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요새 많이 한가해요
117. 요새 많이 한가해요
“루산 보름스, 앞으로!”
의식을 맡은 궁내부 비서가 루산을 호명했다.
정부의 고관들과 장군들, 황실의 고위 비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산은 황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변경에서 지내는 동안 일부러라도 흐트러뜨려야 했던 걸음걸이가 저도 모르게 과거를 되찾았다.
루산은 제국 기사 아카데미 졸업식 때처럼 절도 있고 품위 있게 걸어 황제 앞에 섰다.
“루산 보름스는 반란을 막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제국의 안녕에 기여했기에 2등 무공 훈장을 수여한다.”
황제가 루산의 텅 빈 왼쪽 가슴에 은빛 사자 메달을 달아 주었다.
그런 뒤 검집과 손잡이에 은빛 사자가 상감된 고급스러운 보검 한 자루를 하사했다.
멕 나이트가 전장에 등장한 이후 기사들이 검을 맞대고 싸우는 빈도는 현저히 줄었으나 멕 나이트의 검술은 기사의 검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전쟁 방식이 멕 나이트 대전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기사에게 검의 중요성은 여전이 높았다.
부상으로 수여된 이 은빛 사자 검은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르며 성장해 온 필센 제국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결코 예식용이 아닌 실전용 검이었다.
루산은 은빛 사자 검을 두 손으로 받아 왼손에 들었다.
그 묵직한 무게감에 루산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걸 받다니······!’
가문이 망하고 변경을 택한 이후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무공 훈장.
어릴 때부터 유일한 미래로 생각해 온 명예로운 기사의 길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주는 이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가문이 망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제가 수여한 훈장과 부상이라는 생각에 잠깐의 설렘은 사라지고 루산은 냉정을 되찾았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루산에게 말했다.
“궁내부 비서들 말로는, 민간인이 2등 무공 훈장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군.”
민간인이라는 말이 루산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변경 파일럿이 약간 특수하기는 하지만, 군인이나 경찰이 아니면 민간인이었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코부스 사령관도 그렇고 북방군 3군단장도 그렇고 변경 파일럿으로 두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하던데, 어떤가? 동방군 기동 전대장이면 그대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자리에 참석한 장군들과 군 편제에 대해 잘 아는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국군 기동 전대장이면 멕 나이트 30대 안팎과 각종 지원 부대 병력을 지휘하는 자리.
전단장부터는 장군으로 불리므로 20대 후반의 나이에 제국군 기동 부대 전대장이면 엄청나게 높은 지위였다.
그 나이면 아무리 유능한 파일럿도 기껏해야 조장이나 소대장에 해당한다.
물론 단 한 번의 전공으로 2등 무공 훈장을 받을 정도면 매우 뛰어난 파일럿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황제의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루산 또한 갑작스러운 황제의 제안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변경 8군단 1, 2전대는 중고 멕 나이트 15대 안팎을 지휘했다.
3전대가 최근에 가프 마법 연구소로부터 레오파드 시제기를 계속 공급받아 20대가 살짝 넘었지만, 아직 완전히 3전대의 기체도 아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래된 중고 기체였다.
‘반면 동방군 기동 전대는 최전선답게 늘 최상의 상태로 기체를 준비시켜 놓고 최고의 파일럿들이 탑승한다는 부대가 아닌가? 그곳의 전대장이면 대전쟁의 최전선에서 계속 공을 세울 수 있다!’
더없이 명예롭고 더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가!
과거의 자신이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동방군 기동 전대장 자리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아주 잠깐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렸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놀랄 만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전방에서 활약하는 것은 저의 오랜 꿈이었지만, 변경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국의 승리에 기여하기 위해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변경에서 많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고 후방을 튼튼히 하겠습니다.”
“······!”
“······!”
“······!”
이 자리에 참석한 아이젠 자작, 코부스 사령관, 율리안, 군 출신 고관들, 장군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저마다 느낀 감정은 다른 것이었다.
“하아!”
아이젠 자작은 안타까움의 탄식을 흘렸다.
‘역시 변경의 파일럿인가? 기사로서의 명예도 모르고 황제 폐하의 말을 거역하는 불충을 저지르는군.’
‘2등 무공 훈장이 아깝도다!’
고관들과 장군들은 비난했다.
‘아휴, 보름스 부장님! 차라리 아무 말도 말지 그랬어요? 공연히 미움을 사는 건 아닌지 몰라.’
율리안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황제와 루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루산의 반응을 의외라고 생각을 했을 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했다.
북방군 3군단장이나 코부스 사령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루산이 수행한 일은 놀라웠다.
공적의 내용만 따지면 1등 무공 훈장을 수여해도 될 정도였지만, 타국과의 전쟁이 아닌 반란 사건이었고 고작 변경 파일럿에게 1등 무공 훈장을 수여한다면 제국군의 사기에 문제가 있다는 비서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2등 무공 훈장을 준 것이다.
이런 실력과 능력을 지닌 젊은 영웅이 그 나이에 오르기 어려운 지위를 마다하고 남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변경의 삶을 선택한다?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할 일이 많았다.
필센 제국군 파일럿은 무려 1만 명에 달했고 그중 뛰어난 파일럿, 뛰어난 지휘관은 많았다.
변경 파일럿 하나에 오랜 관심을 기울일 만큼 한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가?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라 전선 근무를 반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알았네.”
뛰어난 군인들은 공을 세울 자리를 원한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뿐인 것이다.
황제의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루산을 끝으로 무공 훈장 수여식이 끝나고 관리, 경찰에 대한 포상이 진행될 차례였다.
루산은 훈장 수여식이 모두 끝나면 황제와 짧게나마 간담회 자리가 있을 줄 알았으나 행사 전 비서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대전쟁으로 인해 황제의 일정이 바빠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자리로 돌아가면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행사를 진행하는 관리들이 루산에게 자리로 돌아가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루산은 못 본 체하고 빠르게 말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선에서 제국의 안녕을 지키는 길을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해 오던 제가 변경을 택한 것은 가문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반란군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족 가문의 재산을 가로챈 것이지요. 저택과 장원이 넘어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무려 열 개가 넘는 가문이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반란이 모두 진압된 지금, 그 가문들이 피해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건이 정의롭게 마무리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귀족들도 이런 일을 겪을진대, 가진 것 없는 일반 백성들의 고초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부디 밝게 살펴 주시길 바라옵니다, 폐하!”
“······!”
대전에 정적이 흘렀다.
이 앞에 루산이 동방군 기동 전대장 자리를 거절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 대전을 뒤덮었다.
침 삼키는 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잠시 후 황제가 얼어붙은 듯한 적막을 깨뜨렸다.
“그런 일을 겪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전선 지휘관보다 변경을 택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당한 일을 겪어서는 안 되지. 해당 부서에서는 철저히 살펴야 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폐하!”
그제야 루산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리 용기를 냈다고 하나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후들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래도 황제와 재상, 그리고 많은 고위 관리와 장성들 앞에서 이 사건을 언급한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아이젠 자작이 루산의 오른쪽에서 팔을 뻗어 등을 살짝 두드려 주었다.
황제는 당황하고 분노한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를 쓰고 포상을 마쳤다.
그러나 대전을 나와 재상과 둘이 걸어가면서까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는 않았다.
황제가 품위 있게 말했다.
“용감하고 당돌한 녀석이군요.”
“폐, 폐하!”
“허허, 아침에 비서들이 언급한 신문 기사가 그것이었나 봅니다. 재상께서도 혹시 알고 계십니까?”
“···네, 폐하.”
“내가 훈장을 수여하다 말고 많은 신료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되겠어요?”
“송구합니다, 폐하.”
“허허, 참!”
황제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앞장서서 가 버렸다.
혼자 남은 오베론 공작은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자신의 비서에게 지시했다.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 봐.”
“네!”
훈장 수여식이 끝나고 노바 정가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해당 사건의 피해자가 많은 고관들 앞에서 훈장을 받으면서 황제의 불찰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신문들이 연일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고위 귀족들과 은행의 높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피해자 인터뷰와 관련자 인터뷰가 포함된 생생한 내용이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
율리안은 멕 워커 다섯 대를 부상으로 받았다.
1구역부터 7구역까지 변경 모든 구역이 반란과 연루되었고 그중 일부는 통치자까지 엮여 난리가 난 반면 8구역은 유일하게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데다 반란을 막기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은 것이다.
훈장은 아니었지만, 율리안은 당장 도움이 된다고 기뻐했다.
“변경부 사람들한테 들으니 변경 통치 방식에 변화를 주느냐 마느냐로 시끄럽다고 해요.”
“변경 통치 방식이라면······?”
“통치자에 황족을 앉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죠.”
율리안의 말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7구역 외에도 1구역과 3구역 통치자가 반란 세력과 엮여 있었던 것이다.
황족이다 보니 황위로 유혹하는 것에 취약했다.
그러나 루산은 변경의 통치자가 황족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힘이 약하다면 변경의 황족들은 황제를 위협하는 경쟁자가 되겠지만, 지금처럼 황제의 힘이 강하다면 변경 통치자들은 삶의 보람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황제를 돕는 조력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부 황족들이 미련하게 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해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변경 통치자가 황족이든 다른 사람이든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루산이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율리안의 눈을 피해 강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대로 갈 것 같군요. 아니, 이대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뭐가요?”
“변경 통치자 말이에요. 8구역 통치자가 율리안 님이 아닌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어이쿠! 이렇게 갑자기 고백하기 있습니까?”
율리안이 과장된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 역시 부장님이 동방군 전대장으로 떠나지 않고 변경에 남기로 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밤베르크 백작께 들으니 황제 폐하의 제안이 사실 엄청난 것이라면서요?”
루산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갔다.
“모르긴 몰라도 황궁에서 변경의 가치를 그렇게 당당하게 말한 사람은 부장님이 처음일 겁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부장님을 미친 사람 쳐다보듯 했지만요.”
“하하하!”
“후회 안 하세요?”
루산은 탁자 위에 올려둔 은빛 사자 검을 잠시 바라보았다.
가슴이 난폭한 사자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나 지금 이런 감정은 사소한 것이었다.
굳이 이런 이야기로 율리안을 실망시킬 필요는 없었다.
“후회할 게 뭐 있습니까? 8구역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지만, 만약 이 나라가 부장님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떠나셔도 붙잡지 않겠습니다. 제가 잘은 몰라도 우리나라가 아무한테나 2등 무공 훈장을 주고 최전방 기동 전대장을 제의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루산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율리안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나 자신이 만약 전쟁터로 가게 되더라도 그것은 필센 제국을 위해서는 아닐 것 같았다.
정나미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붙잡지 않으면 서운하죠.”
“그런가요? 하하하! 그럼 붙잡을게요.”
“고맙습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하세요. 그럼, 먼저 갑니다. 부장님도 바쁘실 테니까.”
“네, 안녕히 가십시오.”
율리안이 밤베르크 가문의 자동 마차를 타고 먼저 떠났다.
그러자 루산도 그 차 뒤에 주차돼 있던 자동 마차에 탔다.
운전석에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바덴이 앉아 있었다.
“축하드려요, 기사님.”
“민망하게 무슨 축하예요.”
“그래도 나라에서 상을 받은 건 축하할 일이죠.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재판 관련해서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스텐커 씨 사무실에서 만남은 보통 밤에 잡잖아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루산은 할 말이 없었다. 바덴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미스 고슬라가 바쁠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요새 많이 한가하니까.”
반란이 일어나고 대전쟁이 공표된 이후 손님이 크게 줄었다.
손님들 중에 연루된 사람이 상당했던 것이다.
“사업 관련하여 상의드릴 일도 있고요.”
“이거 무서운데요? 미스 고슬라의 통이 워낙 커져서.”
바덴은 싱긋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