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친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언제든 달려올 겁니다
150. 친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언제든 달려올 겁니다
아라드 왕국군 사령관 니트라 장군이 루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고맙소이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뜨거운 환대에 루산은 살짝 당혹스러웠다.
이 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곤경에 빠진 이웃을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오파드 판매를 확대하고 가프 마법 연구소의 변경 개발권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루산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부끄러움을 꾹꾹 누르고 최대한 담백하게 대답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니트라 장군은 루산의 말과 태도를 필센 제국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했으니 고마움은 내가 아니라 필센 제국에 표시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참다운 군인, 진정한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필센 제국에 감사 표시를 해야지요. 그래도 경에 대한 고마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에요. 벌써 두 번이나 우리나라를 구해주지 않았소?”
루산은 아라드 왕국 출신 개척민들, 그중에서도 아라드 왕국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전쟁 통에 잃고 피란을 떠나 필센 제국 변경 제8구역까지 흘러들어 온 에밀리 가족이 떠올라 민망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총사령관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드리리다.”
니트라 장군의 얼굴에는 호의가 뚝뚝 넘쳤다.
“우리가 이번에 획득한 멕과 물자가 많은데 다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깊은 산골짜기에 숨겨 놓았는데, 아시다시피 우리 인원이 많지 않아 직접 나르기가 어렵습니다. 그걸 운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음!”
니트라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챠콜 레인저 3중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적의 산악 거점 부대, 수송대, 도시 주둔 부대, 룬드 항 보급 기지를 격파하며 얼마나 많은 멕 나이트, 멕 워커, 보급품, 전쟁 물자를 획득했는지.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드려야지요.”
니트라 장군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루산은 니트라 장군의 양해를 구한 뒤 필센 제국군 산악 특임 기동 전대 - 이 역시 가상의 부대이지만 니트라 장군은 그 사실을 몰랐다 - 라는 이름을 숨기고 가프 용병단으로 아라드 왕국군과 계약을 맺었다.
그 계약에 따르면 전리품은, 가프 용병단이 아라드 왕국군의 구체적 작전 명령에 따라 전투를 벌였을 때는 아라드 왕국군과 반반, 가프 용병단 단독 작전의 경우에는 가프 용병단이 차지한다.
이번 작전은, 온전히 가프 용병단 단독 작전이었다.
챠콜 레인저 3중대는 조력자였지 작전 입안과 실행에 대한 권한이 없었고 실제로 전투의 대부분을 가프 용병단이 맡았다.
그동안 획득한 그 많은 멕 나이트, 멕 워커, 전쟁 물자가 모두 가프 용병단의 몫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적의 물자를 차지한 것일 뿐 우리 왕국의 재산에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한 것도 아니야. 게다가 산악 특임 기동 전대가 우리나라에 해 준 일에 비하면 대가가 크다고 할 수도 없지.’
니트라 장군은 부자 나라가 힘없는 동맹국을 도운 대가로 획득한 전리품까지 싹싹 쓸어가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필센 제국은 많은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그에 투입되는 무기와 물자의 양 또한 막대할 것이기에 아쉬움을 떨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루산이 말했다.
“이번에 챠콜 레인저의 도움을 받아 가져온 적의 무기와 물자는 우리가 갖겠지만, 앞으로 아라드 왕국군이 운반해 오는 물량은 정확히 반씩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니트라 장군의 눈이 확 뜨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요. 동맹이잖아요. 아라드 왕국의 멕이 아직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아! 정말 고맙소이다!”
“그 대신 아라드 왕국군에서 수리가 가능한 멕은 우리 것도 수리를 부탁드립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아라드 왕국의 정비, 수리 역량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부품도 거의 다 필센에서 들여왔다.
그러나 루산은 비밀 유지 문제로 남방군의 도움을 받기 곤란한 처지였고, 여기로 들어온 가프 마법 연구소 마법사들과 정비 요원들도 많이 부족한 상태라 아라드 왕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라드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서라도 전리품을 독식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를 도와준 챠콜 레인저 3중대가 있지 않습니까?”
“3중대가 왜요? 혹시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3중대의 도움을 당분간 계속 받고 싶어서요.”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니트라 장군은 크게 안도했다.
“변경을 담당해 온 레인저 부대가 거의 다 전선으로 빠진 것으로 압니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변경을 개발할 때 정찰 병력이 필요한데, 자체 정찰대를 구축할 때까지 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루산의 부탁은 간단한 것이었으나 니트라 장군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아라드 왕국으로부터 변경 개발권을 따낸 것은 가프 마법 연구소이지 필센 제국이 아니었다.
그런데 필센 제국의 산악 특임 기동 전대장이 가프 마법 연구소의 변경 개발을 도와 달라고 한다.
‘역시 필센 제국이 암묵적으로 가프 마법 연구소를 통해 우리 변경을 차지하려는 것이었구나! 하긴, 우리나라에 신형 멕 나이트를 공식적으로 약속한 물량보다 더 많이 제국 모르게 넘긴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니트라 장군은 루산의 의도대로 적당히 오해했다.
사실 변경을 제대로 개발할 능력이 없는 아라드 왕국으로서는 가프 마법 연구소에 변경 개발권을 넘기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었다.
전보다 훨씬 많은 괴수 부산물 수입을 올릴 수 있을 테고 그에 따른 세금 수입도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가프 측으로부터 더 많은 레오파드를 들여오고 전쟁 물자를 구입하기도 더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국의 변경을 필센 제국에 빼앗긴다는 생각에 서글픔과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필센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야!’
니트라 장군은 이미 남방군이 들어온 마당에 산악 특임 기동 전대가 가프 용병단으로 이름을 숨긴 것은 필센 제국이 변경을 직접 장악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름 동맹국의 자존심을 지켜 준다는 뜻인 것이다.
“자체 정찰대를 구성할 때까지 챠콜 레인저 3중대로 하여금 변경에서 가프 마법 연구소를 돕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변경 개발과 관련하여서는 필센 제국의 변경 특별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필센 제국의 변경 특별법이라고요?”
“네. 필센 제국에서는 변경 지역에 한해 바깥세상의 민형사 법령을 우선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백성들이 살기에 적절한 환경이 아니다 보니 제대로 개발해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려면 강제적인 부분이 필요하거든요.”
“흐음······!”
니트라 장군은 이 이야기로 확신했다.
루산은 결코 일개 기동 부대 전대장이 아니라 필센 제국의 특명을 받고 파견된 특별 요원이라는 것을.
이미 가프 용병단이 치른 전투와 세운 공적을 챠콜 레인저로부터 보고받아 루산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혼자서 적군의 멕 나이트 수십 대를 쓰러뜨리는 파일럿이 어디 있겠는가?
레오파드라는 기체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에이스 중의 에이스 파일럿인 것이다.
그런 대단한 파일럿이 레오파드 밀수를 직접 실행하고 가프 마법 연구소의 변경 개발권과 관련된 사항을 협의하고 있었다.
‘필센 제국 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특수 요원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개 전대장에게 일국의 총사령관이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소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니오. 국왕 전하와 신료들의 역할이라······.”
“말씀만 전해 주세요. 결코 아라드 왕국에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오랜 세월 필센 제국의 변경 개발 역사를 반영한 법이니까요.”
“알겠소. 말이 나온 김에 국왕 전하와 자리를 마련해 볼까요?”
“아닙니다! 일개 전대장이 감히 어찌······. 저의 존재는 모르는 척해 주시고, 제가 없을 때 변경 개발에 대해서는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 칼리슈와 의논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요.”
니트라 장군은 루산이 이대로 용무를 마치고 복귀하려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이대로 산악 특임··· 아니, 가프 용병단의 활동은 끝나는 것이오? 아라드 왕국은 여전히 경이 필요하오.”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분간 우리가 나설 전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룬드 지방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남방군과 아라드 왕국군이 아우로라 연합군 주력 부대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전쟁이 전개될 테니까요.”
“그렇소이다.”
“우리는 산악 유격전에 적합한 부대입니다. 대규모 교전에 우리를 투입하는 것은 아까운 전력을 낭비하는 셈이죠.”
“음!”
니트라 장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크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루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당분간 가프 마법 연구소의 변경 개발을 돕고, 레오파드 비밀 운송 임무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갈 테니까요.”
“아! 그렇다면야, 허허허!”
아예 필센 제국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니트라 장군은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루산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친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언제든 달려올 겁니다.”
이 말은 앞으로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발언이었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에밀리 가족, 오슬로 영감, 개척병들을 비롯하여 전쟁을 피해 머나먼 변경 8구역까지 들어온 아라드 왕국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뛰어들어 생긴 마음속 거리낌을 해소하고 싶었다.
비록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돈을 벌려고 변경의 기사가 되었지만, 품위와 명예를 결코 잃지 않으려는 것이 루산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느낀 니트라 장군이 루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소이다, 루산 경!”
***
“기사님, 큰 공을 세우고 무사히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칼리슈가 루산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아라드 왕국 수도에 레오파드 정비 공장을 건설하고 변경에 마나 연료, 윤활유 생산 공장을 짓는 일을 감독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잠은 두 곳을 오가는 멕 워커의 등에 짊어진 짐 바구니 안에서 자다시피 했다.
그러나 루산이 엄청난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는 소문에 엉덩이가 들썩여 만나러 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칼리슈에게 말했다.
“칼리슈 님은 여기서도 여전히 잠이 부족하시군요. 눈은 여전히 충혈돼 있고, 몸도 더 홀쭉해지신 것 같아요.”
“일복을 타고났나 봅니다. 뭐, 기사님 덕이죠. 하하하!”
칼리슈의 농담에 루산은 피식 웃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각자가 해 온 일을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칼리슈는 레오파드 정비 공장 건설과 변경 개발 현황, 필센 제국에서 넘어오는 물자의 양과 속도, 레이크 시티에 있는 레오파드 생산 공장의 설비 증설 상황에 대해 말해 주었다.
루산은 남방군 1군단의 규모, 자신이 수행한 일, 앞으로의 아라드에서 벌어질 전쟁의 전망, 그리고 전리품으로 획득한 멕과 물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칼리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기사님? 몇 대라고요?”
루산이 칭찬을 기대하는 소년처럼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아라드 왕국에 나눠주기로 한 건 제외하고, 산악형 그레이 울프 24대, 와일드 고우트 6대, 헤비 스틸 9대, 그레이 울프 4대. 멕 나이트가 총 43대로군요. 물론 바로 탈 수 있는 것뿐 아니라 파손이 심각한 것도 있어요. 획득한 멕 워커 수가 훨씬 많은데, 130대 정도 될 것 같네요.”
룬드 항 보급 기지뿐 아니라 수송대를 털었기 때문에 멕 워커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동안 우리 마법 연구소에서 만든 숫자보다 기사님이 획득한 숫자가 훨씬 많겠어요!”
칼리슈는 루산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측량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루산은 마법사 친구의 감탄을 충분히 즐기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멕 나이트뿐 아니라 멕 워커도 종류별로 한 대씩 드릴게요. 나중에는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도 멕 워커를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칼리슈가 감격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기사님!”
그러나 칼리슈의 감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루산은 아라드 왕국에 요구한 변경 특별법과 정찰 요원을 대신할 챠콜 레인저 지원 건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찬사를 날리던 칼리슈도 바깥세상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거기에는 다른 전선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 참! 남부와 달리 북부 전선이 어려워지는 모양이에요. 남방군 2개 군단이 추가로 붙었지만, 결국 이스타드 왕국을 지키던 북방군이 무너졌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장난스럽게 친구 앞에서 뻐기며 칭찬을 즐기던 루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