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그 집안 잘되는 꼴은 못 보지
142. 그 집안 잘되는 꼴은 못 보지
“이거, 이러다 남방군 1군단이 아우로라 놈들을 다 쓸어버리는 거 아니에요?”
“좋은 일 아닌가? 아라드 왕국도 구하고, 우리도 피해 없이 돌아갈 수 있고.”
“아이 참! 그러면 우리가 공을 세울 수가 없잖아요!”
“허허허!”
바이크의 말에 파비안과 다른 파일럿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프 용병단 - 변경 8군단 3전대 - 파일럿들은 전체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모리츠와 파비안은 동방에서 20년을 근무하고 은퇴한 뒤 가프 마법 연구소에 취직했고, 반란에 가담한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 또한, 조기 은퇴를 했다지만, 변경에서 최장 15년까지 숨죽이며 지냈기 때문에 40대에서 50대가 대부분이었다.
변경 8군단에 잠입한 레보르크가 가장 어려 30대 초반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에나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크조차 젊음 하나만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실력에 비해 과한 자신감과 이 부대의 넘버 2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뻔뻔함도 젊음의 패기로 보여 너그럽게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바이크는 다른 파일럿들이 자신을 어리고 귀엽게 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러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모리츠가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했음에도 바이크의 말투는 불퉁스러웠다.
“뭐가 쉽지 않다는 건가요?”
“남방군 1군단이 호리아 평원에서 아우로라 놈들을 다 쓸어버리는 일 말이야.”
“네? 왜요? 단 한 번의 교전으로 아우로라 놈들을 무려 2개 전단 가까이 해치웠다던데요? 그렇게 몇 번만 더 싸우면 끝이잖아요?”
“그거야 남방군의 규모와 무기를 몰랐을 때 이야기지. 알고 나면 그렇게 싸워 주겠어? 머리가 있는 장군이라면 다시는 그런 식의 전투를 안 하지.”
바이크뿐 아니라 그의 옆에서 듣고 있던 시에나도 고개를 갸웃했다.
알 듯 말 듯했던 것이다.
그러자 루산이 설명해 주었다.
“원거리 무기는 맞히기가 쉽지 않아. 발사할 때 아주 미세하게 틀어져도 목표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게다가 표적이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아니야. 그래서 적이 아주 가까이 올 때가 아니면 밀집해 오는 적을 향해 소나기처럼 퍼부을 때나 효과가 있는 거야.”
“아!”
“소나기처럼 퍼부으려면 화살이 몇 발이나 들겠어? 궁수 한 명당 열 발? 스무 발? 서른 발? 그런데 화살은 싸기라도 하지. 마나 진동 화살은 너무 비싸. 열 발, 스무 발만 쏴도 멕 나이트 한 대를 날리는 셈인데, 그런 전투를 계속 치를 수 있겠어?”
바이크와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 멕 나이트와 뒤엉켜 접전이 벌어져도 쏠 수가 없지.”
아군이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군에 붙기 전, 가까운 거리에서 쏴야 하는데, 그때는 두꺼운 방패를 들고 전진하면 돼.”
바이크와 시에나는 루산과 함께 봐렌 철골에서 기가스를 산중 호수에 숨긴 적이 있었다.
기가스가 사용하는 크고 두꺼운 방패. 그것이 바로 멕 나이트 킬러 화살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들었다.
“마나 진동 화살을 막을 만큼 크고 두꺼운 방패는 아무나 들지 못하잖아요? 그런 방패를 들려면 엔진 출력도 높아야 하고,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렵죠.”
“아니야.”
루산이 근처에 뒹굴고 있던 마른 나뭇잎을 방패처럼 들고 시범을 보여 주었다.
나뭇잎 방패를 지면과 수직으로 드는 것이 아니라 확 기울였다.
“이렇게 들면 화살이 뚫어야 하는 철판의 두께가 훨씬 두꺼워지고, 운이 좋으면 방패 겉면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맞고 밖으로 튕겨 나갈 수도 있을 거야. 반드시 특수 방패를 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아!”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고, 근거리에서 멕 나이트 킬러를 상대하는 것은 피해야겠지.”
근거리에서 다수의 멕 나이트 킬러 포대에 노출되면 전신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두꺼운 방패를 들지 않는 한 뚫릴 수밖에 없었다.
“나 같으면 평지에서 낮에 싸움을 걸어올 때는 응하지 않을 거야. 싸움을 해야 한다면 산지나 숲을 전장으로 고르겠지. 아니면 밤에 하거나.”
“밤에 하면 피아 모두 곤란하지 않을까요?”
전조등을 켠다 해도 불빛이 어른거려 상대의 무기를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웠다.
눈 먼 무기에 맞아 피해를 입기 십상이었다.
“그러니까 밤을 고른다는 거야. 우리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다! 너희 병력도 마찬가지로 피해를 본다! 우리 병력이 더 많다! 본토에서 더 많은 멕 나이트를 실어 오면 된다! 그런 자신감이 있다면 해 볼 만한 방법이지.”
파일럿들과 레인저들이 어느새 루산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점거하고 있는 도시로 들어가서 방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거야. 공격 측에서는 백성들 피해를 생각하면 함부로 마나 진동 화살을 쏠 수 없을 거야. 마나 진동 화살이 아니더라도 멕 나이트 시가전이 벌어지면 끔찍하지 않겠어? 공격 측이 공격을 주저하게 된다는 점을 이용해 도시 안에서 버티는 거지.”
“그렇게까지 하는 건······.”
시에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루산은 시에나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하튼 호리아 평원으로 진출하면서 거둔 승리는 첫 번째 전투이기에 가능했던 거야. 남방군의 전력을 알게 된 이상 상대도 조심할 테니까 그 정도의 대승은 나오기 어렵지.”
남방군은 확실히 상대를 압도할 만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무기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그럼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될까요?”
바이크가 물었다.
“양군의 정확한 규모도 모르고 지휘관의 능력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도······.”
“적어도 세 번은 싸워 봐야 가늠이 되지, 한 번으로는 알 수 없어. 지휘관의 실력과 부대의 역량 말이야.”
“···네.”
“우리는 우리 일을 하면 그뿐이야.”
루산은 남방군의 대승 소식에 들뜬 아라드 왕국의 레인저들과 마음이 심란해진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했다.
오베론 가문의 힘이 너무나 강해 놀랐던 것이다.
냉정하게 분석하고 맞설 방법을 떠올려 보았지만, 엄청난 전력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남방군 2개 군단을 북부 전선으로 보내고 남은 것이 이 정도라는 것은 사전에 철저히 준비했다는 뜻이다.
‘과연 어디까지 보여줄까?’
신경이 쓰였지만,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루산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3중대장 베르겐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브리핑하세요.”
“알겠습니다!”
***
가프 용병단과 챠콜 레인저 3중대는 호리아 평원 남쪽 산지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아무리 중량을 줄여도 멕 나이트의 키와 무게는 엄청나서 미끄러지거나 굴러 떨어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길을 인도하는 레인저들과 멕 나이트에 타고 비탈진 바닥을 디디는 파일럿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깨 위에 앉아서 가다가 멕 나이트가 미끄러져 떨어지기라도 하면 죽거나 중상을 입을 것이므로 교체 파일럿들도 모두 걸어서 이동했다.
높고 추운 산을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었다.
포로에게는 추위와 배고픔 외에도 두려움과 막막함이 추가되어 이 시간이 더욱 힘들었다.
“헉헉!”
남다른 수련을 해 왔음에도 투릭은 숨을 헐떡였다.
산을 타는 것만큼은 아라드 레인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사실 레인저들이 밥을 조금만 주는 것이 컸다.
멕 나이트 파일럿은 두려운 존재였기에 죽지 않을 만큼만 주고 있었던 것이다.
루산은 서브 파일럿에게 003을 맡기고 투릭 뒤에서 걷고 있다가 그가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종이에 구깃구깃 싸여 있는 작은 덩어리를 꺼내 쓱 내밀었다.
“이게··· 뭐요?”
“먹으면 힘이 좀 날 거야.”
투릭은 주저하다 종이를 펼쳤다.
누가 봐도 먹다 남은 작은 조각이었다.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났지만, 배고픔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항상 예리한 눈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아라드 레인저들이 빼앗기 전에 얼른 그것을 입안에 넣고 씹었다.
고소한 견과류가 바삭바삭 소리를 내고 달콤한 건포도가 이 사이에 쫀득쫀득 씹혔다.
“아!”
천상의 맛이었다.
투릭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제 보니 좋은 사람이었어.’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는 사람은 천사로 보이는 법.
루산에 대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고 경계심이 매미 허물처럼 얇아졌다.
투릭은 구겨진 포장지에 남아 있던 가루까지 싹싹 핥아먹었다.
간편식 레오파드 건포도 맛 조각은 남부 전선에서 아우로라 연합군 포로 한 사람에게 잠시나마 커다란 행복감을 선사했다.
***
루산은 적의 산악 거점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방식은 첫 번째와 똑같았다.
레인저 대원들이 적의 규모와 경계 태세를 철저히 파악하고 나서 밤중에 기습해 일거에 제압하는 것이다.
다음 거점을 피해 없이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번 거점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된다.
또한 적이 멕 나이트를 탈 겨를도 없이 빠르게 진입해서 제압하고 멕을 온전하게 획득해야 한다.
성능은 다소 떨어지더라고 손상 없이 획득한 적의 멕 나이트는 아군의 전력을 키워 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루산은 003을 서브 파일럿에게 맡기고, 조종실 한쪽 구석에 수납해 둔 변경 정찰병 경갑을 착용한 뒤 훈장 수여식 때 받은 은빛 사자 검을 들고 레인저들의 뒤를 따라 거점 마을로 직접 잠입했다.
레인저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 기사가 나타나면 자신이 상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레오파드와 산악 거점 제압 작전에 점점 익숙해진 남방군 출신 베테랑 파일럿들이 신속하게 마을로 들어와 적의 멕 나이트를 제압한 덕에 적 파일럿과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우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갑옷을 입고 직접 칼을 들고 레인저들과 함께 움직이는 루산의 행동은 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리노 공화국의 침공을 물리친 영웅으로 존중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루산을 바라보는 눈빛에 존경과 호의가 넘쳐흘렀다.
“필센 남방군이 호리아 평원을 거의 다 차지했다 합니다.”
포로들을 후송하고 돌아온 레인저가 본부에서 들은 이야기를 루산에게 자세히 말해 주었다.
“문제는 아우로라 놈들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몇 번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는데, 크게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호리아 평원 동쪽 길목에 방어선을 형성해 지키고 있답니다.”
“동쪽 길목?”
“네. 룬드 항과 호리아 평원을 잇는 길이 세 개가 있습니다. 아우로라 놈들은 그 길목을 지키고 원군을 기다리려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상부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쨌든 이제 남방군과 아라드 왕국군이 호리아 평원을 차지하고 아우로라 연합군이 동쪽으로 밀렸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아우로라 연합 측 원군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는 일.
루산은 한참 동안 궁리하다 말했다.
“결국은 룬드 항을 점령해야 끝나는 싸움이에요.”
“또?”
“우리끼리 말이오?”
모리츠와 파비안이 눈을 크게 떴다.
“마리노 공화국의 경험을 되풀이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산악 거점을 두고 산악형 멕 나이트를 투입하지 않았소? 후방 거점 또한 허술하게 비워 놓지는 않았을 것이오.”
파비안의 말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겁니다. 그렇다고 공략할 틈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아우로라 주력은 남방군을 저지하느라 애를 쓸 테니 양쪽이 드잡이를 하는 동안 후방 거점을 노려 보죠.”
루산은 특히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에게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루산의 의도를 짐작했다.
‘남방군 1군단, 오베론 공작의 장남이 공을 세우도록 두고 볼 겁니까?’
‘당연히 그 집안 잘되는 꼴은 못 보지!’
현재 용병단으로 위장하고 있고 파일럿들은 거의 다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이라 공을 세운다 해도 포상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오베론 가문이 잘되게 내버려 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루산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으나 그는 오베론 가문의 공을 방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남방군 1군단과 공을 다툰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아라드 왕국에 강한 인상을 남길 만한 큰 공을 하나 세우는 것으로 충분해. 그런 뒤 적당히 뒤로 빠져 가프 마법 연구소의 변경 개발을 도와야 한다. 그게 나에게 가장 큰 이익이야.’
변경 8군단 3전대가 없으면 가프 마법 연구소가 아라드 왕국 변경에 생산 시설을 짓고 싶어도 괴수로부터 지켜 줄 병력이 없었다.
자신이 계속 전쟁터를 전전하다가는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는 것이다.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알겠습니다!”
“알았소!”
챠콜 레인저들과 파일럿들이 힘차게 대답하고 산악 행군을 다시 시작했다.
가프 용병단은 그새 추가로 획득한 산악용 멕 나이트 일곱 대와 멕 워커 네 대를 뒤에 달고 레인저들이 이끄는 대로 산허리를 돌고 골짜기를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