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항복도 할 줄 아는 녀석이 하는 법이죠
141. 항복도 할 줄 아는 녀석이 하는 법이죠
까만 밤.
챠콜 레인저들이 유령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산골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봉우리 곳곳에 아우로라 연합의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나 지난 며칠 동안 적군의 경계 태세는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겨울 산의 밤은 무척 추워 아우로라 연합군 경계병들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바위틈에서 몸을 움츠리거나 졸고 있었다.
챠콜 레인저들이 소리 없이 접근해 경계병들의 입을 막고 머리를 뒤로 젖힘과 동시에 단검으로 목을 그었다.
“흐으······.”
경계병들이 풀썩 쓰러졌다.
잠시 후 거대한 괴수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전조등을 켜지 않은 레오파드 라이트닝 일곱 대가, 조련사가 이끄는 장님 코끼리처럼, 나뭇가지를 비비는 챠콜 레인저들의 작은 소리 신호에 의지한 채 조심스럽게 산길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우로라 연합군 경계병이 모두 제거된 뒤라 그들은 가끔 발을 헛디뎌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바위를 굴렸지만, 적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목표 지점에 자리 잡았다.
레오파드 라이트닝 다음으로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 - 루산이 타고 있는 003 - 와 레오파드 스피드, 총 세 대가 어둠 속을 이동했다.
그들 또한 전조등 없이 챠콜 레인저의 소리 신호만 믿고 산길을 걸어 마을 입구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후유······.”
루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단지 이곳 마을을 차지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적들을 해치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능한 한 적의 멕 나이트를 무사히 탈취하고, 적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모두 제압하는 것이었다.
이 거점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여 다음 산악 거점도 조용히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손상 없이 획득한 적의 멕 나이트에 아군 파일럿을 태우면 이쪽 전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레오파드 슈퍼 파워 - 001과 002 - 와 레오파드 파워는 봉우리 너머에서 대기 중이었다.
스피드이나 라이트닝 계열에 비해 중량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깜깜한 산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위험하기도 하고 작전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혹시라도 작전에 차질이 생기면 전조등을 켜고 밤길을 달려 투입하기로 돼 있었다.
루산이 마나 통신기로 명령을 내렸다.
[003,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공격 준비 완료. 모두 레인저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라.]
[알았다.]
[오케이.]
파일럿들이 짧게 대답했다.
챠콜 레인저들은 어느새 산골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다가 003과 레오파드 스피드 두 대가 목표 지점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뒤, 바람 소리 같은 휘파람 소리를 신호로 마을로 잠입해 들어갔다.
불침번이 있었지만, 깊고 추운 밤이라 마을을 에워싼 보초병들을 믿고 비몽사몽이었다.
레인저들은 멕 나이트를 지키고 있던 불침번의 목을 순식간에 꺾어 버리고 바람 소리 같은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유~
[가자!]
루산이 003의 전조등을 켜고 달리며 외쳤다.
팟!
파팟!
루산의 뒤에 있던 레오파드 스피드 두 대가 거의 동시에 전조등을 켜고 루산의 뒤를 따라 달렸다.
츠쿵- 츠쿵-
츠쿵츠쿵츠쿵츠쿵-
그 세 대의 멕 나이트가 마을 입구를 통과해 마을 안으로 진입할 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중턱에서 레오파드 라이트닝 일곱 대가 일제히 전조등을 켰다.
파파파파파파팟!
갑자기 밝아진 산골 마을.
예민한 감각의 파일럿들이 빛과 진동을 느끼고 깨어나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챠콜 레인저들의 칼날과 밧줄이었다.
“적이다!”
놀란 눈으로 소리친 파일럿의 목을 뒤에서 밧줄이 감더니 강하게 조였다.
아우로라 연합의 파일럿은 목을 감은 밧줄을 잡고 버텼으나 침략자를 대하는 챠콜 레인저들의 눈빛과 손길에는 자비가 없었다.
강하게 발버둥을 치는 파일럿을 두 명의 레인저가 누르고 한 명이 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축 늘어졌고, 레인저는 그의 목에 단검을 그음으로써 확실한 죽음을 선사했다.
두 번째로 뛰쳐나온 파일럿은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다.
파일럿은 어릴 때부터 검술을 수련하기 때문에, 아무리 레인저가 강하다 해도, 대비하고 있으면 맨몸이라 해도 쓰러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레인저의 단검을, 팔을 꺾어 떨어뜨리고 단검을 집어 레인저의 목을 순식간에 찔렀다.
팍!
단검이 찔러 들어가던 속도보다 빠르게 뽑혀져 나왔고, 레인저는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단검을 손에 쥔 파일럿은 날개 단 사자처럼 레인저들을 유린했다.
“커헉!”
“으억!”
비명과 신음을 내지 않도록 훈련받은 레인저들이 의도와 무관하게 고통스러운 바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쏴 버려!”
중대장 베르겐이 눈에 불똥을 튀며 레인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레인저들이 등에 메고 있던 작은 석궁을 앞으로 돌려 장전하고 일제히 발사했다.
슉슉슉슉슉슉!
사자처럼 날뛰던 파일럿의 몸에 짧은 석궁 화살이 파파박 박혔다.
그는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내려다보다 인상을 찡그리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근처의 다른 레인저를 죽이려 다가갔으나 그 전에 베르겐이 쏜 석궁 화살에 이마를 뚫려 쓰러졌다.
마을 주민들의 집을 빼앗아 자고 있던 아우로라 연합군 병사들이 뛰쳐나오고, 산악형 그레이 울프 파일럿들도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그러나 이미 레오파드 세 대가 마을 안으로 진입했고, 주위를 둘러싼 레오파드 라이트닝 일곱 대가 환하게 밝히고 있었기에 챠콜 레인저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위협적인 것은 오직 하나, 혹시나 파일럿이 멕 나이트 안에서 비상 대기 하고 있는 것.
군기가 풀어졌다면 아무도 대기하지 않겠지만, 규율이 제대로 서 있다면 다섯 대 가운데 적어도 한 대에는 파일럿이 안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끼이우웅!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산악형 그레이 울프 다섯 대 가운데 한 대가 움직였다.
규율이 나름 지켜지고 있는 부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부대를 구원해 주지는 않았다.
츠쿵츠쿵츠쿵츠쿵!
루산의 003이 바람처럼 달려와 일어서려던 그레이 울프의 옆구리를 그대로 밀어 버렸다.
쿠웅!
거칠게 옆으로 쓰러진 그레이 울프는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003의 대검이 몸에 닿은 상태였다.
마나 진동 대검이 그레이 울프의 장갑판에 닿자 지잉 하는 은은한 소리와 함께 금속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살짝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멕 나이트 파일럿이라면 누구나 아는 끔찍한 느낌.
쓰러진 그레이 울프의 파일럿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기를 들고 있는 그레이 울프의 팔은 이미 적의 멕 나이트에 밟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루산이 외부 확성기로 말했다.
- 항복하면 살려 주고, 저항하면 죽인다. 셋을 세겠다.
그 광경을, 챠콜 레인저에 둘러싸인 아우로라 연합군 산악 거점 부대원들 모두가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장차 자신들의 운명이 그 장면에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냉정하게 흘렀다.
- 삼, 이, 일······.
그때 그레이 울프 조종실이 열리며 파일럿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동화를 풀고 나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후유!”
그 파일럿은 땅바닥을 한 바퀴 구른 뒤에 일어나 한숨을 내쉬고는 003을 쳐다보고 소리쳤다.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항복한 적을 죽이지는 않으리라 믿겠소!”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허영기 가득한 귀족들이 종종 보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비장하고 당당한 태도.
루산은 비웃음을 던지며 치고 말했다.
- 훗! 우리는 용병인데?
“뭐?”
파일럿이 당황하여 황소 눈을 하고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찬바람에 몸을 훑고 지나가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루산이 다시 말했다.
- 약속은 지킨다. 항복하면 살려 주고, 저항하면 죽인다. 모두 마찬가지야.
003이 대검을 들어 챠콜 레인저와 대치하고 있는 아우로라 연합 장병들을 가리켰다.
7미터에 달하는 아트라스 대검이 은은한 빛을 일렁이는 무시무시한 광경.
아우로라 연합 병사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자신들의 손에 들려 있던 잔가지 같은 무기들을 바닥에 던지고 항복했다.
“후유!”
산악형 그레이 울프에서 비상 대기를 하다 항복한 기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가프 용병단의 파일럿은 모두 41명.
레오파드는 14대.
27명은 교체 파일럿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우로라 연합군의 산악 거점을 점령하여 적의 멕 나이트 5대를 손상 없이 획득한 덕에 멕 나이트 수는 19대로 늘고, 교체 파일럿은 22명으로 줄어들었다.
단, 새로운 멕 나이트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이거, 너무 삐걱거리는데?]
[관절이 부서질까 걱정이야.]
레오파드가 얼마나 괜찮은 기체였는지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삐걱거리든 덜렁거리든 멕 나이트가 늘어났다는 것은 아군의 전력이 강해졌다는 뜻이라 파일럿들의 표정은 밝았다.
반면 챠콜 레인저들은 작전을 수행하다 다섯 명의 동료가 죽고 세 명이 부상을 입어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다 죽이고 갈까요? 데려갈 수도 없고 남기고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중대장 베르겐의 말에 루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과연 최선일까요?”
“네?”
“지휘관이 너무 감정에 휘둘리지는 맙시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을 하러 왔지 학살을 하러 온 건 아니에요.”
“······.”
“살려 준다고 해서 얌전히 있는 겁니다. 죽이려 들면 달아나든 저항하든 할 텐데, 저항해서 아군이 다치기라도 하면 전력 손실이고 한 명이라도 무사히 달아나면 앞으로 작전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어요?”
“음!”
“레인저들한테 포로들 데리고 갔다 오라고 하세요. 멕 나이트 세 대 붙여 줄게요. 그러면 저들도 함부로 달아나지 못하고 레인저들도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겁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베르겐이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루산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본부에서도 저들한테 알아낼 게 많지 않겠어요? 우리가 여기서 차분히 심문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 알겠습니다.”
베르겐은 1소대에 포로들을 데려다 주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산도 레오파드 라이트닝 세 대에 호위 임무를 맡겼다.
루산이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다지만, 아우로라 연합군 포로들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자신들을 후방으로 데려간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안도했다.
적의 본부에 끌려간 뒤 어찌 될는지 알 수 없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당장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아우로라 연합군 장병들을 모두 데려간 것은 아니었다.
루산 역시 길잡이가 필요해서 한 사람을 남겼다.
산악형 그레이 울프에서 비상 대기 하고 있다가 루산의 몸통 박치기에 의해 쓰러지고 결국 항복한 파일럿, 바로 코벨 왕국의 젊은 기사 투릭 오제로였다.
왜 저 녀석을 남겼느냐는 모리츠의 질문에 루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항복도 할 줄 아는 녀석이 하는 법이죠.”
애국심과 충성심,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기사라면 항복하지 않는다.
항복하면 멕 나이트를 온전하게 적에게 바치는 셈이 된다.
그것은 기사에게 수치였다.
물론 병사들을 무척 아끼며 상황 판단이 빨라 승산이 없다고 순식간에 파악한, 자애롭고 지혜로운 기사여서 항복한 것일 수도 있지만, 루산은 조종실에서 튀어나오자마자 과장된 몸짓과 비장한 목소리로 명예 운운하며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투릭에 대한 판단을 마쳤다.
자기중심적이고 허영기 있는 귀족.
코벨 왕국 출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코벨 왕국은 아우로라 대륙의 내륙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아우로라 연합의 중심 국가가 아니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또는 왕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악착같이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루산은 챠콜 레인저들이 다음 목적지로 정찰을 나가고 포로를 후송하고 돌아올 아군을 기다리는 동안 파일럿들에게 휴식을 취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투릭 오제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나 나에게 군사 비밀을 얻어낼 생각이거든 꿈도 꾸지 마시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투릭은 고향이 어디냐, 어떻게 참전하게 되었느냐는 별것 아닌 질문에 혼자서 연극배우처럼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다가도 이곳에 아군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루산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귀족은 아닐지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니 명예를 아는 사람이군요. 나를 귀족 포로로 정중히 대하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 역시 귀찮게 하는 일 없이 머물 것을 약속하오.”
그런 모습에 루산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것저것 묻던 것도 생략하고 관심을 끊었다.
당장 싸우게 될 적에 대한 정보는 레인저들이 알아올 테고, 아라드 왕국 전쟁 전체의 판세와 관련해서는 자신이 안다고 해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유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해 관심도 보이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자 투릭이 오히려 초조해 했다.
자기중심적인 투릭으로서는 관심이 사라지는 것이 자신의 가치 하락으로 느껴졌고 그것은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투릭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면서도 귀족적인 명예를 지키기 위해 홀로 끙끙 앓았다.
“저 사람 왜 저래요? 말을 할 것처럼 하다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몸을 떨다 돌아가고, 이상해요.”
“내버려 둬.”
루산은 시에나에게 투릭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산악형 그레이 울프에 적응할 것을 지시했다.
언젠가는 크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시간이 흘러 포로를 후송한 부대가 돌아왔다.
그들은 놀라운 소식을 들고 왔다.
“필센 제국 남방군이 호리아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었답니다!”
“정말?”
파일럿과 레인저들의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루산은 멀찍이서 투릭이 귀를 쫑긋하고 듣는 것을 봤으면서도 레인저를 재촉했다.
루산은 노바를 떠나기 전에 오스카가 준 정보를 듣고 남방군 1군단이 다른 군단보다 더 강력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남방군 1군단의 병력 규모와 무장은 그의 예상조차 훨씬 벗어나 있었다.
“호리아 평원에 투입된 남방군 규모가 2개 군단이랍니다. 멕 나이트 600대! 그중 1개 전단은 아이언 워리어보다 강한 아이언 워리어 Ⅱ로 구성돼 있고, 또 이동식 멕 나이트 킬러 전단을 운용하고 있답니다.”
“흠!”
이야기를 들은 루산은 투릭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