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내 부하 먼저 이기고 와라
148. 내 부하 먼저 이기고 와라
아우로라 연합군의 산악 거점 부대를 공격하면서 포로로 붙잡은 투릭 오제로.
그에게서 룬드 항의 병력 규모와 수비 상황을 듣고 나서 루산은 산악형 그레이 울프를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점점 모아 나갔다.
산악 거점 부대, 수송대, 팔스테르 성을 공격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노출시키지 않고 획득한 것을 모았더니 무려 17대나 되었다.
이것들을 룬드 항 보급 기지로 어떻게 들여보낼 것인가?
맨 처음에는 레오파드 부대에 다급하게 쫓기는 척하며 들어가도록 하려 했었다.
그런데 레오파드는 고작 14대, 획득한 산악형 그레이 울프는 17대.
경량 멕이 일반형 멕과 정면 대결을 펼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레오파드 파워, 레오파드 스피드가 무려 7대나 포함된 레오파드 부대가 당연히 이긴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적 우위에 있는 빠른 경량 멕들이 허겁지겁 달아나는 것은 모양새가 조금 어색했다.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파일럿들을 조사해 보면 이상하다는 점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루산은 투릭 오제로를 회유해 산악형 그레이 울프에 태워 함께 들여보내는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아우로라 연합군 사정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그가 협조만 해 준다면 17대의 멕을 기지 안으로 무사히 들여보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무리였다.
그가 보급 기지로 들어가, “적이다!” 한마디 하면 끝장인 것이다.
일껏 모은 산악형 그레이 울프 17대와 파일럿들은 순식간에 날려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맨 처음에 계획한 대로 레오파드 부대에 추격당해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더욱 실감나게 연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룬드 항에서 파견된 기동 부대를 물리치면서 번뜩 이 방법이 떠올라 곧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시에나, 네가 안으로 들어가야 해.”
“네, 대장님!”
시에나는 홀로 열 대가 넘는 멕 나이트를 쓰러뜨리느라 진이 다 빠졌지만, 산악형 그레이 울프에 올라타고 추격전을 시작했다.
모든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안으로 들어간 17명의 파일럿과 17대의 멕 나이트를 최대한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작전을 성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당장 포대부터 장악하세요!]
[우리 에이스 캡틴의 지시라면 따라야지!]
[암! 그렇고말고!]
시에나의 명령에 그녀의 아버지뻘은 족히 되는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다.
17대의 산악형 그레이 울프들이 세 곳에 설치된 멕 나이트 포대로 빠르게 달려 포대를 둘러싼 담장을 부수고 들어가 경사로를 올라갔다.
포대 위에서 마나 진동 화살을 나르고 레오파드를 향해 마나포를 조준하던 멕 워커들이 화들짝 놀랐다.
산악형 그레이 울프들은 멕 워커들을 가차 없이 베고 마나 진동 화살을 수습하고 레오파드를 겨냥하던 마나포를 기지 출입문 앞에 서 있는 아우로라 연합 멕 나이트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발사!]
***
슝!
슈슝!
슈슈슈슝!
거대한 마나 진동 화살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가까운 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표적이라 빗나가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반란에 가담했던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노바 관문에 설치된 마나포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었기 때문에 마나포에 대해 잘 알았다.
흥분하여 첫 발이 빗나간 경우는 있어도 두 번째는 어김없었다.
쿵!
쿠쿵!
쿠쿠쿠쿵!
거대한 마나 진동 화살들은 몸체가 두툼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아우로라 연합의 주력 멕 나이트 헤비 스틸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반대쪽 옆구리로 튀어나온 화살촉에 붉은색 마나의 불꽃이 일렁였다.
슈슈슝!
슈슈슈슝!
다가오는 적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던 룬드 항 보급 기지의 멕 나이트들은 옆구리 쪽에서 날아온 불행의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열 대 넘게 쓰러지고 나서야 거대 화살을 피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적이다!]
[포대를 탈환하라!]
헤비 스틸 한 대가 두꺼운 강철 방패를 들어 올려 봤지만, 워낙 근거리라 마나 진동 화살은 그 방패를 관통한 뒤 가슴을 꿰뚫었다.
조종실에 있던 파일럿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형체를 잃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멕 나이트가 여전히 많았고 그것들은 멕 나이트 킬러 포대를 탈환하기 위해 지그재그 움직이며 다가왔다.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제압되는 시간도 빠르다는 뜻.
경량 멕은 일반형 멕과 정면으로 붙어 이길 수 없었다.
슈슝!
슈슈슝!
다가오던 헤비 스틸들이 다시 또 쓰러졌지만, 동료를 방패 삼아 살아남은 헤비 스틸 한 대가 포대를 지키고 있던 산악형 그레이 울프를 향해 분노의 대검을 휘둘렀다.
쐐액!
그러나 하필 포대를 지키고 있던 산악형 그레이 울프의 파일럿이 시에나였다.
시에나는 찰나의 순간 오히려 안쪽으로 파고든 뒤 오른쪽 옆구리로 나와 앞으로 힘이 쏠린 공격을 무산시키고 등을 보인 헤비 스틸의 허벅지를 잘랐다.
쓰릉!
헤비 스틸이 쿵 하고 쓰러져 버둥거렸다.
또 다른 헤비 스틸이 달려왔지만, 시에나가 피하는 사이 거대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세 군대 포대 주위가 전쟁터로 변했다.
산악형 그레이 울프들은 마나포라는 강력한 투사 무기를 등에 업고 힘겹게 헤비 스틸에 맞서 싸웠다.
체급이 맞지 않아 한 방 맞으면 팔이 잘리고, 머리통이 날아갔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팔이 잘리고 머리통이 날아가도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땅바닥을 굴러 적의 공격을 피했다.
슈슝!
바로 머리 위에서 마나 진동 화살에 맞은 헤비 스틸이 뒤로 쓰러졌다.
그들이 힘겹게 포대를 지키며 싸우고 있을 때 레오파드들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려와 기지 출입문을 돌파해 전투에 합류했다.
- 우리가 왔다!
산악형 그레이 울프 파일럿들은 바이크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슈슈슝!
슈슈슈슝!
마나 진동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는 가운데 그 틈에 레오파드 003이 가장 위급한 포대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001과 002가 헤비 스틸을 협공하여 처치했다.
레보르크와 바이크도 적을 베어 넘기고 찌르며 룬드 항 보급 기지를 질주했다.
후방 기지를 털려 전쟁에서 패배한 마리노 공화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아우로라 연합군이 무려 100여 대의 멕 나이트를 배치하고 멕 나이트 킬러 포대까지 설치한 룬드 항 보급 기지는, 루산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전보다 훨씬 빨리 제압되었다.
슈슈슝!
공기를 찢고 날아가는 거대 화살에 푹푹 뚫리는 강철 거인들.
루산은 근거리에서 멕 나이트 킬러 포의 위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몸소 체험하며 적의 경량 멕과 중량 멕들을 빠르게 베어 넘기고 전투를 끝마쳤다.
***
가프 용병단은 기지 안에 있던 군인들이 달아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41명의 파일럿과 챠콜 레인저 1개 중대만으로 모두 체포할 수도 없었고,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목적은 기지를 제압한 것으로 이미 달성했지만, 그래도 챙길 것은 챙겨야 했다.
[움직일 수 있는 적의 멕을 모두 가져갈 겁니다. 멕 나이트 우선, 나머지는 멕 워커도 챙기세요. 마나 연료는 멕 워커에 최대한 실어 가져가고 가져갈 수 없는 물량은 폐기하세요.]
루산은 챠콜 레인저들을,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멕 워커를 조종하게 했다.
멕이라는 것은 누구나 탈 수 있다.
조종을 정교하게 잘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
레인저들은 보급 기지 안에 있는 멕 워커 70여 대에 마나 연료를 비롯한 전쟁 물자를 싣고 옮겼다.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이번 전투에서 부서진 산악형 멕 나이트를 버리고 아직 탑승하지 않아 격납고에 대기하고 있던 멕 나이트, 정비창에서 경정비를 받고 있던 멕 나이트 25대를 획득했다.
잊지 않고 멕 나이트 무기와 방패도 잔뜩 챙겼다.
그런 뒤 기지 내의 창고를 모조리 짓밟았다.
식량, 피복, 천막, 무기,
“멕 나이트 킬러도 가져가는 건 어떻습니까?”
이번 전투에서 위력을 실감한 레보르크가 루산에게 건의했다.
“무거워서 산을 넘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부숴야겠군요.”
“그냥 두세요.”
“그냥 두면 적이 다시 사용할 텐데요?”
“누구한테 쓰겠어요?”
“그야 당연히 우리 편이죠.”
“남방군과 싸우는 데 쓰겠죠.”
“아!”
“남방군이 룬드 항을 순식간에 점거하고 아라드 왕국에서 적을 몰아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레보르크는 루산의 심계에 감탄하고 수긍했다.
“그렇다면 마나 진동 화살에 관통당한 멕들도 더 심하게 부술 필요가 없겠군요?”
“그렇죠. 못 움직이면 어쩔 수 없고 움직일 수 있으면 그것도 좋죠.”
“알겠습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레보르크가 깊이 고심하다 묵직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대장님!”
이번 전쟁을 겪으며 루산의 놀라운 실력과 복수 의지를 확인하고 진심으로 승복한 것이다.
짧은 단어였지만, 루산은 그의 마음을 느꼈다.
왠지 가슴이 찌르르 저리고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변경에서 캡틴으로, 전대장으로 승진하며 많은 부하들을 지휘해 봤지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루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보르크를 비롯한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루산의 지시를 빠르게 수행한 뒤 멕 나이트에 물자를 가득 들고 룬드 항 보급 기지를 떠났다.
“이렇게 간다고?”
“우리를 포로로 잡지도 않고?”
룬드 항 보급 기지에 주둔해 있던 아우로라 연합군 장병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멀어지는 적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대장님, 전방에 적이 접근해 옵니다. 선두에 육중한 몸체를 가진 기체가 보이는데, 페르보 제국의 골드 라이노 같습니다.]
루산은 페르보 제국의 노다르 백작이 추격해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두 번째 전투에서 받은 충격을 수습하고, 텅 빈 팔스테르 성으로 들어가 상황을 파악한 뒤, 룬드 항까지 빠르게 달려왔을 것이다.
[지금 곧 가죠.]
[알겠습니다, 대장님.]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이제 루산을 대장님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루산은 처음에는 그들의 호칭이 부담스러웠으나 굳이 지적하기도 어색하여 그냥 넘어갔다.
[복귀하기 전에 한 번의 전투가 더 필요하겠습니다.]
루산과 노다르 백작군의 전투를 목격했던 파비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이은 전투로 전대장님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골드 라이노의 파일럿이 상당한 실력자로 보였던 것이다.
[하하, 이번은 피할 수가 없어요. 팔스테르는 통과한 뒤에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시간을 단축시키는 길입니다. 놈들이 길을 막으면 산지를 빙 돌아서 가야해요.]
[그렇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골드 라이노만 쓰러뜨리면 물러날 테니까.]
‘그래서 걱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파비안은 그 말을 속으로 꾹 삼켰다.
20년 동안 동방 전선에서 파일럿으로 근무한 그는 신체가 결코 불변의 자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쓰면 쓸수록 튼튼해지기도 하지만, 적절한 휴식이 없으면 닳고 고장 난다.
격렬한 전투는 엄청난 압력과 긴장을 주기 때문에 단 1분을 치르더라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루산은 벌써 세 번 넘게 보통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전투를 휴식 없이 치러 왔다.
그러나 그 역시 이번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레오파드 여러 모델, 산악형 그레이 울프, 헤비 스틸, 그리고 멕 워커 부대로 이루어진 가프 용병단은 긴 행렬을 이루며 산길을 따라 서진했다.
그러다 마침내 노다르 백작의 병력과 만났다.
그런데 루산은 자신이 직접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
[시에나, 001에 타고 싸워라.]
[네?]
[우리 가프 용병단의 무서움을 보여 줘.]
[네! 대장님!]
처음에 당황했던 시에나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 005에서 나와 모리츠가 양보해 준 001에 재빨리 올라타고 앞으로 나갔다.
- 네 이놈! 비겁하게 숨을 셈이냐?
골드 라이노에 탑승한 모스타르가 003을 가리키며 성난 사자처럼 분노한 목소리를 쩌렁쩌렁 토해냈다.
루산은 짧은 대답으로 상대를 더욱 격동시켰다.
- 내 부하 먼저 이기고 와라.
- 뭐라? 이놈!
-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용병단 최고의 파일럿이거든.
그제야 모스타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에나가 탑승한 001을 노려보았다.
시에나는 루산의 말이 상대를 자극시키기 위한 계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대장님이 인정해 주셨어!’
그때 바이크가 소리쳤다.
- 나 다음으로 강한 녀석! 이기고 돌아오라고! 지면 혼내 줄 거야!
잔뜩 부풀어 올랐던 시에나의 마음이 바이크의 응원에 피식 웃음과 함께 풀어졌다.
001이 먼저 발걸음도 가볍게 달려 나갔다.
츠쿵-
츠쿵츠쿵-
츠쿵츠쿵츠쿵츠쿵-
그러자 골드 라이노도 001을 향해 묵직하게 달려왔다.
쿵쿵쿵쿵-!
산길에서 마주친 양쪽 군대가 뜨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편을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