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반갑습니다, 사장님
154. 반갑습니다, 사장님
슈미트 은행장과의 저녁 식사는 법원 근처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했다.
역시 전쟁의 여파로 전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법원에 근무하는 귀족 법관들이 퇴근하면서 낮에 점심식사를 했던 황궁 근처 레스토랑보다는 손님이 많았다.
“어서 오십시오, 고슬라 사장님.”
다가오는 바덴을 보고 은행장이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바덴은 슈미트 은행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던 것이다.
슈미트 은행은 전국적인 지점망을 갖추고 있는 대형 은행이 아니라 노바에서 건실한 중소 상공인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 수익을 얻는 소형 알짜 은행이었다.
슈미트 은행의 법원 지점장이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의 회원이었는데, 바덴이 새로운 장원 별장을 개장하려는 것을 알고 먼저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덕분에 바덴은 새로운 땅을 구입하여 바람의 언덕 장원 별장을 성공적으로 개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바덴은 사업성만을 보고 먼저 선뜻 거액을 대출해 준 이 은행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다.
그래서 루산이 가프 마법 연구소로부터 빌려 온 4천만 골드 가운데 사업체와 토지를 구입하고 남은 자금을 슈미트 은행에 전부 예치했다.
바덴은 그에 그치지 않고 거느리는 사업체 가운데 노바에 사업장을 둔 모든 회사들을 슈미트 은행과 거래하게 했다.
졸지에 슈미트 은행의 제1 고객이 돼 버린 것이다.
슈미트 은행은 바덴이 거느리는 계열사 가운데 규모가 큰 회사 옆에 지점을 내면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고슬라 사장님.”
바덴은 경쟁전에 갔다 오는 날이면 입맛이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고기가 들어 있지 않은 가벼운 음식으로 할게요.”
“그렇게 하지요.”
은행장은 종업원을 불러 깐깐하게 바덴을 위한 요리를 주문했고, 자신은 가장 위에 있는 저녁 특선 메뉴를 시켰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바덴은 은행장과 전쟁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다 사업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예금을 다 인출하고 대출을 좀 받을까 해요.”
은행장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나머지 토지 구입은 순차적으로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브레이브 랜드를 전국 주요 도시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지 구입이 필요한데, 레오파드 트레이너 생산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토지 구입이 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는데, 황제 폐하께서 필센 소년 캠프의 전국적인 확대를 서두르라고 지시하셨다고 해요. 그에 맞춰 브레이브 랜드도 서두르라고 하더군요.”
슐리아 남작의 부탁이었다.
말이 부탁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필센 소년 캠프는 군부대 훈련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브레이브 랜드는 토지를 구입해 놀이 시설과 편의 시설, 수련 시설을 조성해야 했다.
서둘러 토지 구입을 마무리하고,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레오파드 트레이너 공급이 늦어지더라도 소년들을 모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은 할 수 있으니 브레이브 랜드 건설을 서두른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 좋지 않을 뿐.
“그렇군요.”
은행장은 막대한 예치금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바덴이 황제를 거론하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출은 새로 공장을 지어야 해서요.”
“무슨 공장을······?”
“간편식 레오파드 주문량이 다섯 배로 늘었거든요.”
“아!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예치금 전액 출금 소식에 어두워진 은행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반달 식품의 늘어난 매출은 고스란히 슈미트 은행으로 일단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이라면 언제든 빌려줄 수 있었다.
“그리고 간편식 생산 공장을 한군데에 짓지 않고 전국에 분산시켜 지을 생각이에요. 그중 변경에도 하나 지으려고 하는데, 오늘 밤 회원들 초청 행사에서 이 이야기를 할까 해요. 변경에서 함께 사업하자고 말이에요.”
바덴이 변경 투어를 조직하고 변경 개척민들을 모집하는 것은 슈미트 은행장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식품 공장도 상당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텐데, 다른 사업가들도 죄다 들어가면 어쩌시려고요?”
“개척민을 더 많이 끌어와야죠.”
“쉽지 않을 텐데요?”
“북부 지방 사람들은 패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특히 이스타드 왕국 남쪽 국경과 가까운 지방 사람들은 두려움이 상당하지 않을까요? 우리 제국 북부 지방에 개척민 모집 광고를 대대적으로 낼 생각이에요.”
“······!”
슈미트 은행장은 감탄했다.
‘안전을 미끼로 북쪽 지방 노동력을 변경으로 끌어온다? 패전도 사업적으로 이용하다니 놀랍구나!’
필센 제국 북부, 그중에서도 북서부 지방 사람들은 집과 땅과 일자리를 제공해 준다는 신문 광고를 보게 되면 상당히 많이 움직일 것 같았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개척민이 변경에 정착하는 데에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해요. 정부 지원 자금으로는 부족하죠. 그래서 이번에 그와 관련된 자금도 빌리고 싶습니다. 3년에서 5년이면 충분히 상환이 가능할 거예요.”
“5년이면 너무 낙관적인 기간 아닌가요? 개척민이 집과 땅의 가액을 모두 상환하는 데는 20년 정도 걸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집과 땅을 포함한 금액이죠. 이번에 들어설 사업체에서 일할 노동자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니까 농지, 가축, 농기구 가격이 포함되지 않아요.”
“아! 그렇겠군요.”
“그리고 3년에서 5년은 이주민들이 제국 정부 지원금과 변경 본부 지원금을 상환하는 기간이 아니라 제가 슈미트 은행에 완전히 상환할 수 있는 기간이에요.”
“음······, 가능하시겠습니까? 고슬라 사장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말씀만 들어도 대출 규모가 상당할 것 같은데, 저도 경영진을 설득해야 해서 말이지요.”
이번에는 바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달 식품에서 생산하는 간편식이 매달 10만 상자를 정부에 납품했죠. 50만 상자를 요청할 때까지 걸린 기간을 보세요. 네 달이 걸렸습니다.”
“맞습니다.”
“물론 공장을 생산해야 하니 50만 상자를 당장 납품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조만간 매출이 다섯 배로 증가할 것이고, 내년 말이면 150만 상자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을 겁니다.”
은행장이 신중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얼른 종이와 펜을 꺼내 메모했다.
“그 사이 군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도 풀게 될 겁니다. 반달 그룹 인지도가 크게 올라가고, 식품 하면 반달 식품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될 거예요.”
“그렇죠. 전에 주신 것을 먹어 봤는데 맛있더군요.”
“고맙습니다. 어쨌든 식품만으로 최소 5년이면 충분히 상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반달 식품 제품군이 얼마나 충실한지 조만간 리스트를 보여 드릴게요.”
“기대하겠습니다, 사장님.”
“브레이브 랜드가 잘되면, 이미 황제 폐하께서 큰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니 잘될 것 같지만, 3년 안에도 완전 상환이 가능하죠.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사례를 보셔서 알겠지만, 우리가 경영하는 이쪽 분야 사업의 순이익률은 무척 높답니다.”
“알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덴은 은행장의 맞장구에 미소를 지었다.
장난감 사업이나 정직한 기계 사업,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사업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대략 얼마 정도 대출을 쓰실 생각입니까?”
“일시불은 아니고 3년 분할로 4백만 골드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
중소 상공인들과 주로 거래해 온 슈미트 은행으로서는 취급해 본 적이 없는 거액 대출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바덴이 예치한 금액이 이 금액을 훨씬 넘어섰고, 지금도 매달 막대한 금액이 바덴이 경영하는 업체들로부터 들어왔다 다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필요한 서류는 곧 정리하여 최대한 빠르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매번 고맙습니다, 은행장님.”
사업 이야기가 끝나고 음식이 나왔다.
바덴은 슈미트 은행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그에게 팔뚝 길이만 한 모형 하나를 선물했다.
“오! 멕 나이트가 아닙니까? 굉장히 역동적이면서 정교하군요! 이게 레오파드인가요?”
“레오파드 파워라는 모델이에요. 아이언 워리어보다 살짝 날렵하지만, 힘은 더 세죠. 용감한 나라에서 새로 출시한 제품이에요.”
“아주 공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게 얼마인지 아시겠어요?”
“글쎄요? 장난감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8골드에 판매하고 있어요.”
“······!”
은행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길이가 두 뼘이 채 안 되는 인형 하나가 8골드라니!
8골드면 도시 근로자의 한 달 수입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다.
한 달에 8골드를 벌지 못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브레이브 랜드 전시장에서 아주 인기가 많답니다. 벌써부터 구매 예약이 밀려 있죠.”
8골드는 큰돈이지만, 파일럿을 꿈꾸는 귀족 소년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이었다.
“다섯 개 모델이 한 세트랍니다.”
“아!”
“크기도, 배경도 다양하게 출시할 예정이에요.”
“으음!”
정교한 레오파드 파워 모형을 바라보는 은행장의 눈이 반짝였다.
“저도 브레이브 랜드에 한번 가 보고 싶군요.”
“언제든 환영합니다. 제가 모실 테니 시간만 알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바덴은 은행장과 인사를 나누고 레스토랑을 나와 자동 마차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식사는 했나요?”
“네, 사장님.”
“네, 저희는 했습니다.”
운전기사와 비서의 대답을 듣고 바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네.”
자동 마차가 출발했다.
“도착하면 소피아는 퇴근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아 참! 내일 아침 회계부장 오라고 하세요.”
“네.”
소피아가 얼른 메모했다.
“정직한 기계 그룹 사장님과 약속은 언제죠?”
“내일 오후 두 시입니다.”
“자작나무숲 장원 리뉴얼 설계 브리핑은 모레였나요?”
“그것은 내일 오전 열 시입니다, 사장님.”
“그렇구나! 알았어요.”
잠시 일정을 확인한 뒤 바덴은 눈을 감고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도착한 곳은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이었다.
전쟁 이후 한산해진 그곳이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동 마차들이 본관 앞에 가득했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회원들을 특별히 초청한 행사라 많은 사업가들이 와 있었던 것이다.
바덴은 찌뿌뚱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소피아가 얼른 옷매무새를 만져 주고 가볍게 화장을 고쳐 주었다.
손님들뿐 아니라 직원들 앞에서도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아! 귀찮은데······.”
“안 됩니다, 사장님.”
소피아는 서둘러 바덴의 등을 떠밀어 사장실로 들어가 옷을 골랐다.
파티에 입는 드레스는 아니었다.
세련되지만 너무 화려하지 않은 정장 스타일의 옷들이었다.
그래도 그중 가장 화사한 옷으로 골라 주자 바덴은 두말 않고 갈아입었다.
옷을 고르는 것은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화장을 하자 산뜻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덴은 사업가들이 모여 있는 본관 홀로 당당히 걸어갔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끝날 때까지는 이 행사를 주최한 주인이자 사업가로서 웃음을 잃지 않고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홀 바깥에서 직원들이 인사를 하자 바덴은 엷은 미소로 답례하고 홀 안으로 들어갔다.
“오! 미스 고슬라! 얼마 만입니까?”
“오랜만이에요, 고슬라 사장!”
자작나무숲 장원의 회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 왔다.
바덴은 환하게 웃으며 일일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사장님!”
어느새 그녀는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