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도구 따위에는 관심 없다
106. 도구 따위에는 관심 없다
“이렇게 이길 줄 알았으면 코부스 역 철로를 부수는 게 아닌데······.”
바이크가 철로 복구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빵을 우걱우걱 먹던 시에나가 대꾸했다.
“그어 쭈 아아나?”
“뭐?”
“그어 쭈 아아냐고!”
“다 먹고 말해! 더럽게 튀기지 말고.”
바이크의 핀잔에 시에나가 다람쥐처럼 빠르게 입을 움직이다 입안의 내용물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목에 걸리고 말았다.
“켁켁!”
“야! 이거 마셔.”
시에나는 바이크가 내민 우유병을 낚아채 벌컥벌컥 마셨다.
“후유~ 죽을 뻔했네.”
“으이그!”
바이크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보자 시에나는 우유가 묻은 입술을 손으로 쓱 닦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냐고? 시키는 대로 했으니 잘한 거지. 임무 완수했다고 기고만장할 때는 언제고 공사하는 아저씨들이 욕하는 소리 듣고 그새 풀이 죽어서는···, 쯧쯧쯧.”
“······.”
“욕하는 사람들도 결과적으로 하는 말이지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아무도 몰랐어. 대장님도 몰랐다고. 어찌 될지 모르니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거지. 근데 네가 무슨 잘못이 있어?”
“그래도······.”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잘난 체하고, 실수를 해도 뻔뻔하고 당당한 게 바이크의 매력 아니야?”
“이 씨! 욕을 해라, 욕을 해.”
“시끄러! 이런 일로 풀 죽지 마.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스스로 기가 죽어? 좀 모자란 놈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좋단 말이야. 목소리 크고 활기 넘치는 모습 말이야.”
시에나의 말에 바이크는 기분이 다 풀렸다.
잠시 후 바이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하냐?”
“허!”
시에나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게 미쳤나? 확 씨!”
“힉! 아니면 말지 오빠한테 손찌검을 하려고 그래?”
“오빠 같은 소리 하네. 바이크, 난 말이야. 나보다 약한 녀석한테는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거든? 우리 대장님 정도는 돼야 이 강하고 어여쁜 소녀의 순정을 받을 자격이 있지.”
바이크는 강하다는 말과 어여쁘다는 말이 함께 쓰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시에나를 수식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러웠으나 따지지는 않았다.
“이게 전우로서 따뜻한 위로 한마디 해 줬더니 헬렐레 해 가지고. 확 씨! 이거나 먹어!”
시에나는 코부스 역 빵집에서 구입한 고기 빵을 바이크 입에 쑤셔 넣고 팽 돌아서 가 버렸다.
바이크는 멀어지는 시에나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나도 더 강해질 거다, 뭐.”
그러고는 빵을 씹었다.
“맛있네.”
바이크는 얼른 시에나 뒤를 따라갔다.
“야! 같이 가.”
“꺼져!”
“미안해.”
“꺼지라니까!”
“빵 더 사 줄게.”
“······.”
시에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돌아보지는 않았다.
“채소 빵, 고기 빵, 다 사 줄게.”
“···주스도.”
“크크크, 알았다.”
두 사람은 루산이 알려 주어 요새 계속 드나드는 빵집으로 다시 가서 빵을 잔뜩 샀다.
시에나와 바이크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풀렸다.
***
노바로 사건을 보고하고, 쓰러진 멕 나이트를 회수하고, 철로를 복구하는 작업이 즉시 진행되었다.
변경 7구역 통치자가 변경부 특별 감찰단 조사관들을 감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증언에 따라 코부스 지방군 멕 나이트 20대와 보병 2천 명이 7구역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변경 깊숙한 곳에 있는 개척지를 지키는 멕 나이트 몇 대를 제외하고는 7구역에 남아 있는 기체가 없어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7구역 통치자가 말과 몸짓으로 거세게 저항한 것이 전부였다.
“무슨 권리로 나를 체포한다는 것이냐?”
“체포가 아니라 진상을 조사하는 동안 잠시 한곳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반란 사건이므로 협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그러나 힘없는 통치자의 몸부림은 부질없었다.
7군단 단장조차 통치자를 외면했다.
갇혀 있다 풀려난 변경부 감찰단 조사관들은 분노하여 없는 반란도 만들어 버릴 기세로 통치자와 7군단 간부들, 그리고 남아 있는 파일럿과 전투 요원들을 탈탈 털었다.
코부스 지방군에서 파견된 병력이 든든히 지켜 주고 있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조사관의 절반은 긴급히 코부스로 파견되어 임시로 수용되어 있는 변경 7군단 파일럿들과 반란군 파일럿들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반란군은 7구역으로 들어온 지 15년이 넘은 파일럿이 없었다.
그래서 15년이 넘은 7구역의 변경 파일럿은 멕 나이트와 함께 돌려보냈다.
멕 나이트가 너무 많이 빠져 7구역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돌아간 멕 나이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15년이 안 된 파일럿들은 좀 더 강도 높은 조사를 거친 뒤 멕 나이트는 코부스에 두고 파일럿만 돌려보냈다.
“반란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에 7구역에 멕 나이트를 늘려 줄 수는 없습니다.”
조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행여나 반란이 다시 일어나면 어떡할 것인가?
7군단 파일럿들은 조사관, 반란군, 통치자를 욕하며 생계 수단 없이 걸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 참여하다 붙잡힌 반란군 포로들은 코부스 지방군, 코부스 경찰, 변경부 감찰단 합동 조사단에 의해 심문을 받았다.
변경 파일럿을 조사할 때는 그나마 싸늘한 말투 속에 처지가 딱하다는 동정심이 조금이나마 포함돼 있었으나 반란군을 대할 때는 전혀 없었다.
어차피 죽을 죄인에게서 한 가지 단서라도 더 짜내겠다는 마음으로 육체와 정신을 쥐어짰다.
반란군 파일럿들이 수용된 임시 감옥에서는 고함과 비명이 그칠 새가 없었다.
“죽이지는 마. 수도에서 곧 전문가들이 파견될 테니까.”
고문 전문가를 암시하는 말에 반란군 파일럿들은 몸을 떨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루산은 조사단 측에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이 남방군 출신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면 설명이 아주 복잡해지고 한참 동안 시달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율리안이 나서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였다.
어쨌든 단서 없는 조사는 성과도 거의 없었다.
루산은 해당 파일럿들이 7구역에 들어온 시기, 그동안의 실적과 급료, 평판과 특징 등에 대한 자료를 변경부 감찰단으로부터 얻어 죽 살펴보았다.
반란군 파일럿들 뿐 아니라 가담하지 않은 7군단 파일럿들의 자료로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쯤 되자 남방군 출신 파일럿과 순수한 변경 파일럿의 실력, 수입, 평판과 태도, 승진에 걸리는 기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반란 사건과 무관하게 변경에서 파일럿을 뽑거나 기동 부대를 운용할 때 유의할 점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만큼 7구역의 파일럿 자료는 방대했던 것이다.
그렇게 자료 분석을 마치고 반란군 파일럿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가서 우두머리를 만났다.
얼굴에 흘린 피는 굳어 피딱지가 되었고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는 오토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루산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다 다른 조사관과 병사에게 말했다.
“잠시 혼자 있게 해 주겠어요?”
“알겠습니다.”
조사관과 병사는 반란군으로부터 코부스를 지켜낸 영웅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루산은 근처에 있는 물통을 들어 철창 안으로 뿌렸다.
촥-
오토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야. 곰 닮은 멕 나이트를 탄 8군단 파일럿 루산 보름스.”
오토가 고개를 치켜들고 루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루산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너희가 남방군 출신이든 북방군 출신이든 관심이 없어.”
남방군이라는 말에 오토가 흠칫 놀랐다.
그동안 어떤 조사관도 이 말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여전히 비밀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너희가 왜 반란에 가담했는지도 짐작이 되고. 숙청당한 귀족들의 잔당이겠지, 뭐.”
숙청, 잔당이라는 표현이 오토의 신경을 긁었다.
“이놈!”
“예전이라면 개인적으로 동정했을지도 몰라. 제국 발전의 희생양이라면 희생양이니까. 억울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은 너희에 대해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어. 왠지 알아?”
“······.”
“너희 무리가 우리 가문을 무너뜨렸거든.”
배후가 누구냐? 이름이 뭐냐?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반란을 위해 보름스 가문의 재산을 사기 쳐 빼앗고 그 땅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단 말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빚쟁이에 시달리다 뿔뿔이 흩어졌지.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변경으로 왔고.”
“······!”
“이런 가문이 한둘이 아니더라고. 기록을 보니 7구역으로 들어온 지 15년이 되었더군. 우리 가문의 재산을 앗아간 시기보다 빨라. 그러나 나는 모른다고,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말아 줘. 명색이 귀족 출신이잖아. 최소한의 당당함은 남아 있어야 귀족 아니야? 그 정도로 비루하면 귀족도 뭣도 아니지.”
“으음······!”
오토는 신음을 흘렸다.
변경 한 구역의 병력을 책임지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루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황제는 목적을 위해 너희 가문을 희생시켰어. 너희는 목적을 위해 우리 가문을 희생시켰지. 너희가 이반 황제와 다를 바가 뭐야?”
“그건······!”
오토는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많은 걸 알아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아. 이 이야기의 전말을 모르겠거든. 짐작되는 것 중 하나는, 너희는 순수한 복수를 위해 뭉친 게 아니야. 누군가에 의해 놀아나고 있단 말이지. 누군가가 너희의 복수심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헛소리!”
오토가 소리쳤다.
그러나 루산은 코웃음을 쳤다.
“흥! 이렇게 멍청하니까 변경에서 15년이나 썩고 앉아 있지.”
“뭐라고?”
“좋게 말하면 순수하다고 할까? 복수심에 불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덕에 웃음 짓는 자가 누구일지 생각해 봐. 이반 황제로부터 당한 게 전혀 없으면서도 귀족파의 지지를 얻고 있는 오베론 공작일지, 이 기회에 반란을 빌미로 귀족파를 쓸어버리고자 하는 황제일지, 그것도 아니면 필센 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국력을 소모시키고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아우로라 연합일지. 나는 아직 모르겠어. 분명한 것은 너희는 이용만 당하고 끝날 거라는 거지.”
“음······.”
“재산을 되찾고 명예를 회복한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 그 재산이 남아 있나? 평민들에게 돌아간 너희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너희 가문이 차지하던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다 들어앉았는데, 순순히 내놓을 것 같아? 설사 황제를 죽인다 해도 전쟁이야! 한 줌도 안 되는 너희들과 필센 제국 멕 나이트 파일럿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평민 기사들, 변변한 재산도 없는 망한 귀족들과 이 나라의 땅과 돈을 점점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평민들, 싸움이 되겠어? 이 어리석은 것들아!”
루산의 호통이 오토의 귀에 벼락같이 꽂혔다.
“사회 개혁 이후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몰라? 하긴 남방군은 여전히 귀족 출신 파일럿이 대다수라고 듣긴 했어. 그러니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지!”
오토는 계속해서 몰아치는 루산의 언어 공격에 충격을 받았다.
루산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나는 너희 따위는 관심이 없어. 도구에 불과하잖아. 도구를 때려서 뭐 할 거야? 내가 궁금한 건 이걸 꾸민 게 누구냐는 거야. 오베론 공작이야, 황제야, 아우로라 연합이야, 그도 아니면 다른 자야? 누구야?”
오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알려 주면 명예롭게 보내 주겠다. 고통을 덜 겪도록 해 줄게. 나도 명예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변경의 파일럿에 불과하지만, 남은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고통을 겪으며 잘 생각해 봐.”
그 말을 끝으로 루산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오토는 고개를 들고 루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힘이 빠져 바닥에 얼굴을 떨구었다.
루산이 뿌린 물과 자신의 피가 섞여 축축했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루산의 말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도구라고?’
‘이용당했다고?’
이후 조사관이 다시 들어오고, 폭행과 폭언을 당하고, 심문을 당했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루산이 한 이야기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지난 세월을 누군가의 도구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으!”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몽둥이로 두드려 맞은 고통 때문인지 루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