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123.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이놈들아! 잡아 왔으면 조사를 하든 뭘 하든 해야 할 것 아니냐!”
루트 오베론은 쇠창살을 잡고 몸부림을 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체포한 것이 경찰인 줄 알았다.
경찰이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면 된다.
물론 여러 모로 곤란해 하겠지만, 자신을 풀어 주지 않으면 더 큰 곤란을 겪게 될 테니 어떤 식으로든 석방시켜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찰서로 가지 않고 어느 집으로 끌고 가 며칠 굶기더니 날이 저물어 주위를 분간하기 어려운 밤중에 지금 있는 이곳으로 옮겨 가두어 놓았다.
그동안 소리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만한 집을 구해 감방 공사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쇠창살이 녹슬지 않았고 방도 한쪽 구석에 용변을 볼 구덩이가 파인 것을 제외하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지냈는지 알 수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출입문이 열릴 때를 제외하면 빛이 들어오지 않아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달, 아니 두 달은 지난 것 같은데, 정확한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놈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밥 줄 때만 들어와 개밥 던져 주듯 창살 밑으로 밥을 밀어 넣고 나가 버렸다.
식사 양이 넉넉하지 않아 몸은 나날이 말라 갔고, 말할 사람이 없어 마음은 나날이 약해져 갔다.
이대로 쓸쓸히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간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이놈들아! 잡아 왔으면 물어보라고!”
“여기가 대체 어디냐?”
몇 번 소리치던 루트는 힘이 빠져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사람들의 발소리도 들렸다.
루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횃불을 앞세우고 온 세 사람이 보였다.
그는 두려움과 함께 반가움을 동시에 느꼈으나 그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루트 오베론, 네 아버지는 필센 제국의 재상이 되어 떵떵거리는데 너는 여기서 이게 무슨 꼴이냐?”
“으으! 대체 누구냐, 이놈!”
오랫동안 자르지 못해 덥수룩하게 얼굴을 덮고 있는 수염도 루트의 분노를 가리지 못했다.
그 표정을 보고 스텐커가 조수에게 말했다.
“아직 눈에 힘이 있네? 식사 더 줄이고 이대로 몇 달 더 둬.”
“네.”
스텐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루트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일단 물어는 봐야지! 이봐! 뭐가 궁금하냐고?”
그러나 스텐커와 두 명의 조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야, 이놈들아! 대체 왜 나를 잡아온 거냐? 물어는 보라고! 흐어어엉!”
쾅!
문이 닫히고 실내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밖에서 조수가 불안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트 오베론의 신분도 신분이지만, 사람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학대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탐정 일을 하면서 불법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일은 처음이었다.
스텐커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티를 내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저들은 남의 인생에 신경 쓰는 자들이 아니야. 목적을 위해서라면 남의 가문을 아무렇지 않게 무너뜨리는 자들이지.”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저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죽이지 않아.”
“저러다 죽을 것 같은데요?”
“15년 동안 목숨 바쳐 일했는데 아버지한테 버려졌어.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어?”
스텐커는 루트의 경호원과 비서로부터 그동안의 일들을 모두 들어 대강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두 달이 지났는데, 아까 눈빛 봤지? 분노로 이글거리잖아. 절대 안 죽어.”
“······.”
“황제와 공작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야. 자식마저 이용하고 버리잖아. 저들의 계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놀아났어? 그러다 죽고, 끌려가고, 남은 가족들은 또 엄청난 고초를 겪을 테지.”
“으음!”
“나라고 두렵지 않겠어? 어쩌다 보니 그런 황제와 공작을 상대하게 됐는데 말이야.”
“후유······!”
스텐커의 조수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니야. 루트 오베론은 나쁜 짓에 앞장서 온 핵심 인물이란 말이지.”
“···그건 그러죠.”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 낸다. 황제와 공작의 비위를 밝히고 약점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이만한 인물이 없어. 힘들더라고 이겨 내자. 기사님이 교대할 사람을 보내 준다고 하셨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조수들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스텐커는 정원을 걸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서는 희미하게 들리던 루트의 울음소리가 저택의 담장 밖에서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후유!”
스텐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힘겨운 싸움, 어렵고 불편한 일들···, 그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스텐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자동 마차를 타고 노바 교외의 외딴 저택에서 멀어져 갔다.
***
같은 남방군 출신이지만, 오토는 무려 15년 전에 7군단으로 들어왔고, 레보르크는 고작 작년에 8군단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실패한 반란에 가담했다는 사실도 서로 아는 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반 황제에 의해 희생된 가문 사람이고, 같은 사람에 의해 배신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세상에 믿을 곳이라고는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한 루산의 보호막 아래뿐이라는 점도, 서글프지만, 공통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시의 땅을 통과하는 동안 금세 가까워졌다.
“···그래, 결혼은 했고?”
“네. 남방군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했습니다. 아버지, 숙부, 형님들이 대전쟁 때 돌아가셔서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고 어머니께서 빨리 결혼을 시키셨죠.”
오토의 질문에 레보르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허허, 다들 비슷하군. 아이는?”
“셋을 두었습니다.”
“보고 싶겠군.”
그러나 레보르크는 오직 복수를 꿈꾸며 살아오느라 자신보다 훨씬 긴 세월을 변경에서 지내 온 탓에 오랫동안 가족을 보지 못한 오토 앞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빙긋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오베론 공작님이, 아니 오베론 공작이 그런 겁니까?”
오토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흐음, 사실이더군. 믿을 수가 없었어. 노바에 있던 동지들은 거의 다 잡혀갔고, 전국적으로 조직이 박살이 났다네. 오베론 공작은, 재상이 돼 있고 말이야.”
“루트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놈을 잡아다 캐물은 다음 물고를 내려고 했는데, 잡혀 갔다는 말도 없고 찾을 방법도 없었네. 필시 공작이 숨겼겠지.”
루트 오베론.
남방군 파일럿 가운데 이반 황제의 숙청으로 큰 피해를 당한 가문의 자식들을 남방군으로 끌어오고 다시 조기 은퇴시켜 변경과 노바로 보내 반란을 준비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오토와 레보르크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루트를 면담하고 복수의 길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아버님께서 그동안 부당한 대우를 당한 귀족들을 복권시키고 제국을 바른 길로 이끄실 겁니다.”
이반 황제의 숙청으로 가문이 박살 난 귀족들이 그 말을 듣고 오베론 공작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에 속아 결국 이런 처지가 된 것이기 때문에 루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때 루산이 그들의 모닥불로 다가와 오토에게 말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 있죠?”
“있소.”
“연락할 방법도 있나요?”
“···있는데, 왜 그러시오?”
“다 들어오지 말고 몇 사람은 노바에 남아서 일을 도와야겠어요.”
“무슨 일?”
“황제와 공작의 뒤를 캐는 일.”
모닥불 가에 앉아 있던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왔다 해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흠!”
“하기 싫어요?”
“싫을 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다 갈 필요는 없고, 평범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들로 다섯 명 정도만 내가 나중에 알려 주는 곳으로 가서 협조하라고 해요.”
“알았소.”
“중요한 건, 노바에서 이 일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라는 겁니다. 귀족이니 평민이니 따지거나, 원한에 눈이 돌아가 함부로 날뛰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루산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루트를 죽일까 봐 당부를 한 것이다.
“복수를 위해 긴 세월 동안 죽은 듯이 지내온 사람들이오. 걱정 마시오.”
루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모닥불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그때 오토가 얼른 물었다.
“그런데 변경으로 다시 들어와 우리가 하는 일이, 고작 밀수요?”
그 말에 루산은 오토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고작 밀수? 뭐, 밀수가 정당한 일은 아니기는 하지. 그런데 당신한테 들으니 좀 어처구니가 없네.”
“뭐라고?”
오토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반란을 일으키려던 사람들이 밀수를 폄하하니까 우습다고.”
“이 자식이!”
파일럿 하나가 루산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오토와 레보르크가 막았다.
저쪽 모닥불에 앉아 있던 바이크와 시에나가 달려오려는 것을 루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루산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대전쟁에서 패하면 당신들 복수고 뭐고 없어. 당신들 재산이고 명예고 회복할 길이 없다고. 어차피 아우로라 연합이 다 가질 테니까.”
“음······.”
“남쪽 전선은 1차적으로 아라드 왕국이 맡고 2차로 남방군이 맡을 텐데, 아라드 왕국이 속절없이 뚫려 버리면 남방군이 증편할 시간이나 제대로 벌 수 있겠어? 나와 당신들의 목적은 대전쟁이 승리할 때나 의미가 있는 거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라드 왕국이 이기거나 최소한 오래 버텨 줘야 하지. 이해가 되나?”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루산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더 많이 벌어서 살 궁리를 찾아야 할 것 아니오? 복수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나? 실패하면 다 목숨 끊을 거야? 가족들 없어? 어떻게든 더 많이 벌어서 복수에 실패하더라도 가족들 먹여 살리고 가문을 재건해야 할 것 아니야!”
“······!”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간이 길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오로지 복수를 위해 달려온 세월이었다.
복수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둔다, 재산을 돌려받고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가문을 재건할 수 있도록 더 많이 번다.
전혀 귀족적이지 않은, 비겁한 말이었다.
그러나 무척 인간적인 말이고 옳은 말이라고, 불과 몇 달 전에 반란에 실패해 처형당할 뻔했던 파일럿들은 느꼈다.
“악착같이 살자고요.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말이에요. 복수를 위해 애를 쓸 테고 기회가 오면 반드시 복수하겠지만, 복수만을 위해 살지는 말자고요. 그러려면 더 악착같이 살아야 해.”
그 말을 끝으로 루산은 바이크와 시에나, 모리츠와 파비안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모닥불 가로 돌아갔다.
오토, 레보르크, 그리고 반란군 파일럿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산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오늘따라 가족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
날이 밝고 다시 원시의 땅 행군이 계속되었다.
악착같이 돈을 번다는 루산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지나다 만나는 중대형 괴수를 모조리 잡아 생명 구슬을 모았다.
7구역에서 오랫동안 변경 파일럿으로 일해 왔기 때문에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능숙하게 괴수를 잡고 생명 구슬을 꺼냈다.
루산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신분 증명을 제출하지 않은 파일럿들이 실력이 좋아.’
그때 오토가 마나 통신을 걸어 왔다.
[전대장님, 그런데 이렇게 새 상품을 더럽혀도 되는 겁니까?]
괴수를 사냥하다 보면 피와 살점이 튀어 더럽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 어때요? 원시의 땅을 거치면 이렇게 될 줄 알아야지. 저들이 아쉽지 우리가 아쉽나? 우리야 레오파드 운반 안 해도 사냥하면 돼. 안 그래요?]
[허허허!]
오토와 신규 3전대 파일럿들은 웃고 말았다.
그들은 운반 날짜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빠르게 이동하고, 이동 중에 만난 괴수를 악착 같이 사냥하면서 루산과 3전대에 익숙해져 갔다.
며칠 뒤, 아라드 왕국 변경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