세요. 황제 폐하는 이반 황제처럼 반대파를 계략을 써서 숙청하실 수 있는 분인가요?”
밤베르크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조카님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불경스러운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언제나 말이 화를 부른다는 걸 명심하시게.”
“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대답해 주세요. 제국의 안위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니까요.”
“흐음······.”
밤베르크 백작은 따끔히 야단치기 전에 일단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내가 아는 황제 폐하는 그러실 분이 아니야. 황제 폐하는, 이반 황제 때 숙청을 당한 사람들 때문에 무척 가슴 아파 하셨다. 그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거든. 친우의 부친이나 형이나 친척이었단 말이지.”
“······.”
“황제 폐하께서는 이반 황제와 끊임없이 비교를 당해 오셨다. 위대한 아버지를 둔 자식의 숙명이지만, 그래서 선황 폐하의 업적에 결코 누를 끼치지 않고 그 뜻을 잇기 위해 애를 써 오셨지. 그럼에도 반대파 - 이런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지만 - 를 힘으로 누르려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 제국이 이반 황제 때에 비해 조금 어수선하기는 하나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셨다.”
“하지만, 모르는 일 아닙니까? 사람 마음을 누가 알겠어요? 나중에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요.”
“결코 그럴 분이 아니야!”
밤베르크 백작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무리 아끼는 조카라도 자신이 평생 벗으로 여기고 함께해 온 황제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율리안은 확신했다.
황제가 이번 일을 꾸몄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외숙인 밤베르크 백작은 이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죄송합니다. 워낙 중요한 사안이다 보니······. 화를 가라앉히세요.”
율리안은 품에 지니고 있던 파펜과 레보르크의 편지 필사본을 꺼내 외숙에게 내밀었다.
밤베르크 백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그것을 받아 읽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게 무엇인가?”
율리안은 이 편지가 작성된 계기를 차분히 풀어 나갔다.
루산의 이름과 가문을 밝히지는 않고 귀족 가문 사기 사건과 이를 조사하게 된 계기부터 시작해서 남방군 파일럿의 기이한 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은 밤베르크 백작은 조카가 왜 자신에게 황제의 됨됨이를 물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율리안도 황제를 본 적은 있지만, 행사 때나 가끔, 그것도 어렸을 때 본 적이라 황제의 진정한 면목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율리안이 밤베르크 백작에게 물었다.
“대전쟁 발발 가능성은 사실입니까?”
“군부와 정부 고위층에서는 다들 그렇게 여기고 있지. 당장 무역이 끊긴 것은 아니지만, 몇몇 전략 물자의 거래가 기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아우로라 연합 쪽 병력 이동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
군대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밤베르크 백작은 여전히 군대 내 소식에 정통하다는 것을 율리안은 깨달았다.
이번에는 밤베르크 백작이 율리안에게 물었다.
“조카님은 이걸 왜 나에게 가져오셨는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고?”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리고 외숙은 황제 폐하께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지시를 내리신 게 아니라 할지라도 폐하의 뜻을 짐작해 누군가가 움직였을 수도 있는 것이고, 폐하의 눈을 가리고 누군가가 전횡을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황제 폐하 측에 먼저 알리지 말고 노바 안에 있는 관련 인물들을 모조리 체포해야죠.”
밤베르크 백작은 황제의 결백을 믿었지만, 율리안의 말이 옳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황제가 변하지 않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황제를 등에 업고 황제의 뜻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권력을 남용할 가능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고관들은 다 이반 황제의 숙청 시대 - 모략과 계략의 정치를 겪은 사람들이라 이 편안한 방식에 유혹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과연 황제 폐하 측 - 혹은 정부에 알리지 않고 반란 세력을 어떻게 체포할 수 있느냐이다.
“허허허, 조카님은 내가 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율리안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외숙께서 못 하시면 아무도 못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능력을 높게 봐 주는 건 고마운 일이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죠.”
“응?”
갑작스러운 여동생 이야기에 밤베르크 백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외숙 말씀을 들을 걸 그랬다고요.”
“뭐라고?”
“그랬으면 남편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일도 없었을 테고, 외숙도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참 미안하다고요.”
“이것 참······.”
“그래도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꽤 매력이 있었답니다. 아버지한테도 미안하다시네요.”
“크크크!”
율리안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푼 뒤 진지하게 말했다.
“외숙께서 못 하시면 아무도 못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큰 위기를 겪게 될 겁니다.”
“음!”
밤베르크 백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공권력을 동원해야겠군.”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다만 반란 사건이라고 말하면 위로 곧바로 보고될 테니 반란이 아닌 다른 사건이라고 둘러대야겠군.”
“그렇죠.”
“그러면서도 상대가 멕 나이트 파일럿이고 실제로 멕 나이트를 동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이를 억누를 강력한 힘을 동원해야 해.”
“맞습니다.”
밤베르크 백작은 율리안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 냈다.
“해 봅시다, 조카님.”
단지 조카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가 위기에 빠지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외숙.”
밤베르크 백작은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쓰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라의 크나큰 위기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걱정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활약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두근거림.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것은, 조카의 뛰어남을 확인한 두근거림이었다.
위기 앞에 당황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며 적절한 농담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어이 설득해 내는 조카.
밤베르크 백작은 저도 모르게 율리안의 황위 계승 서열을 따져 보게 되었다.
아쉬움의 탄식이 튀어나왔지만, 그와 함께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야심이 솟아 나오기도 했다.
“조카님, 같이 가시겠는가?”
“아닙니다, 외숙. 저도 따로 볼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래도 밤에는 여기로 오시게.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밤베르크 백작이 고급 자동 마차를 타고 떠났다.
율리안도 스텐커가 기다리고 있는 자동 마차로 갔다.
“일은 잘되셨습니까?”
“첫 단추는 잘 끼운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 볼까요?”
“네, 통치자님.”
스텐커가 신호를 주자 그의 조수가 자동 마차를 출발시켰다.
***
루산은 단장의 호출을 받았다.
“3전대장.”
“네, 단장님.”
“요새 통치자님과 무슨 일을 꾸미나?”
단장의 직설적인 질문에 루산은 살짝 당황했다.
“네?”
“요새 통치자님을 따로 자주 뵌다는 이야기가 본부에 좍 퍼졌어. 이게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인지는 너도 잘 알 테지?”
루산은 율리안을 따로 만난 적이 한 번밖에 되지 않는다는 변명은 하지 않았다.
“···네.”
“통치자님은 내게 정확한 사유도 말씀 안 하시고 노바로 출장을 가셨어. 이건 처음 있는 일이거든.”
“···네.”
“보고 계통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너라도 쳐 낼 것이다.”
분명한 경고.
루산은 단장의 성격상 이 말을 지키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지휘 계통이 엉망이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지금까지 8구역에 구축해 놓은 인맥과 평판, 가프 마법 연구소와 관련 업체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레이크 시티를 날리는 셈이 된다.
그래도 두렵지 않았다.
단장은 자신을 자르지 못한다.
‘아무리 너라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효용 가치가 다하지 않았고, 통치자가 막아 줄 것이며, 나중에 이번 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오히려 비밀 유지를 위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비밀 공유에서 제외되었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작용해 자신을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야속하게도 세월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장은 늙을 것이고 율리안의 입김이 8구역 전체에 미칠 것이다.
루산은 단장을 미워하지 않았다. 8구역에 젊음을 바쳐 왔고, 변경에서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써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장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 상대할 적도 버거운데, 가까이 지내는 동료들과 기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무의미한 힘겨루기의 패자는 결코 자신이 아닐 것이다.
변경 8년 차인 루산은 단장이 두렵지 않았다.
“단장님.”
“왜?”
“감사합니다.”
“뭐?”
단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따끔하게 야단쳐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아부하나?”
“아닙니다.”
단장이 루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됐다. 밥이나 먹고 가라.”
“네?”
“점심시간이잖아. 레이크 시티까지 가려면 한참이니 밥이나 먹고 가. 내가 살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루산은 단장과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7구역에 대해 물으니 단장이 눈에 불을 쓰고 험담을 했다.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