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영주가 아니라 시한부 총독입니다
139. 영주가 아니라 시한부 총독입니다
아우로라 연합군은 아라드 왕국에 3차에 걸쳐 멕 나이트 900대, 멕 워커 800대, 보병 8개 사단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아라드 왕국은 마리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멕 나이트를 필센 제국의 도움으로 수리해 사용하고 있었지만, 모두 합쳐도 200여 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규모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정면 대결을 피하고 호리아 평원에서 저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호리아 평원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길목을 차단하겠다는 뜻이었다.
과거 마리노 공화국이 아라드 왕국 수도로 들어가려 할 때 산길을 차단한 것과 비슷한 계획이었다.
주요 전쟁터가 수도에서 멀어졌다는 것만 다를 뿐.
“아라드 왕국이 호리아 평원에서 저지하려 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을 거야.”
“무슨 이유요?”
루산의 말에 바이크가 물었다.
“호리아 평원에서 북쪽 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 바로 필센 제국 국경이야. 필센 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
아라드 왕국과 필센 제국의 국경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람과 물자가 대규모로 통과할 수 있는 지점이 한정돼 있었다.
아라드 왕국의 수도 북쪽과 호리아 평원 북쪽.
아라드 왕국군이 호리아 평원 서쪽 길목을 모두 틀어막으면 아우로라 연합군은 필센 제국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
이 전쟁은 사실 필센 제국과 아우로라 연합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우로라 연합군이 필센 제국군을 물리치지 못하면 아라드 왕국을 잠시 점령하더라도 결국 변경을 차지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애꿎은 우리나라 건드리지 말고 너희끼리 싸워라, 하는 거지. 필센 제국한테도,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아우로라 연합군이 너희 나라로 간다, 그러니 빨리 원군을 보내라, 하는 거고.”
“아!”
“아라드 왕국군은 병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북쪽 길목까지 지킬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고 서쪽만 막은 거야.”
루산과 바이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방군의 주요 임무가 바로 대전쟁이 발발해 남쪽 아라드 왕국이 전쟁터가 되면 호리아 평원에서 적을 저지해 필센 제국까지 전란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호리아 평원을 빼앗기면 국경에서 막아야 하고, 국경이 뚫리면 전쟁이 필센 제국 본토로 번진다.
“그런데 상황을 보아 하니 아우로라 연합군도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상륙하고 7개월이 지났는데 필센 제국 국경으로 안 갔잖아. 남방군이 내려 온 건 얼마 안 됐다니까 북쪽 길이 뚫려 있었는데도 안 간 거지.”
“아! 왜 그랬을까요?”
“이게 바로 아우로라 연합군의 최대 약점이지.”
남방군 파일럿들은 나이가 있어 루산의 말을 이해했지만, 대전쟁 세대가 아닌, 젊은 바이크와 시에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루산을 쳐다보았다.
“여러 나라 군대가 모여 있다는 거야. 단결이 안 되고,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는 거지.”
“······?”
두 사람은 전선 파일럿이 아니라 여전히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필센 제국군과 맞붙고 싶지 않은 거야. 북쪽 방면군과 동시에 치거나 아니면 북쪽 전선이 먼저 들이쳐 필센의 병력이 그쪽으로 쏠렸을 때 치고 싶은 거지. 자국의 병력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아!”
“얼마 전에 오베리 왕국으로 상륙한 아우로라 연합군이 북쪽을 강하게 쓸어버리는 바람에 남방군 2개 군단이 그쪽으로 갔잖아. 그런 걸 기대하는 거지.”
“희생 없이 빈집을 털고 싶어 한다는 거네요.”
“맞아. 어쨌든 저들이 주저하는 사이에 남방군 1군단이 들어왔으니 우리는 남방군과 아라드 왕국이 아우로라 연합군에 맞서 어떻게 싸우는지 상황을 보면서 아우로라 쪽 후방을 교란하면 되는 거지.”
루산은 자신의 계획을 파일럿들에게 이야기했다.
레보르크가 물었다.
“적극적으로 후방 교란 작전을 벌이지는 않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건 아니고, 확인 차원에서 묻는 겁니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멕 나이트만 900대가 넘고 보병도 수만 명이나 되는데, 우리가 움직인다고 크게 바뀌겠어요? 피해가 없는 게 최우선이지.”
“아우로라 연합군처럼요?”
눈치 없는 바이크가 예리하게 물었다.
루산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맞아. 피해 없이 전공을 올려 보자고.”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더불어 오베론 공작의 장남 실력도 좀 보고.”
그 말에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의 웃음이 싹 가셨다.
루산은 오스카가 전해준 남방군 1군단에 대한 정보를 믿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 아라드 왕국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 주겠다고 장담하고 왔다.
멕 워커 파일럿의 비율이 다른 기동 군단과 다르고, 파일럿의 수도 훨씬 많은 남방군 1군단.
멕 나이트 수도 다르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남방군 1군단을 믿고 아무것도 안 한 채 시간만 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챠콜 레인저 3중대장이 부하들과 정찰을 나갔다 돌아왔다.
***
루산은 챠콜 레인저 대원들을 따라 조심스럽게 산을 넘어 어느 봉우리 중턱에서 아래쪽 산골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저겁니다.”
중대장 베르겐이 가리킨 방향에는 멕 나이트 세 대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루산은 망원경을 꺼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바스 왕국의 그레이 울프랑 비슷한 것 같은데?”
루산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레이 울프보다 훨씬 날씬하고 가벼워 보였다.
루산의 말을 들은 베르겐이 낮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모델 이름은 모르지만, 이번에 침략한 아우로라 놈들이 저런 걸 가져왔습니다. 마리노 공화국 군대가 레오파드에 당한 이후 준비해 온 것 같습니다.”
루산을 대하는 베르겐의 태도는 무척 공손했다.
전에 마리노 공화국 군대를 무찔러 아라드 왕국을 구한 레오파드 부대의 지휘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레이 울프가 맞는 것 같군요. 003처럼 중량을 줄이기는 했어도 걸을 때 살짝 삐걱대는 것 같은 움직임이나 육면체 모양의 장갑판이 그레이 울프 특징과 똑같아요. 레오파드에 대항하려고 개조한 모델인 모양이에요.”
마리노 공화국이 산을 넘어온 적의 멕 나이트 네 대에 의해 본진이 털려 대패를 당한 사실을 알고도 이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아우로라 연합군은 승리할 자격이 없다.
당연히 아우로라 연합군은 이번 전쟁을 위해 상당한 준비를 해 왔다.
루산의 짐작대로 산을 넘는 경량 기체에 대응하고, 더 나아가 역으로 산을 넘어 공격할 수 있는 기체를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루산이 볼 때 산악형으로 개조한 그레이 울프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애초에 그레이 울프라는 멕 나이트 자체가 최고의 기체가 아니었다.
아우로라 대륙의 범용 기체 헤비 스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다지만, 아이언 워리어나 헤비 스틸에 비해 출력이 살짝 부족하고 관절 동작 범위도 좁은 편인 데다 평지용이라 골격 강도 또한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 기체를, 산악형으로 만들기 위해 무게만 덜어내면서 상체와 하체의 균형이 어긋나 걸을 때마다 살짝 위태로워 보였고, 몸체 두께가 얇아져 방어력이 무척 약해 보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아이언 워리어보다 무게를 줄여 기동성을 높일 의도로 만든 레오파드나 그것을 더욱 가볍게 만들라는 자신의 조언에 따라 제작하고 이후 계속해서 테스트를 진행하며 수정한 레오파드 스피드는 새로운 개념의 완성형 기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투 중 상당한 높이에서 뛰어내려도 관절과 골격이 부서지지 않는, 산악 전투에 적합한 놀라운 내구성을 지녔고, 몸체의 균형이 불완전한 듯하면서도 절묘하게 맞아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더욱 예민하게 기체를 조종할 수 있었다.
반면 산악형 그레이 울프는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만든 미완성의 기체 같았다.
‘그래도 멕 나이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강한 출력으로 휘두르는 마나 진동 대검에 맞으면 손상을 입는 건 마찬가지야.’
산악형 그레이 울프의 등장으로 어쨌든 아라드 왕국은 산악 지형에서의 우위를 잃어버렸다.
아라드 왕국이 가프 마법 연구소로부터 구입한 레오파드는 적의 후방으로 들어가 보급 기지를 파괴하거나 우회 공격을 가하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적의 산악형 멕 나이트가 아라드 왕국 진영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멕 나이트 간 산악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산악형이라고 불려도 엄청난 무게 때문에 아무 지형이나 다닐 수는 없어 제한된 산악전이기는 했지만.
“저 멕 나이트가 적 산악 부대와 함께 중간중간 막고 있어서 산을 타고 후방으로 침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돌아서 가는 길은 있겠죠.”
“있기는 한데, 너무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거라 사령부와 연락하기도 어려워 작전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후방을 교란하려면 저런 산악형 멕 나이트와 적 산악 부대 거점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흐음······.”
루산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 탐탁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방군 1군단과 아라드 왕국군의 활약을 지켜보다 기회가 올 때마다 피해 없이 공을 세우고 기회가 오지 않으면 전력을 보존할 계획이었는데, 이런 상황이면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여기에 주둔한 산악형 멕은 저 세 대가 전부인가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부근을 순찰하는 기체들이 더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 거점 부대 전력을 정확히 파악한 뒤 소탕 계획을 세워 보죠.”
“알겠습니다.”
루산은 베르겐이 이끄는 챠콜 레인저들과 함께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돌아갔다.
***
누군가는 당면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누군가는 이미 전쟁 이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필센 제국의 프리드리히와 황제와 오베론 공작이 바로 후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황궁의 정원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단 둘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눈을 보니 북부 전선 생각이 나는군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폐하. 페르보의 굴다크가 젊음의 혈기로 초반에 바짝 밀어붙이는 통에 아군이 많이 밀리기는 했습니다만, 지금은 북방군 3군단이 이스타드 중부 보로스 강에서 방어선을 펼쳐 저지하고 있고, 남방군 2군단과 3군단이 굴다크의 옆구리를 들이치는 형세입니다. 북방군 1군단과 2군단이 오베리 왕국을 징치하기 위해 국경을 넘으면 퇴로가 끊길 것을 염려한 굴다크는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북방군 3군단이면······?”
“아이젠 자작이 맡고 있습니다, 폐하. 지난번에 아라드 왕국을 구원했던 수도 군단 전단장 출신이지요. 변경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했고요. 그 공으로 봄에 훈장을 받았던 장군입니다.”
“오! 기억이 납니다그려. 여하튼 페르보의 공세는 막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충분하다 사료되옵니다, 폐하.”
“남쪽은 어떻습니까? 공작의 첫째 아들이 아라드로 가지 않았습니까? 바트였던가요?”
“그렇습니다, 폐하.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저를 따라 동방으로 가서 대전쟁을 치렀던 녀석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공작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런 게지요.”
남방군 2개 군단을 북쪽으로 보내 놓고도 두 사람은 남쪽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 폐하, 우리 제국이 준비를 많이 했다 하나 적들 또한 놀고만 있지 않았을 터이니 결국은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들의 사기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오베론 공작이 살짝 뜸을 드렸다.
“말씀해 보세요.”
“네, 폐하!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사기 증진을 위해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해외 영토를 일정 기간 다스릴 권한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더욱 힘을 내 공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봉건제를 부활시키자는 것이 아닙니까?”
“일정한 기간을 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10년, 20년, 30년, 이런 식으로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주가 아니라 시한부 총독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고 해당 영토의 발전 상황을 보아 관직을 수여하는 등의 포상을 하고 중앙 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해 제국에 편입시키면 됩니다.”
“흐음······.”
“첫째는 장병들의 사기를 드높여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도록 할 수 있고, 둘째는 승전 후 획득한 해외 영토에 대한 중앙 정부의 관리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많은 영토를 획득한다면 그 땅을 어찌 일일이 다 중앙에서 실질적으로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음!”
“좋든 나쁘든 해당 지역의 총독에게 책임지게 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데 실패한 총독은 교체하면 됩니다. 관리에 성공하면 그야말로 나중에 본토 편입의 부담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귀족들에게 해외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조금이나마 부여함으로써 본토에서 황제 폐하의 지엄한 권위에 완전히 복종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이지요.”
프리드리히 황제는 오베론 공작의 속셈을 빤히 알고 있었다.
필센 제국 본토에서 더 충족시킬 수 없는 권력욕을 해외 영토에서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에 예외를 허용하여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으나 프리드리히 황제는 들어주기로 했다.
오베론 공작이 말한 장점이 확실히 있었던 것이다.
귀족들은 땅을 받기 위해 더 열심히 싸울 것이며, 혼란스러운 점령지를 다스리기 위해 자신의 사재를 쏟아부을 것이다.
이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해도 해외 식민지의 재화는 본토로 흘러들어올 것이니 필센 제국의 부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만약 귀족들이 불순한 마음을 품는다 해도, 제국군의 파일럿 절반 이상은 평민 출신이었다.
또한 파일럿을 꿈꾸는 소년들은 장차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베론 공작의 청을 한 번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반란 유도 계획을 실행하느라 많은 것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쟁 상황이 어찌 될는지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닌데, 일단 이기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일선에서 싸우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미래의 포상에 대한 약속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폐하.”
오베론 공작 또한 황제가 어떤 생각으로 허락했는지 충분히 짐작했지만, 그 역시 생각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일단 만족했다.
두 번째 대전쟁이 시작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고 승패에 대한 조짐은 아직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필센 제국은 <해외 점령지 통치에 관한 법>, <전공 포상법>을 제정해 일선 장병들에게 널리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