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명예와 실리를 다 얻었어
149. 명예와 실리를 다 얻었어
드넓은 평야가 많은 아우로라 대륙에서는 멕 나이트 대회전이 자주 일어났다.
거대한 멕 나이트들이 방진을 짜고 대규모로 격돌하는 싸움이 잦았기에 그에 맞춰 멕 나이트 몸체는 두껍고 단단해졌고 방패는 크고 두툼해졌다.
육중하고 두툼한 헤비 스틸이 아우로라 대륙의 범용 멕 나이트로서 널리 퍼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필연적으로 이런 방진을 깨기 위한 방법 또한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돌진형 멕 나이트로 들이받아 상대의 방진을 깨는 것이었다.
코뿔소처럼 무겁고 단단하여 육중한 헤비 스틸의 방진도 들이받아 무너뜨리고 날려 버리는 멕 나이트.
바로 골드 라이노가 등장한 것이다.
두껍고 단단한 부품을 사용했기 때문에 무거웠고, 이 무거운 몸체를 움직이기 위해 고출력 엔진을 탑재해 가격이 무척 비쌌다.
이런 기체를 적진에 돌진시켜 1회용으로 사용하고 버릴 수는 없는 일, 수많은 적 멕 나이트에 둘러싸이고도 살아남기 위해 뛰어난 파일럿에게만 골드 라이노를 맡겼다.
쿵쿵쿵쿵!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는 골드 라이노를 향해 똑바로 달려가는 001은 누가 봐도 무모해 보였다.
루산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모스타르는 001을 경시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타고 있는 골드 라이노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만큼 베테랑이었다.
방진이 아닌 단 한 대의 멕 나이트를 상대할 때에는 굳이 방패를 몸에 붙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헤비 스틸보다 훨씬 두꺼운 방패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두 멕 나이트가 충돌하기 직전, 골드 라이노는 강한 힘으로 방패의 아랫부분을 빠르게 들어 올려 방패 날로 001의 가슴 부분을 훅 찔러 갔다.
그러나 시에나는 상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낱낱이 감지하고 즉시 반응하는 상태, 곧바로 자신의 방패를 들어 올렸다.
상대의 방패 날에 수직이 되도록 막는다면 강한 충격을 버틸 수 없을 것이기에 지면에 거의 수평이 되듯이 사선으로 들어 올려 막았다.
끄르르륵!
골드 라이노의 방패 날이 001의 방패 겉면에 부딪친 뒤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처럼 쓸고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방패를 들고 있던 골드 라이노의 왼쪽 어깨가 방패와 함께 위로 뜨면서 빈틈이 보였다.
시에나는 상대의 몸이 훨씬 무겁고 두껍다는 것을 알았지만, 레오파드 관절과 뼈대, 몸체 부품의 단단함을 믿었다.
방패가 부딪치고 나서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시에나는 001의 몸체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고 골드 라이노의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들어 방패로 상대의 왼쪽 어깨를 밑에서 위로 들어 올렸다.
끄그그극!
금속 마찰음이 금방 생겼다 사라지고, 묵직한 골드 라이노의 왼쪽 부분이 살짝 뜨더니 몸 전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팟!
그렇게 두 기체는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의 파일럿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잠깐의 교차 사이에 벌어진 놀라운 접전을 목격한 파일럿들은 001의 움직임에 소름이 돋았다.
‘······!’
‘······!’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공격을 당한 당사자인 모스타르의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런!’
두 기체의 중량 차이는 최소한 네 배.
그런데 첫 번째 충돌의 충격을 방패를 기울인 것으로 흘려버리고 그대로 어깨를 들어 올려 몸의 균형을 어긋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모스타르 역시 베테랑 파일럿이었다.
무거운 골드 라이노는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으나 그대로 앞으로 달리지 않고 오른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달림으로써 원심력을 이용하여 쓰러지지 않고 버텨 냈다.
그럼에도 온몸에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루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면 상대의 어깨가 들렸을 때 방패로 밑에서 더욱 들어 올리기보다는 대검으로 겨드랑이를 강하게 베면서 지나갔을 텐데······.’
시에나의 약점은 확실했다.
주로 상대의 힘을 이용해 균형을 무너뜨리고 넘어뜨리기 때문에 상대가 크게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간결하게 공격하거나 방어한다면 쓰러뜨리기 어려웠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적에게 먼저 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루산의 예상대로 골드 라이노와 001의 대결은 오랫동안 이어졌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골드 라이노가 찰나의 순간 놀라운 움직임으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001에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스타르는 용병단 두목에 이어 그의 부하도 당해 내지 못하고 농락당한다는 생각에 괴로웠으나 자신의 자존심보다 백작군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치욕을 감내하며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모스타르 경, 지금 뭐 하는 건가!]
지켜보던 노다르 백작이 호통을 쳤다.
시에나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차릴 능력이 없는 노다르 백작은 묵직한 방패든 광폭검이든 강하게 휘둘러 상대를 날려 버리지 않고 깔짝대는 모스타르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덩치 큰 장사가 빼빼한 소년을 어찌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 같았다.
[주군, 물러나야 합니다!]
[뭐라?]
[이기기··· 어렵습니다!]
모스타르는 백작군을 보존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죽기보다 싫은 이야기를 꺼냈다.
[······!]
[에이스 파일럿이 최소 둘입니다. 물러나시지요. 제가 산길을 막으며 뒤따르겠습니다.]
[허허!]
노다르 백작의 입에서 기어이 헛웃음이 터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적의 멕 나이트는 한 대도 쓰러뜨리지 못한 채 수십 대의 멕 나이트를 잃었다.
‘무슨 낯으로 이대로 돌아간단 말인가!’
자라 공작과 다른 나라 귀족들이 얼마나 자신을 깔볼 것인가!
지금이라도 총공격 명령을 내려야 하나?
그러나 충직한 기사의 한마디에 마음을 접었다.
[주군! 적을 무찌르기는커녕 아군에 오히려 해만 끼쳤습니다. 주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죄는 본진까지 무사히 돌아간 뒤 목숨으로 씻겠습니다!]
골드 라이노의 파일럿.
노다르 백작군의 최강 기사.
자존심 강한 모스타르가 이렇게까지 말할 때는 얼마나 비통한 심정일 것인가!
적이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런 말은 하지 말라! 적이 강하다면 다음에 더 강해져 복수하면 그뿐이다! 모두 수비 대형을 갖추고 천천히 물러난다. 헤비 스틸은 후방에서 모스타르 경을 도와 적의 급습에 대비하라!]
노다르 백작군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에 골드 라이노가 광폭검을 크게 휘둘러 001을 떨쳐 버렸다.
모스타르가 분노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 이름이 뭐냐?
[대장님, 이름을 말해야 하나요?]
시에나가 당황하여 루산에게 물었다.
[알려 줘.]
[네.]
시에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이름이 아우로라 연합의 파일럿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가프 용병단의 시에나다!
- 여자?
- 왜? 여자면 안 되냐?
- 허허허!
모스타르는 허탈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며 서서히 물러났다.
[대장님, 어떡할까요? 붙잡을까요?]
시에나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루산에게 물었다.
[됐어. 보내 줘.]
[네, 대장님!]
[시에나.]
루산이 나직이 시에나를 불렀다.
[네?]
시에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혼날 짓을 한 아이가 꾸지람을 들을 것을 아는 것처럼.
그 목소리를 듣고 루산은 나무라거나 야단치지 않기로 했다.
누구보다 본인이 알고 있는 일로 꾸짖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했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수고했다.]
루산은 다른 파일럿들에게 지시했다.
[대장님······!]
시에나의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 있었지만, 루산은 모른 척하고 파일럿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추격 대형을 갖추고 쫓아가되 싸우지는 않을 겁니다. 레보르크, 파비안이 선두를 맡고 이후에 돌아가면서 선두에 섭니다.]
[예스, 커맨더!]
가프 용병단과 챠콜 레인저 3중대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탄 채 산길을 걸어갔다.
루산이 첫 번째로 습격한 산악 거점에서 포로가 된 투릭 오제로도 이제는 체념한 채 어느 멕 워커의 어깨에 앉아 이 행렬과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룬드 항 보급 기지가 너무나 간단히 무너지는 모습, 무려 골드 라이노의 파일럿이 가프 용병단의 어린 여자 파일럿을 어찌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 열몇 대에 불과하던 멕 나이트와 멕 워커가 어느새 백 대를 훌쩍 넘겨 다 가져가지 못하고 깊은 산골짜기에 숨기는 모습을 보고도 희망을 품을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은 불안한 미래에 절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임무를 초과 달성하고 기쁨에 차서 귀환 길을 재촉했다.
노다르 백작군을 계속 추격하던 가프 용병단과 챠콜 레인저 3중대는 팔스테르 지방을 지나 다시 산으로 올라간 뒤 산지를 통과해 아라드 왕국 본진으로 돌아갔다.
***
노다르 백작군이 초라한 모습으로 쫓겨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룬드 항 보급 기지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것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니 이길 수가 있나!”
자라 공작이 매서운 눈빛을 뿌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단 룬드 항 기지로 돌아간다. 우리는 바다로 언제든 원군이 돌 수 있다. 일단 기지를 튼튼히 재건한 뒤 반격할 것이다!”
아우로라 연합 아라드 방면군 멕 나이트 500여 대와 수백 대의 멕 워커, 많은 지원 병력이 신속하게 후퇴를 시작했다.
팔스테르 성 함락과 룬드 항 보급 기지 습격 소식에도 이 군대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자라 공작의 통솔력이 상당하다는 방증이었다.
좁은 산길을 통해 후퇴하느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지만, 이것은 추격을 어렵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아라드 왕국은 우리가 큰 공을 세우기 어려운 전장이로구나!”
남방군 1군단장 바트 오베론이 아쉬워하며 탄식했다.
적의 멕 나이트 주력 부대는 여전히 건재했다.
좁은 산길에서 싸움을 벌이면 단번에 승부가 결정되지 않고 전쟁이 지지부진해진다.
산지에서는 이동식 멕 나이트 킬러 포대를 운용할 수도 없었다.
남방군 1군단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호리아 평원을 점령하고도 묶여 있는 이유였다.
“그나저나 가프 용병단이라고?”
“네, 군단장님. 아라드 왕국의 요청으로 가프 마법 연구소가 자체 제작한 레오파드 십여 대를 제공하고 용병들을 고용해 만든 용병단이랍니다.”
“백여 대도 아니고 십여 대? 그걸로 산악 거점들을 휩쓸고, 팔스테르 성을 점령하고, 룬드 항을 짓밟았다고?”
“소문이라는 게 과장이 있는 법이라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아라드 고위층에서 대접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모양이기는 합니다. 십여 대로 출발했는데, 백여 대로 돌아왔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하하하! 아우로라 연합군이 동쪽 항구로 후퇴하게 만들다니, 우리 남방군도 못 한 일이 아닌가! 게다가 멕을 열 배나 늘렸어? 아라드 전쟁은 그야말로 용병들을 위한 전쟁이군. 명예와 실리를 다 얻었어.”
남방군 1군단이 엄청난 전력을 과시하며 호리아 평원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전쟁의 중심은 남방군 1군단이었다.
바트 오베론이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호리아 평원의 전투가 계속 늘어지는 동안 한줌도 안 되는 천한 것들이 산을 넘어 엄청난 전공을 세워 버렸다.
바트의 웃음에는 건방진 벌레들에 대한 분노와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가치한 것들에 오래 관심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전쟁은 길다. 우리가 싸울 전장도 여기가 끝이 아니지. 남방군 1군단, 추격 대형을 갖추고 동쪽으로 이동하라! 룬드 항에서 아우로라 놈들을 바다로 밀어 넣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남방군 1군단 장군들이 절도 있게 대답했다.
남방군의 멕 나이트들이 길게 줄을 지어 산길을 행군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습은 마치 산 사이로 흐르는 힘찬 강물처럼 끊이지 않고 굽이굽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