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내 인생이 꼬이면 책임지세요
135. 내 인생이 꼬이면 책임지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상자는 그냥 두는 건데······.”
“뭘요?”
“간편식 말이야.”
그러면서 루산은 간편식 상자를 뒤적거렸다.
바덴이 선물한 상자 안에는 종이로 낱개 포장된, 긴 육면체 모양의 간편식 막대 31개가 두 줄로 빼곡히 들어 있었다.
마스코트 인형이 들어 있는 상자에는 31개, 마스코트 인형이 들어 있지 않은 상자에는 32개.
따뜻한 식사를 할 상황이 아닌 최전방 전쟁터에서 10일 분량,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간식으로 한 달 분량이었다.
그런데 열차를 타고 오는 3일 동안 종류별로 다 먹어 보고 차이와 특징을 알아내려는 아마추어 평가단이 조금씩 뜯어 먹는 바람에 상자 안이 엉망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루산은 거기서 포장을 뜯지 않은 낱개 간편식 막대를 몇 개 찾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 넣고는 코부스 역에서 내려 가프 마법 연구소를 방문했다.
“어이쿠, 기사님! 그렇잖아도 찾았었는데 이제 돌아오신 모양이군요?”
가라로슈가 무척 반갑게 루산을 맞았다.
마치 집 나간 자식의 귀향을 반기는 듯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아! 제가 기사님을 찾았다는 말씀을 듣고 오신 게 아니군요?”
“네. 노바에서 오는 길에 들렀습니다.”
“그러시군요. 어쨌든 이렇게 뵀으니 된 거지요, 허허허!”
“무슨 일로······?”
“왜 전에 필센 제국이 아라드 왕국에 원군을 보내는 소식을 입수해 알려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프 마법 연구소는 아라드 왕국이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레오파드 대금도 받아야 하고, 변경 개발권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산에게 아라드 왕국에 원군으로 가 활약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루산이 필센 제국군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나서 아라드 왕국을 도우러 가겠다고 해서 가라로슈는 제국군의 계획을 알아보기 위해 서둘러 노바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소식을 알아 왔는데, 루산이 갑자기 휴가를 떠나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마음이 무척 급한 상태였다.
“이미 두 달 전에 남방군 일부가 아라드 왕국으로 넘어갔답니다. 그리고 다다음 달까지 2개 전단이 출동한다는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2개 전단이라 봐야 아우로라 연합군의 대규모 물량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역시 기사님께서 전처럼 산악 기동으로 풀어 주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라로슈가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의 대표 마법사가 된 가라로슈가 일개 변경 파일럿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색하고 품위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루산처럼 군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검증된 실력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라로슈가 매달리는 상황이라면 루산에게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라로슈에게 아쉬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그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정확한 병력 규모나 아라드 왕국의 전황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루산이 물었다.
“아쉽게도 그런 정보까지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전시라서······.”
“···네.”
루산은 아쉽다는 듯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가라로슈가 준 정보는 오스카가 알려준 것에 비해 훨씬 빈약했다.
‘역시 남방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구나! 그렇다면······.’
루산은 아라드 참전 여부를 고심하는 척하며 어떻게 하면 추가로 거액을 빌려 달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가라로슈의 간절한 눈빛을 못 본 체하며 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참전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결국은 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라드 왕국은 필센과 달리 지원 능력이 부족해 전투를 오랫동안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레오파드는 아직 널리 사용되는 기체가 아니라서 아무데서나 부품을 교체하고 정비할 수가 없습니다. 아라드 왕국의 정비 요원들부터가 레오파드에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전쟁이 하루아침에 끝날 것도 아니고 레오파드를 한 번만 쓰고 버릴 것도 아닌데, 이대로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흐음······!”
가라로슈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급해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당장 지원 팀을 꾸려 함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루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우로라 연합의 전쟁 수행 의지가 강력하다면 이 전쟁이 길어질 것이고, 정비나 수리 소요도 크게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아라드 왕국 수도에 레오파드 전용 정비 공장을 하나 차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비 공장을요?”
“네. 아라드 왕국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레오파드 몇 대 구입했다고 이 전쟁 통에 정비 공장까지 차려 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앞으로 다른 멕 나이트는 쳐다보지도 않고 레오파드만 구입할 것 같은데요?”
전쟁의 와중에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라로슈는 루산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판매량이 훨씬 많은 필센 제국에도 따로 정비 공장을 세울 계획이 아직 없는데······.”
“필센 제국은 군단별 정비 체계가 잘 갖춰져 있고, 파손이 심한 경우 열차로 며칠이면 여기까지 실어 올 수 있지 않습니까? 반면 아라드 왕국은 열악하죠. 파손이 심한 레오파드를 여기까지 나를 수 있나요? 그러니 반파만 되어도 못 쓰고 일회용이 되는 거죠.”
“맞는 말씀이긴 한데 결국은 수입과 지출의 문제라는 벽을 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사님.”
아라드 왕국은 가난한 나라.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도 레오파드 판매량이 아주 많이 늘어날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나라에 정비 공장을 세우고 인력까지 보내면 손해가 막심한 것이다.
루산 역시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강력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변경 개발권은 언제부터 행사하실 생각입니까?”
“그야 전쟁이 끝나야······.”
“아니죠!”
루산은 가라로슈가 놀랄 정도로 강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가라로슈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루산을 쳐다보았다.
“전쟁이 언제 끝날 줄 알고 묵혀 둡니까? 지금 바로 변경 개발에 들어가는 겁니다.”
“네? 지금 어떻게······?”
이 난리 통에 변경을 개발할 정신이 있겠는가?
황당한 이야기였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아라드 왕국에 생산 시설을 지어서 마나 연료와 윤활유, 각종 소모품을 생산하는 겁니다. 그러면 곧바로 아라드 왕국군과 남방군 1군단에 판매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남으면 필센 제국에 수출해도 되고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기사님.”
“왜 쉽지 않죠? 레이크 시티에도 금방 건설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코부스에서 멕 워커를 수백 대나 고용해 투입하고 설비도 코부스에서 제작해 옮기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지요. 공사 기간 동안 8군단 병력이 최선을 다해 지켜 주시기도 했고 말입니다.”
“아라드 왕국에는 피란민이 있지 않습니까? 죄다 필센 왕국으로 도망쳐 왔을까요? 아라드 왕국 내륙으로 도망쳐 온 백성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일단 노동력은 확보한 셈이죠.”
“음!”
“설비 문제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번에 노바에 갔다가 알아보니 필센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설비 제작 업체, 기계 제작 업체, 공작 기계 업체가 하나로 뭉쳤다고 하더라고요. 중소 업체들이 역할을 분담해 거대 설비를 제작하기로 했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가라로슈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렇잖아도 레오파드 생산 단지에 설비 충당 속도가 느려 속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네. 저도 레오파드 제작 속도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 걱정스러워서 알아봤거든요. 정직한 기계 그룹이라고, 조만간 레이크 시티를 방문할 겁니다.”
정직한 기계(Honest Machine) 그룹.
반달 그룹, 용감한 나라에 이어 바덴이 세 번째로 탄생시킨 기업 집단이었다.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
레이크 시티가 발전하면 루산의 세금 수입이 늘어난다. 그리고 가프 마법 연구소와 루산은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로슈는 루산이 가프를 위해 기계 설비 업체를 알아본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제작하고 운반해서 조립하면 되죠. 남부 전선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진다면 멕 워커에 싣고 원시의 땅을 통과해도 되고요.”
“으음······.”
정직한 기계 그룹 이야기 이후로 가라로슈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부정적인 눈빛에서 경청하는 자세로 바뀐 것이다.
“아라드 왕국 변경에 생산 시설을 건설하는 동안 안전은 우리 8군단이 책임지면 될 겁니다.”
“변경 8군단이 책임진다고요?”
“안 될 것도 없죠. 현재 반달 호수 지역은 거의 소탕이 끝났습니다. 원정 사냥 비중이 늘고 있어요. 장기 원정을 갔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본부와 협상이 필요하겠지만, 대가만 확실하다면 반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구역을 벗어나 아라드 왕국 변경에 장기 체류하게 될 텐데, 괜찮을까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루산이 웃으며 말하자 가라로슈도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루산의 말대로라면 건설 노동력, 설비, 안전까지 확보하는 셈이 된다.
변경 개발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곳에서 생산한 마나 연료, 윤활유, 멕 나이트 소모품은 곧바로 가까운 전장에 비싸게 판매할 수 있다.
변경이 활성화되면 아라드 왕국이 가프 마법 연구소로부터 걷는 세금 수입이 늘어날 테고, 늘어난 세금 수입으로 레오파드를 추가로 구입할 수 있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 큰 이익이 될 뿐 아니라 아라드 왕국군과 남방군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선순환이로구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변경 개발을 전쟁 후로 미루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다 좋습니다만, 결국 아라드 왕국이 패하면 다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런 불확실한 상태에서 변경 개발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루산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한테 아라드 왕국으로 가 달라고 부탁하신 게 아닙니까? 확실한 승리를 가져와 달라고 말입니다.”
“아!”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멕 나이트 수백 대가 격돌하는 전장에서 고작해야 10여 대 남짓한 레오파드를 이끌면서 저런 자신감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가라로슈는 루산의 자신감을 수긍해 버렸다.
루산 보름스.
레오파드 생산을 위해 세르펜스를 사냥하고, 아라드 전쟁에서 레오파드 단 네 대로 마리노 공화국을 패퇴시키고, 제국군 획득 시험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선보이고, 고작 예닐곱 대로 백 대가 넘는 반란군 멕 나이트를 저지한 파일럿이 아닌가!
‘레오파드를 만든 것은 나다. 그러나 세상에 알리고 완성시킨 것은 루산 보름스이다!’
레오파드 그 자체!
‘루산 보름스가 아니면 누구를 믿겠는가?’
가라로슈가 심호흡하고 말했다.
“기사님께서 아라드 왕국으로 가 주신다면, 제안하신 일들을 모두 진행해 보겠습니다.”
루산은 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남방군 1군단이 잘해 주겠지!’
루산이 주머니에서 간편식 레오파드를 주섬주섬 꺼내 가라로슈에게 내밀었다.
“간편식 레오파드 시제품입니다. 상당히 맛있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드셔 보세요.”
“기사님은······?”
“저는 많이 먹었습니다.”
“그럼······.”
가라로슈가 종이 포장을 벗겨 살짝 깨물어 먹었다.
“오! 생각만큼 아주 딱딱하지 않네요. 담백하면서도 견과류가 씹히는 게 맛있군요!”
“그렇죠? 간편식 사장님이 멕 나이트 레오파드의 인기를 높이려고 남는 것 없이 좋은 재료를 썼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허허허! 이건 맛이 다른가요?”
“조금씩 다릅니다. 무슨 맛인지 포장에 적혀 있더라고요.”
“그렇군요.”
가라로슈는 루산으로부터 참전을 확답 받았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으면서 간편식 레오파드로 관심이 확 옮겨 갔다.
그래서 이것저것 먹어 보았다.
정말 꽤 괜찮은 맛이었다.
간이 강하지 않아 질리지 않고 견과류, 건과일이 들어가 향도 좋고 씹는 맛도 있었다.
“이거 느낌이 옵니다, 기사님! 잘될 것 같군요.”
“그런가요?”
“네!”
그때 루산이 말했다.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이 뒤에 근심을 남겨 두면 전력을 다해 싸우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네? 네. 그렇겠죠.”
가라로슈가 호두 맛 간편식을 아작아작 씹다 대답했다.
입안에 고소한 맛이 감도는 게 딱 취향에 맞았다.
“2천만 골드만 더 빌려주십시오.”
아드득!
호두 알갱이 하나가 가라로슈의 어금니 사이에 끼어 버린 것이다.
가라로슈의 인상이 구겨졌다.
***
루산은 율리안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율리안의 표정이 무척 심각했다.
한참 후에 율리안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부장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른 구역은 반란에 연루되어 발칵 뒤집어지고 파일럿이든 멕 나이트든 결손이 생겨 운영에 애를 먹고 있는 반면 우리 8구역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상황인데, 그렇게 무리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죠. 그런데 분명한 것은 다른 구역이 발칵 뒤집히고 8구역은 무탈하게 넘어갔음에도 여전히 가장 규모가 작다는 겁니다. 인구든, 멕 나이트든, 수입이든.”
“점점 성장하겠죠. 반달 호수 지역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원정 사냥을 많이 다녀 봤잖아요. 1년 차 때부터 원정 정찰을 나간 파일럿은 제가 유일할 테니 8구역과 그 주변 지역 지리를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시군요.”
“네. 그런데 반달 호수 지역 바깥으로는 개척 기지로 삼을 만한 땅이 가까이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근거지 없이 원정 사냥을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냥 수입의 효율이 떨어져요. 멕 나이트가 늘어나도 멕 나이트 한 대당 벌어들이는 수입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는 겁니다.”
율리안은 루산의 말에 놀랐다. 마냥 잘돼 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레이크 시티가 레오파드 생산 기지로 엄청나게 성장하면 반달 호수 지역 전체가 크게 발달할 테니까요. 사냥 수입이 다소 줄어도 세금 수입이 그것을 충분히 벌충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사냥 수입도 꾸준히 올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나 연료, 윤활유 생산 시설도 마련해 놨는데 말입니다.”
“그렇죠.”
“사냥 수입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또는 멕 나이트 한 대당 사냥 수입이 줄어들지 않으려면 사냥 빈도를 줄여야 합니다. 서쪽에 새로운 전진 기지를 확보하거나 다음 웨이브가 올 때까지.”
“그래서 멕 나이트 대당 사냥 수입을 높이기 위해 8군단 전력을 나눠 아라드 변경에서 사냥한다?”
“그렇죠.”
율리안은 루산의 말을 이해했지만, 뭔가 충분하지 않았다.
굉장히 훌륭하고 영리한 분석이기는 해도 영혼이 없는 느낌이었다.
루산이 율리안을 빤히 응시하다 말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아라드 왕국 변경 개발권을 확보했지만, 가프 측은 운영할 줄 모릅니다. 전투 요원, 개척 건설 요원, 관리 요원을 선발하고 지휘하는 일, 본부와 전진 기지의 관계를 설정해 변경을 다스리고 확장할 줄 몰라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시행착오 끝에 오는 게 성공일지 실패일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죠.”
“변경의 실질적인 운영은 우리가 하게 될 겁니다. 생산과 판매에만 집중하는 게 가프 측에도 더 나으니까요.”
“그런가요?”
“네.”
그러나 여전히 율리안은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루산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을 겪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셨겠지요.”
“네. 황제는 아우로라 연합에 대항해 싸우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려 15년을 준비해 왔습니다.”
루산이 황제에 대한 존칭을 쓰지 않았지만, 율리안은 문제 삼지 않았다.
메시지 자체가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베론 공작은 어떻습니까? 황제와 귀족파 사이에서 살아남고 더 큰 권력을 쥐기 위해 15년 동안 황제와 귀족파, 양쪽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며 아들까지 속였습니다.”
“흐음······.”
“이 정도는 해야 황제가 되고 공작이 되는 것인가? 힘이 있는 권력자들이 정말 지독하게 애를 쓰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루산의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율리안은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희생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죠. 복수를 꿈꾸며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그렇게 모질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당했죠. 끊임없이 의심하고 당하지 않도록 더 노력해야 했는데, 순진하게 믿어 버렸죠.”
“듣고 보니 다들 믿어 버렸네요.”
사기 사건의 피해자들도 사기꾼을 믿어 버렸고, 반란 가담자들도 오베론 공작을 믿어 버렸다.
“저는 오베론 공작을 믿지 않습니다. 돈을 돌려주고 땅을 돌려주었지만, 자식도 도구로 삼는 사람을 믿을 수는 없죠. 언제고 다시 빼앗으려 할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힘을 기르려고요.”
“힘을 기른다?”
“네.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아라드 건은 분명히 기회거든요.”
“흐음······.”
율리안이 콧숨을 길게 뿜어내고는 물었다.
“만약 내가 반대한다면 어떡할 겁니까?”
루산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못 하는 거죠, 뭐.”
그 말에 율리안도 피식 웃으며 타박했다.
“무슨 포기가 그렇게 빨라요?”
“그래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율리안 님과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거든요.”
“······!”
율리안은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 역시 루산과 뜻이 통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변경에서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사이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반대할 수가 없었다.
“하아! 부장님 때문에 내 인생이 꼬이면 책임지세요.”
결국 율리안은 힘을 기르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루산이 부추겼고 그에 대한 우정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율리안의 내면에도 현재에 대한 불안과 힘에 대한 갈망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