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팔다리 뜯어서 가져올 뻔했네
125. 팔다리 뜯어서 가져올 뻔했네
초저녁이라 맥줏집에는 사람이 많았다.
재판을 마치고 지친 얼굴로 법원에서 나온 포렌시스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금은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재판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고 있어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텐커 역시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 때문에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군납, 군 규율, 복무와 관련된 사건에 집중하느라 일반 민형사 사건 공판 일정이 점점 늘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죠.”
포렌시스는 스텐커의 말에 맞장구치면서도 이유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건 이해하겠는데, 문제는 사기 사건에 가담한 반란 참가자들이 진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체포된 재무부 관리들이나 은행 간부들이 과잉 대출이나 경매 절차에 대해 단순한 은행법 위반이라고 똑같이 입을 맞추고 있단 말이죠.”
“똑같이?”
“네. 똑같아요. 압력이 들어온 게 틀림없어요.”
“확실한 겁니까?”
“체포된 피고인들의 진술을 들어 보시면 스텐커 씨도 압력이 들어왔다고 판단하실 겁니다. 아주 똑같아요. 그리고 아는 검사에게 물어봤더니 윗선에서 이 사건을 확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윗선이라······.”
“보름스 가문의 장원이 분할된 뒤 최종 소유자가 된 오베론 공작가의 고용인들을 증인으로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흠······.”
애초에 재판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더욱 어려웠다.
전쟁으로 인해 다른 모든 이슈가 묻히는 상황에서, 최종 배후로 의심되는 자의 힘이 강하게 작용해 사건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 또한 연일 전쟁 관련 소식을 집중 보도했고 독자들 역시 그 기사들에만 관심을 가져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스텐커는 지난 몇 달 사이 홀쭉해진 포렌시스를 보고 잠시 생각했다.
‘루트 오베론을 등장시켜야 하나?’
루트 오베론을 등장시키면 전쟁 상황임에도 주목을 확 끌 수 있다.
재상의 아들이 반란에 깊이 개입했고, 그 배후에 재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니 세상이 발칵 뒤집힐 만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루트 오베론이, 납치되어 특정 진술을 강요당했다고 말한다면, 그때는 역으로 자신들이 다 쓸려 나가게 된다.
‘좀 더 때를 기다리자.’
결국 스텐커는 루트 오베론을 더 확실히 포섭할 때까지 그의 존재를 숨기기로 했다.
포렌시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을 도우려면 무얼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피고인들이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야겠죠. 체포된 공업 은행 관계자들이나 정부 관리들에게 실제로 압력을 행사한 사람이 있을 테니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면 더 좋고요.”
스텐커가 수첩에 포렌시스의 말을 적었다.
“그리고 분할된 토지의 최종 소유자가 된 오베론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 알 수 있다면 사실상 툴롱 마법 연구소를 언급하지 않아도 재판을 우리 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봅니다.”
툴롱 마법 연구소를 언급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오베론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 한가운데에서 툴롱 마법 연구소가 비밀리에 멕 나이트 공장을 세워 반란에 동원된 기체를 제작하고, 황제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용서해 주는 대가로 계속해서 멕 나이트를 만들게 만들었다는 것을 언급하면 반란이 황제와 공작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고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황제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절대 사용할 수 없는 패였다.
그래서 오베론 공작가의 고용인들의 자금 출처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오베론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금 출처를 밝힐 리가 없었다.
무척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스텐커는 수첩에 기록을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최선을 다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변호사님도 힘을 내세요.”
스텐커의 말에 포렌시스가 피곤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힘을 내야죠.”
두 사람은 맥주잔을 비우고 밖으로 나왔다.
맥줏집이 붐비는 것에 비해 거리는 한산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전쟁 때문인 걸까?’
포렌시스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직접 참전하지 않아도 전쟁 소식으로 인한 긴장감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이 술에 의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텐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맥주 기운을 밖으로 뿜어내듯 말했다.
“다음 달부터 병력 동원령이 발동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병사가 많이 필요하겠지요.”
“그런가요?”
“네.”
“그렇군요.”
전쟁은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스텐커와 포렌시스는 전보다 조금 휑한 거리를 조금 걷다 헤어졌다.
저녁이 되면서 약간 쌀쌀한 기운이 옷을 뚫고 파고들어 왔다.
***
루산과 3전대는 갈 때처럼 올 때에도 깜깜할 때 도착했다.
야간 경계 근무를 서는 전투 요원들이 놀라지 않도록 미리 레이크 시티 본부 통신실에 마나 통신을 넣었다.
[여기는 루산, 여기는 루산. 원정 사냥을 나갔다 이제 도착했다.]
[아! 루산, 고생 많았다.]
[정비소로 바로 갈 테니 정비부장을 호출해 두길 바란다.]
[알았다. 정비소에 연락해 두겠다.]
여섯 대의 멕 나이트와 원시의 땅에서 가져온 아이언 워리어 한 대가 레이트 시트 서쪽에 있는 정비소로 이동했다.
본부 요원이 정비부장 바르통의 집에 달려가 루산의 호출을 알렸다.
그 사이 루산은 먼저 가프 마법 연구소 레오파드 출고장으로 가서 대금으로 받아온 금괴와 수령증을 넘겨주고 본부 창고로 가서 생명 구슬을 비롯한 고가의 괴수 부산물을 맡긴 뒤 정비소로 들어갔다.
바르통은 정비소 불빛에 비친, 익숙한 기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원시의 땅을 한 달 넘게 오간 멕 나이트들이라 괴수의 피와 살점, 진흙, 나뭇잎과 풀잎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어이쿠! 세척하고 정비하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리겠는걸?”
그렇게 인사말을 대신한 바르통에게 루산이 반갑게 말했다.
“좀 더 잘 살펴봐요.”
“뭘요? 아! 저건 뭡니까?”
바르통이 누워 있는 아이언 워리어 한 대를 발견하고 물었다.
루산은 바르통을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이거 전에 제국군이 원시의 땅으로 우회하여 아라드 왕국 지원할 때 동원된 기체인데, 괴수한테 뜯기고 물려서 놔두고 갔던 거예요.”
바르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요?”
“수리야 뭐 알아서 해 주시겠지만, 시동 열쇠가 없어요. 탈 수 있을까요?”
“그건 음······, 가능은 한데 정밀 분해를 해서 열쇠를 새로 맞춰야 해요. 가프 마법사들에게 부탁하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비밀리에 할 거라면 외부에서 장비와 마법사를 들여와야 하니까 비용이 좀 들 겁니다.”
“그래요?”
“네. 근데 정말로 군 장비를 쓱 하시려고?”
바르통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자 루산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쓱은 아니고, 주인이 찾을 때까지 쓰려는 거죠.”
바르통은 ‘그게 그거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꾹 참았다.
‘하여간 통이 크다니까! 그러니까 이 나이에 큰 도시 건설을 맡고 전대장에 본부 부장까지 올랐지.’
그때 루산이 말했다.
“원시의 땅에 여섯 대가 더 있어요.”
바르통이 입을 떡 벌렸다.
“통째로 나르기가 영 불편하던데, 다음에 믿을 만한 요원들하고 지원팀 멕 워커하고 함께 가서 분해해 들고 오는 게 어떻겠어요?”
“음······.”
바르통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커맨더도 아시다시피 변경 놈들은 입이 무겁지 않아요. 비밀로 하고 싶다면 절대적으로 아는 사람 수가 적어야해. 그리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정비소가 아니면 쉽지 않아요.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지. 번거롭더라도 한 대씩 가져오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정비 요원들한테는 내가 둘러대면 되니까.”
“알았어요. 역시 전문가한테 물어야 한다니까. 하마터면 팔다리 뜯어서 가져올 뻔했네.”
루산의 넉살에 바르통도 피식 웃었다.
“근데 정말 이거 전대장님이 써도 뒤탈 없겠어요?”
“없다니까 그러신다. 수도 군단에서 이걸 회수하려고 생각했으면 진즉 했지. 전장 결손으로 처리했을 거예요. 찾으려 해도 내가 길을 안내하지 않으면 절대 못 찾아요. 뭐, 정 달라고 하면 그때 주면 된다니까.”
“그렇다면······.”
바르통이 머리를 굴리다 말했다.
“전대장님이 검투용 멕 나이트 계속 만들라고 했잖아요.”
“그랬죠.”
“5구역이나 7구역 중고 멕 시장에서 부품을 계속 들여오는 겁니다. 그걸로 한 대씩 뚝딱 만든 걸로 쳐요.”
“이 아이언 워리어를요?”
“네. 어차피 5구역이나 7구역이나 혼란스러운 상태고 8구역도 멕 부품을 몇 개나 들여왔는지 철저히 관리하지는 않으니까 어찌어찌 아이언 워리어 부품들을 구해 중고 아이언 워리어를 완성시킨 걸로 하자는 거죠. 그렇게 하면 온전히 전대장님 멕으로 둔갑하는 거고.”
“그래도 수도 전단에서 관리해 오던 것이라 몸체 외관부터가 우리가 쓰던 것보다 나은데? 엔진 소리도 다르고······.”
“엔진 소리로 멕 상태 구별하는 건 뛰어난 파일럿한테나 가능한 이야기고, 외관은 장갑을 덮으면 낡은 것인지 새것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음!”
루산은 이 아이언 워리어 일곱 대를 들여와 사용할 생각만 했지 소속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변경에서 멕 나이트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본부 간부들이나 전투 요원이라면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율리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8군단 본부 기체로 두고 3전대에 배정하는 것으로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처리한다면?
현재 루산이 타는 기체 중 003은 자신의 소유인 우르사와 마찬가지로 본부에 기체 이용료를 내지 않았고 연료비를 포함한 같은 유지비 또한 전혀 나가지 않았다.
여기에 아이언 워리어 7대를 자신의 기체로 보유하게 된다면 본부가 하는 것처럼 기체를 파일럿에게 제공하고 사냥 수입의 8할을 가져간 뒤, 본부에 2할을 납부하고 유지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의 수입이 된다.
‘멕 나이트 대여업자가 되겠군.’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어부처럼 멕 나이트를 빌려주고 사냥 수입의 절반 이상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수도 군단 아이언 워리어의 정체를 아는 3전대 파일럿의 수가 많고 정비부장도 이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적절히 몫을 나눠 줄 필요가 있겠지만, 3전대 파일럿 대부분은 반란군 출신이니 이것을 약점으로 자신을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다.
별장 사업 수입이 신통하지 않고 여기저기 빚이 많은 상황에서 멕 나이트 아홉 대를 자신이 보유하고 이를 통해 수입을 낸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진행해 보세요, 부장님.”
“알겠습니다, 전대장님.”
바르통이 자신의 몫으로 얼마나 떨어질지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아이언 워리어와 3전대 멕 나이트들을 정비소 세척실로 이동하도록 신호를 보냈다.
***
칼리슈는 레이크 시티로 완전히 옮겼다.
레이크 시티에 건설 중인 공단의 레오파드 생산 능력이 코부스의 마법 연구소를 이미 넘어선 데다 나날이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을 책임지기로 하고 완전히 넘어온 것이다.
코부스에 근거를 둔 마법 연구소는 말 그대로 연구에 집중하면서 기존 생산 설비만큼 제작하기로 했다.
루산은 다음 운송 일정을 알아보기 위해 칼리슈를 만났다.
“현재 레이크 시티에서 한 달에 16대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산 가능 대수는 매달 두 대씩 추가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운송 날짜를 곧바로 잡아도 되겠군요?”
“그건 아닙니다. 제국군에 납품하기로 한 물량이 있어서 20일 후에 아홉 대 정도 운송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어차피 레이크 시티에서도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루산은 그 정도 여유가 오히려 반가웠다.
문제는 아라드 왕국이었다.
아우로라 연합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기사님, 북부 전선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통치자님께 들었습니다.”
루산은 율리안에게 보고하러 가서 이미 북부 상황을 듣고 왔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제국군에 멕 나이트를 납품하는 가프 마법 연구소가 더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아우로라 연합에서 북방을 강하게 공략하는 것으로 보고 남방군 1개 군단을 북부 전선으로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남방군은 사실상 1개 군단만 남는 것 아닌가요?”
네세베르 공략군에 남방군 1개 군단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북부 전선으로 1개 군단이 이동하면 이제 남방군은 1개 군단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면 아라드 왕국을 지원하기가 더욱 쉽지 않겠군요?”
“후방에 있는 지방군을 끌어 모아 지원을 가게 되겠죠. 남은 남방군마저 남쪽 전선에 투입하면 온전한 예비 군단이 없는 셈이니까요.”
수도 군단, 근위대, 지방군 일부가 남겠지만, 그것마저 투입한다면 밑천이 거덜 나는 셈이라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기사님께서 병력 일부를 이끌고 아라드 왕국을 돕는 것은 어떻습니까? 전에도 한번 그렇게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칼리슈가 먼저 제안해 올 줄은 몰랐다.
루산은 곰곰이 생각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는 아라드 왕국이 망하면 곤란해. 멕 나이트 대금도 못 받고, 변경 개발권도 잃게 되니까.’
물론 전쟁은 이제 시작한 단계라 승패를 장담하기 어렵지만, 초반 분위기가 여유롭게 흘러가지는 않는 것 같으니 필센 제국의 전체 전략을 알지 못하는 가프 마법 연구소로서는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루산도 가프 마법 연구소가 손해를 보면 자신도 손해를 보는 구조라 칼리슈의 요청에 응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아라드 왕국에서도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에 명분이 있었다.
‘그래도 곧바로 수락할 필요는 없지. 아라드 왕국은 전에도 몇 년은 막아냈으니까.’
당연히 몸값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 전쟁의 형세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전에도 아이젠 자작의 기동 전단이 없었다면 레오파드 네 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필센 제국군이 아라드 왕국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번 더 운송하면서 상황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네.”
칼리슈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