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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116화 (116/450)

116. 상 주는 날 벌을 주랴

116. 상 주는 날 벌을 주랴

스텐커의 사무실에는 루산, 스텐커, 포렌시스, 오스카 외에도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 사기 사건으로 피해를 본 가문의 일원으로 스텐커가 미행과 조사에 합류시킨 사람들이었다.

율리안 또한 루산 옆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며 루산에게 참석을 요청한 것이다.

“사람들이 불편해 할 테니까 정체는 밝히지 말아 주세요.”

그래서 루산과 스텐커는 율리안을 사기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또 다른 귀족 가문 사람이라고 간단히 소개하고 참석시켰다.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개혁 헌법 60주년 기념식에서 황제가 공작의 손을 잡은 일로 실망이 컸던 것이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법적인 방법과 정치적인 방법이죠.”

변호사 포렌시스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법적인 방법은, 애초에 재산이 은행에 넘어가게 된 과정에 중대한 불법 - 즉 계획된 사기가 개입했음을 밝히고 소유권 이전의 무효를 주장하는 겁니다. 또한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죠. 이번에 이 사건과 관련된 공업 은행 관계자들과 정부 관리들을 체포했기 때문에 그들을 추궁해 일련의 과정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수차례 논의된 이야기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법적 해법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법적인 방법을 택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죠. 일단 툴롱 마법 연구소가 쏙 빠져 버린 겁니다.”

경찰이 툴롱 마법 연구소에 진입해 마법사들을 체포하는 일은 결국 무산되었다.

황제는 전쟁 위기 상황에서 멕 나이트를 만들 능력이 있는 마법 연구소를 없애 버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게다가 툴롱 마법 연구소는 자유 선언 연구소들의 구심점이었다. 마법 연구소들의 협력이 절실한 이때 그들을 자극하는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용서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툴롱 마법 연구소는 반란 사건에 개입한 일로 처벌받는 대신 이 사건을 묻어 주는 대가로 황제가 채운 족쇄를 차고 필센 제국에 부역하게 된 것이다.

루산과 사기 사건 피해자들이 툴롱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들을 엮는 것은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돼 버렸다.

사기 사건의 중요한 고리인 툴롱 마법 연구소가 빠지면 공업 은행 관계자나 정부 관리들도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현 황제 아래에서 그들이 사기 피해자들에 이로운 진술을 해 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남방군 파일럿이나 오베론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피해 가문 재산을 가로채는 과정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남방군 파일럿 가운데 반란이 아닌 이 일에 투입된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들을 우리가 확보할 수도 없으며, 이 시국에 황제가 임명한 재상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흐음······.”

참석자들이 신음을 흘렸다.

“이 사건을 재판으로 끌고 가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봅니다. 일단 우리 힘으로 모든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여러 제약으로 인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명목상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제주의나 다름없기 때문에 검사나 판사들이 황제의 뜻을 거슬러 제대로 조사하고 심리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명목상 법치, 실질적 전제!

포렌시스의 과격한 말에 루산과 스텐커는 깜짝 놀라 율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율리안은 흥미롭다는 듯 포렌시스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재판을 통하기보다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하는 것이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리가 완벽한 증거와 증언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많은 관련자들의 행적을 조사해 왔습니다. 저들이 개입한 증거의 퍼즐 조각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고, 이를 통해 상당히 치명적인 사건 전모를 알고 있죠.”

황제와 공작이 손을 잡고 계략을 꾸몄다는 증거를 완벽하게 확보하지는 못했어도 그것을 추정할 만한 단서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보름스 기사님이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우셨기 때문에 모양새도 좋습니다. 반란 진압에 기여한 공적을 바탕으로 반란 세력이 사기를 쳐 빼앗은 재산을 돌려받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통하지 않을까요? 재판으로는 여러 해가 걸릴 일이지만, 황제나 공작이 힘을 쓴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참석자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은 너무 쉽게 법적 절차에 의한 해법을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현실적으로 승소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검사나 판사들이 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으리라 보십니까? 왜 무조건 황제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시죠? 양심과 선의를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과 자긍심이 있습니다. 황제의 힘이 강한 것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개혁 헌법은 60주년을 맞을 만큼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습니다. 왜 그들이 헌법에 따르지 않고 황제의 불법적인 명령에 따를 거라고 생각하죠?”

“······!”

“변호사님이 법적 절차에 의한 해법을 포기한 데에는 법보다 현실의 힘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변호사님의 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요?”

포렌시스가 입술을 깨물고 율리안을 노려보았다.

오늘 처음 참석해 이 사건의 어려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상론만 늘어놓는, 현실 모르는 젊은 귀족 나부랭이로 본 것이다.

그러가 그가 반박하기 전에 율리안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나라는 명목상 법치주의이지 사실상 전제주의라는 변호사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더라도 법적 절차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황제에게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라고요? 황제가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라면서요? 상대가 될까요?”

“음!”

타협은 대등한 힘을 지녔을 때나 가능한 법.

확보한 증거로 황제를 압박하고 추궁한다면 황제가 순순히 물러날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최전방으로 끌려가는 반란군 파일럿들과 비슷한 신세가 되거나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황제가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습니다. 정황 증거만 있을 뿐이죠. 공작이 개입했다는 증거도 분명하지 않죠. 공작의 고용인들이 경매에 넘겨진 땅을 구입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의 불법을 증명할 수 있나요? 없죠. 단, 황제에게는 정부 관리들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휘 감독할 의무가 있습니다. 최소한 여기에는 해당하는 겁니다. 정부 관리들의 불법, 공업 은행 관계자들의 불법, 그리고 황제의 지휘 감독 의무 소홀! 최소한 이 정도 쟁점으로 재판을 걸 수 있을 겁니다.”

“재판으로 과연 승소하고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겠어요?”

“그건 변호사님이 해 주실 일이죠.”

그것을 위해 고용된 것 아니냐는 힐난에 포렌시스는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법률 서류 검토를 위해 고용되었다는 변명은 이 사람들 앞에서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포렌시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끙!”

“확실한 건, 정치 협상 같이 어두운 곳에서 벌이는 방법으로는 절대 황제를 이길 수 없다는 겁니다. 명목상 법치주의에 불과할지라도 법에 따라 밝은 곳에서 일을 처리해야 황제가 화가 나더라도 함부로 해코지를 못하지 않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는 60년이 된 개혁 헌법이 있었고 법 앞에 평등을 내세우는 나라였다.

포렌시스는 그것을 명목상 법치주의라고 폄하하지만, 어쨌든 황제라 할지라도 겉으로 드러난 일로 해코지를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오히려 황제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코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포렌시스는 율리안의 말을 일부분 수긍했다.

그때 루산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법적인 방법, 정치적인 방법, 둘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먼저, 확보한 증거로 소송을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공작이나 황제 폐하께서 반란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다는 식의 주장은 철저히 빼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로 공격하면 우리는 짓밟힐 겁니다. 증거가 있다 해도 밟힐 텐데 온전한 증거가 없어요. 그러니 철저히 재산 사기 사건에 한정해서 확보한 증거와 증인을 바탕으로 재판을 진행해야 합니다.”

참석자들은 황제와 공작이 반란 사건과 엮여 있다는 이야기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루산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그러나 공작이나 황제가 불편하게 여기는 부분은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고위 관리의 개입이나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엮여 있는 부분은 황제와 공작을 압박하기 위해서라고 강하게 내세워야 합니다. 소장을 제출하는 날, 이런 내용을 실은 신문 기사도 함께 내도록 하죠.”

“신문 기사?”

율리안이 루산을 쳐다보았다.

“네. 황제 폐하와 공작을 공격하는 내용이 아니라 정부 관리들 일부가 반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족 재산을 강탈했다는 내용,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그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의 최종 소유자가 되었다는 내용을 거론하기만 해도 압력을 받을 테니까요.”

“그렇지! 전제 정치가 유지되려면 백성들의 지지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법! 황제는 당연히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해 줘야 한다는 압력을 받겠지.”

율리안이 포렌시스를 보고 빙글거리며 말했다.

포렌시스의 뜻에 따라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것인데, 밀실 타협이 아니라 신문의 기사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이게 더 나은 것 같지 않나요?’

‘끙!’

루산이 계속해서 말했다.

“변호사님의 말대로 내가 반란 사건에 약간의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니 포상을 받을 때 기회를 봐서 황제 폐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해 보겠습니다.”

소송, 신문 기사, 직접 호소, 세 가지 방법을 다 써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재산을 돌려받는 것과 관련된 일에 한정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망, 남은 가족들이 겪은 고통, 이 일의 진정한 원흉에 대한 복수는 율리안이 있는 이 자리에서 말하기 어려웠다.

율리안이 없었더라도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진짜 원흉에 대해 복수하기를 원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황제나 공작이 깊게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일에 복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재산을 찾는 데 만족하고 이 고통스러운 일을 잊어버리기를 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베론 공작의 둘째 아들을 납치한 일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몰랐다.

재판에서 활용할 수도 없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진정한 복수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참석자들 대부분이 루산의 말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군무부 감찰관 오스카 빈켈이 루산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까?”

재산을 돌려받기에 충분한 조치들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착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복수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맹수와 같은 그 눈빛을 보고 루산은 오스카 빈켈을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으로 점찍었다.

“충분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럼요. 앞으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루산과 오스카가 짧은 시간 강렬한 눈빛을 교환했다.

사흘 뒤, 포렌시스는 반란군의 자금 확보 및 작전 수행에 필수적인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귀족 재산 사기 사건 피해자들의 공동 대리인이 되어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같은 날, 주요 신문에 해당 사건에 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이 일은 그동안 신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온 바덴이 담당했다.

“보름스 부장님, 괜찮겠어요?”

쫙 빼 입은 율리안이 기사가 실려 있는 필센 데일리를 접으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상 주는 날인데 벌을 주지는 않겠죠.”

오랜만에 주름 없이 빳빳한 옷을 입은 루산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들은 심호흡을 하고 황궁을 향해 걸어갔다.

반란 진압에 대한 공으로 포상을 받는 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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