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모른 척하고 밝은 세상에서 살아요
132. 모른 척하고 밝은 세상에서 살아요
오베론 공작은 귀족 재산 사기 사건과 관련하여 울름 남작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기 전에 충분히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보고가 끝난 뒤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들이 어떻게 이런 내용까지 알 수 있나?”
전체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긴 것은 루트였지만, 오베론 공작 역시 루트와 울름 남작을 통해 이 계획의 목적과 대강의 진행 과정을 알고 있었다.
반란에 드는 각종 비용 - 거점 마련, 동지 규합 및 활동, 멕 나이트 제작 등에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실행한 것인데, 대상을 선정할 때부터 주의를 기울였다.
첫째, 재산이 많을 것.
둘째, 가까운 친인척 가운데 고위 관리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 없을 것.
그에 따라 철저히 대상을 선정해서 작업에 들어갔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정부 관리, 은행, 마법 연구소를 적절히 활용해 해당 가문의 재산을 전혀 꼬리를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흡수한 것이다.
소송을 걸어 봐도 남은 것이라고는 껍데기와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말단 고용인들뿐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해당 가문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그렇게 얻은 재산으로 어마어마한 반란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황제가 이 사건을 몰랐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파일럿과 멕 나이트를 동원한 대규모의 거사를 실행했던 것이다.
“어떻게 최종 소유자 중에 우리 가문의 고용인들이 있고 그 구매 자금이 자네를 통해 전달되었다는 것까지 알 수 있단 말인가?”
오베론 공작의 차분한 추궁에 울름 남작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오랜 기간 온갖 일을 처리해 온 사람으로서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경찰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경찰? 그동안 내무대신이 뒤를 봐주고 있지 않았나?”
그동안 경찰에서 이 귀족 사기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이 계획이 조용히 처리된 데에는 내무대신의 역할이 컸지요. 그런데 딱 한 번, 슈텐달 남작 건이 틀어졌을 때 경찰이 개입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의심스러운 정확을 파악하고 파고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건 역시 나중에 내무대신이 뒤처리를 하여 조용히 넘어가기는 했지만, 경찰 일부에서 의혹을 가지고 계속 건드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히 내무대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말인가? 내무대신은 황제 폐하의 사람인데?”
“이번 노바 반란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엄청난 인력을 동원했습니다. 밤베르크 백작이 움직였다 합니다. 노바 경찰청장이 그의 사람이거든요.”
“음!”
“사기 가문의 피해자이면서 이번에 무공 훈장을 받은 루산 보름스라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
오베론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루산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이 사달이 난 것이다. 황제와 고관들이 있는 훈장 수여식 자리에서 사건을 공론화시킨 문제의 인물이니까.
“변경 8구역에 있는데, 그곳의 통치자가 바로 밤베르크 백작의 조카인 율리안 마이센입니다.”
“밤베르크 백작이라······.”
그라면 이 정도 파고들 역량은 있을 것 같았다.
밤베르크 백작.
오베론 공작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상당한 재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황제와의 관계도 남달라 모종의 경로로 반란 소식을 접하고 황제를 위해 스스로 이 사건을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베론 공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 인물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사기 사건 피해자들이 이렇게 내밀한 부분까지 파헤칠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게 됐군.”
밤베르크 백작은 황제의 친구이면서 오래전에 군문을 떠났음에도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군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라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황제와 교감이 돼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힘으로 찍어 누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어쨌든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이 사건을 조용히 매듭지어야만 했다.
그는 울름 남작으로부터 보고를 듣고 궁금한 점을 낱낱이 확인한 뒤 가문의 재무 담당자들을 불렀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귀족 가문 사기 사건 피해자 대표와 만나게 되었다.
변호사 포렌시스를 동반한 루산이 노바에 있는 오베론 공작의 저택으로 찾아온 것이다.
***
“어서 오게. 전에 궁에서 보고 두 번째인가?”
오베론 공작이 인자한 미소로 루산을 반겼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공작님.”
“허허, 황궁에 처음 들어가면 그럴 수 있지. 앉게.”
“감사합니다.”
공작의 권유에 루산은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오베론 공작이 상석에 앉아 물었다.
“좋아하는 차가 있는가?”
“변경에서 일해 온 터라 입맛이 까다롭지 않습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무거나라는 말이 제일 어렵다네, 허허허!”
공작은 자애로운 표정을 유지한 채 비서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울름 남작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재판에서 우리 가문에 대해 언급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네.”
“그러십니까?”
“그럼! 국난을 헤쳐 나가는 어려운 시기가 아닌가? 이런 때에 이유를 불문하고 내 이름이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면 위로는 황제 폐하께서 걱정하시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혼란스러워 하게 되지.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말이네.”
루산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자 오베론 공작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지난 대전쟁에 승리한 뒤에도 필센 제국은 상당한 위기를 겪었다네. 오랜 전쟁으로 나라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전쟁 기간에 목숨을 잃은 기사들 가문의 일부는 황제 폐하와 제국을 원망했지.”
소위 귀족파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반면 아우로라 연합은 전쟁에 졌다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세력이었네. 우리나라의 어려움을 틈타 황제 폐하를 원망하는 귀족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제국의 산업 기반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 했고, 든든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한 반란 세력으로 키워 결국 내란을 일으키려 획책했지.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네.”
루산은 공작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했지만, 집중하여 들었다.
“황제 폐하의 동생인 빌헬름 공에게까지 아우로라 대륙의 첩자가 붙어 책사 노릇을 하는 상황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러다 나라가 망한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고 아우로라 쪽 간첩과 반제국적 인사들을 일거에 정리할 계획을 세우셨지. 그들을 강압적으로 잡아내려 한다면 더 음지로 몸을 숨겨 찾기 어려울 테니 그렇게 하기보다 그들 사이로 들어가 뜻을 함께하는 척하며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제어하기 쉽다고 보신 거야.”
“······.”
“그 역할을 내게 맡기셨네. 겉으로 황제 폐하와 대립하는 척하며 반제국적, 반황제적 세력들을 주위에 끌어모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네. 일단 저들의 믿음을 사야 했고, 제국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자네도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반개혁적 수구파의 우두머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네. 이반 황제 폐하와 개혁을 함께해 오고 대전쟁의 선봉에 서 온 사람으로서 그런 불명예가 없었지.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역할을 맡기로 했어.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제국을 위하는 길이었으니까.”
루산은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는 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오베론 공작이 비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는 와중에 저들이 구체적인 반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 반란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고, 성공을 위해서는 굉장히 큰 액수가 필요했다네. 누군가는 그들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어. 이건 반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 의심을 받고 황제 폐하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때문이었네.”
루산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베론 공작이 그 표정을 봤지만, 개의치 않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결국 여러 가문의 재산으로 반란을 준비했고, 실제로 반란이 일어났고, 필센 제국은 아주 수월하게 그 반란을 진압하여 우리나라에서 활동해 온 아우로라 연합 간첩들과 반란 세력을 단숨에 소탕할 수 있었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아우로라 연합의 대군을 맞이하게 되었을 거야. 나라가 망하는 것이지.”
오랜 기간 치밀하게 준비해 온 계획에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했다.
자기 가문의 재산을 반란 준비를 위한 자금으로 빼앗기고 가족이 화병으로 죽거나 뿔뿔이 흩어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베론 공작은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의 구체적 대상은 저들, 곧 아우로라 연합과 반란 세력이 선정하고 이 계획을 묵인한 것은 황제의 뜻인 것처럼 말했다.
루트의 진술과는 많이 달랐다.
루트는 자신이 직접 대상을 골랐고 아버지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반란 세력의 힘이 강하면 언제든 직접 황궁을 칠 의지를 자신에게 내비쳤다고 했다.
그것을 믿고 전심전력으로 반란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황제의 뒤통수를 치려 했단 말이지? 정말 대단한 노인이야!’
자신의 아들을 직접 투입한 오베론 공작도 그렇고, 이런 오베론 공작이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만든 황제도 그렇고, 대단하기는 했다.
루산은 오베론 공작을 만나기 전에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실제로 잘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루산은 소리 없이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말했다.
“공작님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세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해 오신 심정이 오죽하셨겠습니까.”
“음!”
공작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면 필센 제국에는 반란 가담자가 되고, 귀족파 가문들에는 배신자가 되는 일이니 말입니다.”
루산은 오베론 공작의 노고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배신자라는 표현에 공작이 처음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노회한 공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동의했다.
“그렇지. 알아주는군.”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피해를 입은 가문은 억울할 노릇이지요. 이 나라를 위해서라면 스스로 몸을 바칠 수도 있고 재산을 헌납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발적이어야 명예롭고 아름다운 것이지 사기를 당해 빼앗기고 그 충격으로 가족이 병들고 죽는다면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음!”
“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알면서 방치하여 이 가문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면 그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 줘야 하는 겁니까?”
“심정은 이해하나 표현을 조심할 필요가 있겠군. 황제 폐하를 그렇게 말해서야 되겠나?”
오베론 공작은 이 순간에도 책임을 황제의 탓으로 돌리는 치밀함을 잃지 않았다.
“반란 세력을 일소했으니 당연히 그 사건의 피해자들을 구제할 생각이었으나 구제책을 실행하기도 전에 피해자 측에서 먼저 재판을 걸어왔고, 그동안 전쟁이 점점 치열해져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네.”
루산은 매끄러운 오베론 공작의 혀를 뽑고 싶었다.
‘퍽이나 그랬겠구나!’
이번에 꽤 깊게 건드리지 않았다면 결코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이라면 속마음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러셨군요.”
“그럼! 어쨌든 이 사건은 피치 못할, 불행한 일이었네. 기꺼이 피해 가문의 토지와 건물을 원래대로 돌려주겠네. 그러니 재판을 취하하게.”
오베론 공작이 자비로운 얼굴로 선심 쓰듯 말했다.
그러나 루산은 지금까지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많이 참았다.
이제 물러날 수 없었다.
“이미 그 토지와 건물은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적법한 소유를 주장하면 소송에 오랜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기 피해 금액을 돌려받기를 원합니다. 그 액수는 당시 법원에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산정되어 제출했기 때문에 새로 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당연히 이자가 붙어야겠지요.”
오베론 공작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토지 가격이 많이 하락해 원상회복과 현금 지급 금액의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베론 가문이라지만 몇천만 골드를 현금으로 돌려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산은 공작의 표정에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가장과 가족 구성원이 그 사건의 충격으로 사망하거나 병에 걸린 경우 그에 대한 배상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루산이 손을 내밀자 포렌시스가 서류를 건네주었다.
루산은 그것을 공작 앞에 정중하게 내밀었다.
“12개 가문 각각이 돌려받아야 할 피해 금액을 정리해 봤습니다.”
오베론 공작은 그 서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루산을 노려보았다.
‘이 정도도 큰 은혜로 알고 감지덕지하며 물러날 것이지! 감히, 너 따위가!’
슬슬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루산은 못 본 척하며 말했다.
“다만 보름스 가문은 다 필요 없고 원상회복만 해 주시면 됩니다. 지가 하락으로 인해 현금으로 받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알지만, 가문의 뿌리가 그 땅이니까요. 알아보니 어려운 일도 아니겠더군요. 현 소유주들이 다 오베론 공작 가문과 인연이 깊더군요.”
“······!”
오베론 공작과 울름 남작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오베론 공작이 호통을 치려 할 때 루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름스 가문의 장원 가운데 툴롱 마법 연구소에서 반란군을 위해 멕 나이트를 만들던 공장 부지는 아무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려받기 어려울 줄로 압니다. 그 땅은 전쟁이 끝난 직후 돌려받기로 하고 그 전까지는 임대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제 마음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그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루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렇게 조치해 주시면 소송을 취하하겠습니다.”
오베론 백작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단 검토해 보겠네.”
“그러시죠.”
“다음에 또 보세.”
“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루산이 인사하고 나가자 문밖에서 차를 들고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하던 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섰다.
저택 문 앞까지 따라 나온 울름 남작이 루산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무례한 짓이었다.
루산이 고개를 돌리니 그가 인상을 쓰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겪은 어려움은 이해하나 선을 넘지는 않는 게 좋지 않겠소? 공작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이 난리 통에 어느 누가 그 피해자들 원상회복에 신경을 쓰겠어?”
“······.”
“오늘의 무례는 잊을 테니 땅과 저택을 돌려받고 끝냅시다. 다른 가족들 생각도 하셔야지. 누나가 또 뱃속에 조카를 가지셨던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사셔야 할 것 아니오?”
가족에 대한 협박이었다.
루산은 울름 남작을 노려보다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해 줘서 고맙소. 아 참! 베르가 지구에 사는 클로라 양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오. 아빠가 누군지는 몰라도 클로아 양의 아들이 참 귀엽더군. 이름이 뭐더라? 가우렌이었나?”
울름 남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
루산은 자신의 어깨에 올린 울름 남작의 손을 툭 쳐내고 말했다.
“클로라 양이 관리하는 상가들이 요새 벌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전쟁 통에 비싼 옷 가게가 잘 되기는 어렵지. 업종 전환을 고민해 봐요.”
“이놈!”
루산은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주인한테 현명한 조언을 하셔야지. 조용히 넘어가 주겠다고 할 때 조용히 넘어갑시다. 황제 폐하께서 과연 이 일로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실까? 공작께서 이 자리를 따내려고 아들까지 버렸는데, 잘 지키고 계셔야지. 이 자리에서 떨어지면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
루산은 울름 남작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변호사 포렌시스가 잰 걸음으로 따라왔다.
“후유!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클로라, 가우렌이 누굽니까? 상가는 또 뭐고요?”
“포렌시스, 당신은 그런 건 모른 척하고 밝은 세상에서 살아요.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로우니까.”
“이 사건을 맡은 뒤로 이미 정신 건강이 많이 상해서 알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포렌시스의 농담에 루산은 피식 웃었다.
한편 울름 남작은 부들부들 떨며 한참 동안 루산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한숨을 깊게 내쉬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루산이 보통 내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 그가 두려워서라기보다는 황제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주인에게 강력히 조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