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거슬리는 벌레가 된 거예요
133. 거슬리는 벌레가 된 거예요
법원 앞 레스토랑은 점심시간임에도 빈자리가 많았다.
전쟁의 영향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어쨌든 인수한 사업체들을 업종별로 묶는 게 상승효과를 내는 데 유리할 것 같은데 나머지 회사들은 어떻게 묶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규 사업도 마땅한 게 없고.”
바덴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루산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벌여 놓은 일이 많아 매우 바쁜 상황에서 시간을 일부러 내서 만나고 있었다.
루산을 만나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제 바덴이 루산보다 사업에 대해 훨씬 잘 알지만, 그는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와 달리 그녀를 믿고 존중해 주었고, 이해력도 좋았고, 가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들이 모르는 유일한 같은 편에게 고민을 나눌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너무 집착하지 말아요. 충분히 잘해 오고 있으니까. 그 많은 사업체를 어떻게 다 성공시키겠어요?”
루산이 물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래도 이왕 인수했으니 잘돼야죠. 빚을 내 인수한 건데······.”
루산은 희미하게 웃었다.
“빚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 말에 바덴도 웃으며 말했다.
“기사님은 참 대단하세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1만 골드에도 펄쩍 뛰셨는데, 2천만 골드가 넘는 금액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시니.”
“2천만 골드가 수중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차피 몸으로 때우는 데는 익숙하니까요.”
“그게 대단한 거죠. 세상에 어느 누가 몸으로 때우라고 2천만 골드나 빌려주겠어요? 그게 바로 상대방이 기사님의 가치를 그 이상으로 본다는 뜻이죠.”
루산은 듣기가 민망해 괜히 물을 들이켠 뒤 말했다.
“어쨌든 미스 고슬라는 잘해 오고 있으니까 너무 조급해 하지 마세요. 이미 반달 그룹 프로젝트와 용감한 나라 프로젝트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한 겁니다.”
바덴은 루산의 인정을 받아 무척 기뻤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왕 조선소와 건설 회사, 각종 제조업체들을 인수했고 무언가가 나올 것 같기는 한데, 그 두 가지 외에는 만족스럽지가 않더라고요. 해운사를 운영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해운사는 인수 목록에 없잖아요?”
“없죠. 조선소가 있으니까 배를 만들어서 시작해 볼까 하는 거죠. 이번 전쟁의 기간이 앞선 대전쟁 정도만 되더라도 동방군 지원 병력과 장비, 물자 수송량이 상당할 테니까요. 제국군 운송 계약을 따내면 최소 20년 간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고, 그 사이에 부르사 왕국의 철광석을 피닉스 제철까지 실어 나르면서 추가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고 사업 영역을 넓히면 되지 않을까요?”
루산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군 병력, 물자 수송은 이미 계약된 업체들이 있겠죠. 오베론 공작이나 황제파 해운사들이 거의 다 해 먹을 텐데, 거기에 새로 배 몇 척 만들어서 발이나 들일 수 있겠어요?”
“그래도 긴급 수송 같은 건들이 있어서 정부 일을 따낼 수 있어요.”
“너무 위험해요. 아우로라 연합 해군이 가만히 보고 있겠어요? 격침되기라도 하면 끝이잖아요. 대형 해운사들이야 워낙 많은 배를 운용하니까 피해가 분산되겠지만, 새로 배 몇 척 보유한 회사가 그런 일을 당하면 그 피해를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그런 위험 때문에 이 시기에 마진이 굉장히 높게 책정돼요.”
“어쨌든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조선소는 일단 그대로 두세요. 손해는 아니라면서요?”
“네. 전에 받아 놓은 주문 물량이 있어서······.”
“그럼 됐죠.”
바덴은 루산이 말한 위험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빚을 내 인수한 수많은 업체들로 최대한 이익을 얻고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본 것이다.
루산은 뭐든 최선을 다하려는 바덴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이런 건 어때요?”
“어떤 거요?”
“레이크 시티에 레오파드 생산 기지가 건설되고 있잖아요.”
“네.”
“그런데 생산 설비 충원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어요. 매달 겨우 두 대 분량씩 늘어나는 추세란 말이에요. 수백 대를 납품해야 하는데 한 달에 16대, 18대, 20대···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죠. 생산 설비가 공급이 안 되기 때문에.”
“아!”
“기존 멕 나이트 관련 업체들도 전부 증설하는 상황이라 머나먼 변경 8구역까지 공급할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거죠, 설비 제조 회사들이.”
바덴은 곧바로 감을 잡았다.
“설비 제작?”
“그쪽 영역을 잘 모르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레오파드 부품 제작 업체들이 설비를 충분히 늘리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어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바덴이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녀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팽팽 돌아갔다.
“설비 제작, 기계 제작, 공작 기계 산업이 이 전쟁의 핵심 산업이네요! 전쟁이 끝나고도 재건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산업이고! 우리나라 본토뿐 아니라 바다 건너 부르가스, 동맹국, 어쩌면 패전으로 산업이 붕괴된 적국에도 진출할 수 있으니······.”
바덴은 이번에 인수한 회사들 가운데 기계 관련 업체들과 이 분야의 사업을 하는 장원 별장 회원들 목록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 분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기사님,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바덴의 몸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루산은 할 수 없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아! 네.”
“끝나고 찾아뵐게요.”
“어, 알았어요.”
바덴은 빠르게 레스토랑을 나가 주차된 자신의 자동 마차를 타고 떠났다.
루산은 그 자리에 다시 앉아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 바람맞은 사람처럼 헛웃음을 흘리고는 이대로 있기가 민망하여 또 다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때 카운터에서 루산을 불렀다.
“손님! 계산을 아직 안 하셨습니다.”
“아! 미안해요. 깜박했어요.”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다 잘될 겁니다.”
종업원의 위로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루산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 우습게 보일 것이 뻔했다.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른 계산을 마친 루산은 종업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뒤로 하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아니, 계산은 하고 가야지! 밥 산다고 했으면.’
루산은 다음에 더 비싼 것으로 얻어먹겠다고 다짐하며 차가운 노바의 거리를 걸었다.
지금까지 노바에 왔을 때는 목적으로 삼은 일을 하느라 바쁘게 보냈지만, 지금은 오베론 공작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일이 없었다.
밤이 되면 스텐커의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를 나눌 텐데, 낮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때 울름 남작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나가 또 아기를 가졌다고?”
루산은 길을 걷다 발견한 육아용품점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없어 한산한 가게의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루산은 직접 아기 용품을 사 본 적이 없었고 가게 주인은 시간이 남아돌아 출산 후 필요한 용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었던 루산은 모범생처럼 흔들림 없이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설명을 다 듣고, 태어날 조카를 위한 육아용품을 잔뜩 구입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지만, 조카에게까지 그럴 수 없어서 좋은 물건으로 샀더니 가격이 상당했다.
“육아에 돈이 많이 드는군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아이를 키우죠?”
“이 제품들을 아무나 쓸 수는 없지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다 형편에 맞게 키운답니다.”
“아!”
루산은 새삼 세상의 차디찬 이치 하나를 날카롭게 깨달았다.
양손 무겁게 물건을 들고 밖으로 나오니 노바의 차가운 가을바람이 옷을 뚫고 가슴까지 아프게 파고들었다.
루산은 차마 사돈네 집으로 갈 수 없어서 매형이 일하는 회사로 가서 물건을 건네주고 나왔다.
“처남, 이대로 가면 어떡해? 밥이라도 먹어야지! 누나가 서운해 할 텐데? 장모님도 안 봤을 거 아니야?”
“매형 얼굴 봤으면 됐죠. 바쁜 일이 있어서 온 거라 시간이 안 나요.”
“아이 참,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리고 처남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비싼 걸 사 가지고 와? 그냥 와도 되는데. 가만있자!”
매형이 지갑에서 돈을 다 털어 루산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한참 동안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루산은 결국 매형에게 져 주었다.
힘도 더 세고 이미 재산도 훨씬 많을 테지만, 매형의 눈에 자신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데 변경을 선택한 안타까운 처남인 것이다.
‘이제 곧 끝납니다, 매형!’
루산은 빙충이 같은 매형 덕에 차가워진 가슴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갈게요.”
“어, 그래! 힘든 일 있으면 말하고!”
“알았으니까 그만 들어가요.”
루산은 계속해서 손을 흔드는 매형을 뒤로 하고 낙엽이 휘날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
오베론 공작과의 두 번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울름 남작과 변호사가 일을 마무리 지었다.
“11개 가문은 현금 지급, 보름스 가문은 현물 반환. 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 봐렌 철골 부지는 국가에 임대하고 국가는 보름스 가문에 월 600골드를 지불합니다. 그리고 멕 나이트와 각종 차량의 이동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나 사인을 상대로 한 소송은 모두 취하하고 앞으로 어떤 소송도 걸지 않아야 합니다. 신문이나 사람의 입을 통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발언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쓸데없이 국력을 낭비하지 않고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오베론 공작께서 나라의 어른으로서 큰 결단을 하신 것이니 그 뜻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조건을 어긴다면 이 계약은 무효이고, 지급한 보상금은 환수될 것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네.”
보름스 가문을 제외하고 총액 2,800만 골드에 달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위임을 받은 변호사 포렌시스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류를 확인했다.
피해자 측에서 제시한 금액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아무리 오베론 가문이라 해도 현금으로 단번에 지불할 수 없어 50퍼센트를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는 향후 5년 동안 분할하여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엄청난 액수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작님의 자비심을 오해할 경우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울름 남작이 기어이 한마디 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갔다.
루산은 대꾸하지 않고 뒤이어 밖으로 나가 멀어지는 울름 남작의 자동 마차를 바라보았다.
“후아! 이제 끝이군요!”
포렌시스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어려운 사건을 결국은 성공시켰다. 그것도 무려 2,800만 골드라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흥분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그 역시 마음 한편이 후련하고, 마침내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느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다.
루산이 포렌시스에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부자가 더하더군요. 법도 어기고 악착같이 벌어요.”
루산이 말한 부자는 가프 마법 연구소였다.
루산의 말에 포렌시스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오베론 공작 가문이 어쩌면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라지만, 입막음을 조건으로 2,800만 골드를 선뜻 내놨어요. 말이 됩니까? 2,800만 골드라니, 얼마나 많은 돈인지 짐작도 안 되는데······.”
아무리 황제의 진노를 두려워한다지만, 황제도 오베론 공작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황제가 훨씬 강하겠으나 서로 약점을 쥐고 있는 셈인 것이다.
“그럼?”
“어떤 식으로든 회수하려 하겠죠. 아니면 지급을 절반만 하고 끝내거나.”
“네?”
“일단 절반을 줍니다. 십여 년 동안 고초를 겪은 가문 사람들이 거액을 손에 쥐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눈물을 흘리며 힘을 합쳐 가문을 재건하려 할까요? 내 생각에는 재산 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
“나머지 절반은 5년에 걸쳐 분할 지급한다?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어쩌면 피해 가문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고······.”
“세상에!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요? 이미 반란에 가담한 수많은 귀족들이 겪고 있는 일이잖아요. 예전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정책에 항거했다고 전쟁터로 끌려가 죽었죠.”
“······!”
포렌시스가 입을 떡 벌렸다.
“2,800만 골드를 그냥 준다? 말이 안 되죠. 이제부터 우리는 정말로 위기인 겁니다. 예전에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 꽤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벌레였다면, 이제 확실히 눈에 거슬리고 위협적인 벌레가 된 거예요.”
“그럼 어떡하죠?”
포렌시스가 두려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 모습이 순진해 보여 루산은 픽 웃으며 말했다.
“뭘 어떡해요? 그래도 일단 1,400만 골드는 받았잖아요. 나는 장원을 돌려받았고. 그걸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야죠.”
“아!”
“끝난 게 아니에요. 우리는 더 똘똘 뭉쳐야 합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벌레들이 약점을 쥐고 위협해 돈을 뜯어갔다.
그 벌레들은 이제 위험에 처했다.
인간의 눈에 띄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게 살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것이다.
루산은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할 일이 많았다.
“가죠.”
“네, 기사님!”
포렌시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계약 서류가 든 가방을 꼭 쥐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