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상황이 달라졌잖아
124. 상황이 달라졌잖아
아라드 왕국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침통했다.
전란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더 큰 전화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 놓고 당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군인들의 표정은 더없이 비장했다.
루산 일행은 변경의 개척 마을에서 아라드 왕국의 수도까지 길 안내를 받아 빠르게 이동했다.
레오파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라드 왕국군 총사령관 니트라 장군이 바쁜 가운데에도 반갑게 달려왔다.
루산은 군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은빛 사자 메달을 달고 허리에는 은빛 사자 검을 차고 니트라 장군과 아라드 왕국 군인들을 만났다.
“오! 우리 전에도 본 적이 있지 않소?”
“맞습니다, 총사령관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소? 우리나라를 구해 준 영웅인데. 산악 부대를 지휘해 적의 사령부를 무력화시키지 않았소?”
“네, 총사령관님. 필센 제국군 산악 특임 기동 전대를 이끌고 있는 루산입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저와 우리 부대의 존재는 비밀입니다.”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에는 아이젠 자작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까 봐 무공 훈장과 은빛 사자 검을 차고 왔는데, 다행히 총사령관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 말이겠소. 다만, 제국도 정신이 없을 텐데 실력이 뛰어난 귀 부대에 멕 나이트 운송 임무를 맡기다니, 놀랍소이다.”
“우리 제국이 그만큼 아라드 왕국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고마운 말씀이오.”
원시의 땅을 통과해 도착한 레오파드는 밀수품이다.
필센 제국이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루산은 제국이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라드 왕국이 대금 지불 문제나 변경 개발권 문제에 대해 딴 소리를 못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홉 대밖에 안 되는가?”
“이것도 최선을 다해 조달한 물량입니다. 가프 마법 연구소 측에서 모든 힘을 다해 생산 설비를 확충하고 있으니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다행이지만, 과연 이 물량으로 버틸 수 있을지, 흐음······.”
니트라 장군이 무거운 표정으로 콧숨을 길게 뿜어냈다.
그러다 문득 루산이 가슴에 달고 있는 훈장과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발견했다.
그는 아라드 왕국 최고 군 지휘관으로서 동맹인 필센 제국의 군인에게 가장 큰 명예가 되는 무공 훈장과 사자 검을 알고 있었다.
“루산 경, 나 또한 필센 제국이 여러 전선에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다만, 이쪽이 무너지면 필센 제국도 곤란한 것 아니겠소? 대규모 병력 지원이 어렵다면 지난번처럼 귀공이 이끄는 산악 특임 기동 전대만이라도 도와 줄 수는 없겠소?”
니트라 장군의 부탁에 루산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총사령관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잘 알지요. 그래서 부탁하는 것 아니겠소? 귀공은 우리나라 지리에도 익숙하고 레인저들과 협동 작전을 실시한 경험도 있지 않소? 부디 상부에 잘 말씀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루산은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런 뒤 레오파드 시동 열쇠를 넘기고, 소모품 수량을 확인해 인도했다.
아라드 왕국 측에서는 대금의 일부를 금괴로 건네주었다.
“우와! 저게 다 금이야?”
“눈 돌아가는 거 봐. 꿈 깨!”
“그게 아니라 우리가 타고 있는 멕 나이트가 얼마나 비싼 건가 새삼 깨닫게 돼서 하는 말이지.”
“그건 그래.”
시에나와 바이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금괴를 싣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들 수 없는 무게였지만, 멕 나이트는 가뿐하게 들어 등에 짊어진 거대한 철제 배낭에 넣었다.
루산 일행은 레오파드를 넘겨주고 홀가분해진 파일럿 9명을 나머지 6대 어깨에 태우고 변경이 있는 서쪽 방향으로 이동했다.
***
레이크 시티로 돌아가는 길.
야영지 모닥불 가에서 모리츠가 물었다.
“아라드 전쟁에 다시 뛰어들 생각이오?”
그의 질문에 다른 파일럿들도 루산을 쳐다보았다.
루산은 모닥불을 응시하다 대답했다.
“생각 중입니다.”
전에 아이젠 자작이 이끄는 수도 군단 3전단과 함께 아라드 전쟁에 참전했던 바이크, 모리츠, 파비안 그리고 그때 만난 시에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깜짝 놀랐다.
“무얼 생각한다는 것이오?”
모리츠가 다시 물었다.
“아라드 왕국이 패하면 여러 모로 곤란하죠.”
레오파드 대금 잔금도 못 받게 되고, 가프 마법 연구소가 받기로 한 변경 개발권도 사라지게 된다.
“남쪽 전선이 위태로워지면 결국 필센 제국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죠. 전쟁이 영토 안에서 치러지는 것과 영토 밖에서 치러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음, 그렇지요.”
“결국 필센 제국의 안정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아라드 왕국이 굳건히 버텨 주어야 하는데, 필센 제국은 남방군을 예비대로 최대한 아껴 둘 것이기 때문에 아라드 왕국이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필센 제국이 남방군을 예비대로 두는 것은, 대치 전선을 볼 때 필연적인 일이었다.
동방군, 북방군과 달리 직접 적국과 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 심화되면 위태로운 전선으로 남방군 병력이 출동하게 된다.
“아라드 왕국은 전처럼 지형에 기대어 악착같이 버티겠지만, 침입한 적군도 마리노 공화국보다 훨씬 규모가 클 테니 버티는 것이 쉽지는 않겠죠.”
“레오파드가 있잖소. 우리가 레오파드 네 대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했고.”
파비안이 말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마리노 공화국은 레오파드의 존재를 몰랐지만, 마리노 공화국의 패배 이후 아우로라 연합은 그에 대비했겠죠.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면 무능한 것이고.”
“흐음······.”
“레오파드는 산악 지형인 아라드 왕국에서 여전히 효과가 있겠지만, 그때처럼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참전할 생각이오?”
“일단 준비가 덜 됐어요.”
루산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을 죽 훑어보았다.
“우리는 레오파드를 오랫동안 탔지만, 신입 파일럿들은 아직 충분히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파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럿은 멕 나이트가 자신의 손발처럼 몸에 익어야 한다.
팔다리의 길이, 관절의 운동 범위, 무게, 방어력···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몸처럼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터에서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선의 파일럿은 자신이 타는 기체를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반면 변경의 파일럿은 좀 더 자유로웠다.
변경의 괴수는 전쟁터에서 만난 적 멕 나이트처럼 날카롭게 공격하지 않고 치명적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자신이 타던 기체가 정비에 들어가면 다른 기체를 타기도 하고, 사냥하는 괴수의 종류에 따라 좀 더 빠른 기체를 타거나 묵직한 기체를 타기도 했다.
물론 변경 파일럿들 중에도 자신이 오랫동안 타서 익숙한 기체를 고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변경의 멕 나이트는 거의 다 중고 아이언 워리어였기 때문에 기체를 바꾸어도 별로 차이가 없어 다른 기체를 타는 것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레오파드는 기존의 아이언 워리어 계열과 많이 달랐다.
무게, 속도감, 운동 범위, 팔다리 몸체의 두께가 달라 변경에서 괴수를 사냥하는 것은 몰라도 전쟁터에서 적의 멕 나이트를 상대할 때는 의도했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아 당황하게 되고 그 순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명분도 문제가 되죠.”
루산은 아무 대가 없이 참전할 생각이 없었다.
가프 마법 연구소가 변경 개발권을 얻으면 아라드 왕국 변경에서도 자유롭게 괴수 사냥을 해서 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가능성이었다.
멕 나이트 대금을 받는 문제도 가프 마법 연구소에 이익이었지 직접적으로 상관없었다.
이런 것 말고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이익에 무엇이 있을지 아직 떠올리지 못했다.
루산은 아라드 왕국에서 원활한 활동을 위해 자신을 산악 특임 기동 전대장이라고 소개했고, 아라드 왕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돈을 달라고 하는 것도 어색했고, 가난하여 줄 돈도 없었다.
이익과 명분, 둘 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참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파일럿들의 참전 의사였다.
모리츠와 파비안은 제국을 위해 기꺼이 싸울 테고, 바이크와 시에나 역시 자신의 뜻이라면 움직일 테지만, 남방군 출신 반란군 파일럿들이 굳이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복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센 제국이 건재해야 한다는 말도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었다.
이 따위 나라, 망해 버려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루산이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다 듣는 자리에서 아라드 왕국 전쟁 참전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지만, 얻을 것이 없다면 굳이 참전할 이유가 없지.’
루산은 모리츠와 파비안에게 이익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비록 은퇴 후 마법 연구소 소속으로 일하고 있지만, 명예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레오파드를 운송하는 일에 집중할 겁니다. 그러다 보면 신입 파일럿들도 레오파드에 익숙해질 테고, 아라드 왕국이 레오파드를 많이 확보하면 버티는 데도 유리할 테니까요. 우리가 조금만 도와도 아라드 왕국의 승리에 기여한다거나 우리가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다면 모를까 우리는 우리 일을 해 나갈 겁니다.”
몇몇 파일럿들은 아쉬워했고, 몇몇 파일럿들은 안도했다.
아쉬워한 파일럿 중에 바이크가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텐데!”
“아서라, 아서!”
“왜? 내 실력 많이 늘었다고 너도 인정했잖아.”
“그래도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어?”
“너는 전대장님이 결정해도 안 할 거야?”
“그때는? 당연히 하지. 그래도 일부러 전쟁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아.”
“여자는 명예를 모른다니까.”
“굳이 사람을 죽여서 얻는 명예라면 얻고 싶지 않아. 내 고향,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
바이크와 시에나가 모닥불 가에서 나직이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으며 루산은 많은 생각을 했다.
다른 파일럿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쟁은 아직 그들 가까이 와 있지 않았다.
***
돌아가는 길에 루산은 과거 수도 군단 3전단이 원시의 땅에 버려두고 간 아이언 워리어를 살펴보았다.
아이언 워리어가 무려 7대!
거대 괴수에게 물리거나 찢긴 것이라 손상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다만 두 대는 금속을 녹이는 독액에 내장 부품까지 녹아 당장 수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전대장님, 전에는 우리가 챙기기 어렵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바이크가 물었다.
“그랬지.”
“근데 왜······?”
“상황이 달라졌잖아.”
아이젠 자작은 수도 군단을 떠나 북방군 제3 기동 군단장으로 갔다.
상식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원시의 땅에 남겨 두었던 멕 나이트를 기억해 찾으려 할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중에 이것을 찾겠다고 아이젠 자작이나 수도 군단의 파일럿이 요청하면?
‘길을 잃어 찾을 수 없다고 말하면 너무 옹색한가?’
루산은 버려두느니 일단 사용하기로 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하자.’
루산이 명령을 내렸다.
“한 번에 한 대씩 가져간다.”
모리츠와 파비안이 깜짝 놀랐다.
“이건 제국군의 물건이 아니오?”
“지금은 전시입니다. 원시의 땅에서 썩히느니 괴수 사냥에 투입해 전쟁 물자 생산을 늘리거나 레오파드 운송에 투입하는 것이 제국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요?”
“흠, 그래도······.”
“주인이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 물건입니다. 주인이 찾으면 돌려주겠습니다.”
물론 그때는 적당한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루산은 필센 제국이 승리하기를 바라지만, 필센 제국을 위해 공짜로 일해 줄 생각이 없었다.
여섯 대의 멕 나이트는 아이언 워리어 한 대를 들고 이동했다.
고장 난 멕 나이트를 들고 원시의 땅을 행군하는 것은 무척 고되고 더딘 일이었다.
루산은 다음에 올 때 정비 요원들과 지원팀을 대동해 분해한 뒤 운반하기로 결심했다.
***
오베리 왕국에 상륙한 아우로라 연합군은 휴식을 취하며 병력을 정렬한 뒤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곧바로 강행군하여 이스타드 왕국에 맹공을 가했다.
아우로라 연합의 멕 나이트 수는 오베리 왕국군 멕 나이트와 합쳐 무려 1,200대나 되었다.
아이젠 자작이 이끄는 필센 제국군 북방군 3군단이 증편 작업을 마친 1전단부터 투입해 수비를 돕고 있었지만, 전선을 지키고 있는 멕 나이트는 이스타드 왕국 200대를 합쳐 350대에 불과했다.
이스타드 왕국 전선은 쑥대밭이 되었다.
[여기서 시간 끌 것 없다. 이스타드 왕국을 함락시키고 변경을 접수해 곧바로 전쟁 물자를 생산한다. 그런 뒤 필센 제국으로 남하한다!]
[네, 사령관님!]
굴다크 공작이 탄 멕 나이트 블랙 드래곤을 필두로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들이 이스타드 왕국으로 끝없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