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다 기사님 덕입니다
156. 다 기사님 덕입니다
루산은 율리안을 만나러 가기 전에 켐니츠에게서 레이크 시티와 변경 8구역 상황을 보고받았다.
지난 반년 동안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레오파드 생산 기지가 활성화되고, 멕 나이트 파일럿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는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호른 영감이 전진 기지 대장에서 물러날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매일 빚 독촉에 시달린다나 봐.”
그러면서 켐니츠는 자신이 아는 바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전진 기지 대장은 사람이 이주하기에 좋은 땅을 골라 원시의 땅 깊숙이 개척지를 건설한다.
정부 지원은 이주민 1인당 개척 장려금 20골드.
그런데 이것으로는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았다.
도로와 다리, 공용 건물을 건설하고, 안전을 위해 멕 나이트를 운용하는 비용으로는 턱도 없었다.
더욱이 이 개척 장려금은 이주민이 들어올 때 지급된다. 개척민을 위한 주택은 미리 지어져야 하기 때문에 다른 자금이 필요했다.
그로 인해 등장한 것이 변경 본부에서 지원하는 개척 건설비.
그러나 이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진 기지 대장에게 10년 안팎의 징세권을 주고 먼저 필요한 비용을 알아서 투입한 뒤 나중에 세금으로 환수하게 해 주었다.
통상 이주한 지 3년 차부터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약 8년에 걸쳐 환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징수권으로 인해 전진 기지 대장은 일반 변경 요원은 상상하기 어려운 막대한 수입을 올리지만, 일단 스스로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호른 영감은 욕심, 안목, 자금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 전진 기지 요원들을 유연하게 지휘하는, 유능한 전진 기지 대장이었다.
겉으로 볼 때는 늘 웃고 다니는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보이지만, 그는 욕심만큼이나 공격적인 성향을 지녔다.
아라드 전쟁으로 피란민들이 필센 제국으로 대거 들어오면서 그의 공격적인 성향은 그대로 드러나 반달 호수 지역에 누구보다 먼저 개척 기지를 건설했다.
델타 기지를 그대로 보유한 채로 루산에게 개척 기지 건설을 맡기고 개척 장려금 집행도 루산에게 전액 일임했다.
문제는 루산이 너무나 유능하다는 데 있었다.
레인보우 시티 건설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 개척 비용이 엄청나게 투입된 것이다.
호른의 주머니가 바닥을 드러냈다.
통상적인 변경 개척 속도에 비할 수 없이 이주민이 엄청나게 들어왔으나 아직 세금을 걷을 시기는 아니었고, 계속된 이주민 유입으로 그의 재산은 더욱 빠르게 고갈되었다.
그래서 루산을 개척 기지 건설 대장에서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레인보우 시티를 맡았다.
정부의 개척 장려금으로 우선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 파산을 막은 것이다.
그렇게 한숨 돌린 호른은 이제 시간만 지나면 막대한 세금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예전에 반달 호수 지역에 개척 기지 부지를 선정하면서 루산이 점찍었던 중심 지역의 드넓은 평야에 추가로 개척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피란민 유입이 끊겨 이주민이 들어오지 않는 바람에 크게 손해를 보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산이 델타 기지를 떠나 레이크 시티 건설을 시작하고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을 유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누가 봐도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이 있는 레이크 시티가 반달 호수 지역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감이 발동한 호른은 중앙 개척 기지 건설에 힘을 주어 레이크 시티의 확장을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피란민 유입이 완전히 끊기고 개척민 모집 광고로 들어온 이주민들은 모두 레이크 시티로 가면서 중앙 개척 기지 건설로 인한 손실이 더욱 확대되었다.
결정적으로 작년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 지원금이 끊겨 버렸다.
이주민 1인당 20골드라는 금액은 상당한 액수라 바닥이 난 그의 재산을 채워 주었는데, 그것이 끊기자 전진 기지 대장으로의 숨통도 끊어지게 된 것이다.
“은행 빚을 상당히 졌나 봐.”
켐니츠가 말했다.
“얼마나요?”
“정확히는 모르는데, 델타 기지 사람들 말로는 4만 골드 정도?”
“4만 골드······.”
보통 사람들에게는 물론 루산도 몇 년 전에는 입을 떡 벌릴 만한 금액이지만, 지금의 루산에게는 그리 대단한 액수가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서 획득한 멕 나이트와 멕 워커가 아니더라도 작년에 올린 사냥 수입만으로 루산은 이미 그 정도 수입은 충분히 거두었던 것이다.
레오파드 밀수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입은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예전에는 호른 영감의 재산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부러움이 있었는데······.’
루산은 자신이 마치 소년에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껑충껑충 뛰어도 닿을 수 없던 담장이 이제는 가만히 서도 담장보다 높아져 그 너머의 세상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4만 골드 정도면 본부에서 충분히 빌려줄 만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자기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
루산은 켐니츠의 단호한 반응이 의외였다.
그래도 오랫동안 델타 기지에서 함께 근무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내 이해했다.
호른 영감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책임이 맞았다.
중앙 개척 기지 개발에 공을 들인 것은 좋은 땅을 선점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욕심을 부리다 망한 사람을 결코 용서해 주지 않았다.
더구나 변경이라면 더욱 가차 없었다.
전진 기지 대장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았다.
호른이 밀려나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꽤 될 것이다.
“루산, 혹시나 호른 영감을 도와줄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아.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될 거야. 이미 차기 전진 기지 대장을 노리고 암투가 치열하거든.”
“누가 전진 기지 대장을 노리는데요?”
“델타 기지 경리부장, 경비부장, 본부 개척 부장······.”
“와! 피도 눈물도 없네. 한솥밥 먹던 사람들이······.”
“세상이 다 그렇지 뭐.”
“본부 개척 부장은 뜬금없는데?”
“돈이 많다더라고. 그 돈으로 더 굴리고 싶은가 보지. 어쨌든 저들은 혼자가 아니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 그러니까 괜히 이 판에 끼어들지 말라는 거야.”
“흐음······.”
루산은 켐니츠의 충고가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8군단의 다른 간부들은 이미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치자님이나 단장님이 이 사태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고 계실까? 이제는 그분들 마음이 이해가 되는구나.’
한 다리 건너 남 일 보듯 할 수 있는 자신과 달리 단장과 통치자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작태가 가소롭기는 하지만, 꽤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알았어요. 본부에 갔다 올 테니 내일 아침에 각 부서 책임자들한테 보고 준비하라고 하세요.”
“오케이. 다녀와.”
***
레이크 시티까지 철로가 깔리고 열차가 다녀 본부로 가는 시간이 무척 짧아졌다.
마차를 타거나 탐탐을 타고 오가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시공간을 단축시키는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루산은 레이크 시티에서 레오파드를 싣고 전선으로 이동하는 특별 화물 열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라돔 역에서 내려 오랜만에 변경 투어 사무실에 들렀다.
변경 투어 사무실은 예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변경을 여행하는 사업가들을 안내하는 일뿐 아니라 이주민을 운송하는 일을 하다 최근에는 변경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투어 사업도 시작했던 것이다.
개척민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개척촌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번 이주하면 평생을 개미처럼 일하며 살기 때문에 정작 변경의 놀라움과 아름다움에 대해 잘 몰랐다.
하늘 높이 솟은 원시의 숲, 사람 키보다 큰 풀들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초원, 거대한 계곡과 폭포, 무시무시한 괴수들, 그 사이에 작게 자리 잡아 점점 터전을 넓혀 나가는 강인한 사람들이 세운 도시.
이곳 주민들에게 변경 투어를 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율리안이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의 안착으로 세수가 크게 늘자 주민 변경 투어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이다.
“기사님, 그렇잖아도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루산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렌커가 서둘러 달려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며칠 전에 꼬마 집사, 아니 이제 듬직한 소년이 되어 있더군요. 클라크가 노바에 공부하러 간다며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기사님은 어쩌고 떠나느냐고 했더니, 기사님이 시켜서 간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맞아요. 공부 좀 제대로 해 보라고 보냈죠.”
“대단하십니다.”
“렌커 사장님도 공부 좀 해 볼래요? 회사 규모도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배우면 좋지 않겠어요? 원한다면 지원해 드리죠.”
루산이 농담 반 장난 반으로 권하자 렌커도 과장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휴! 그런 건 머리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죠. 저처럼 몸으로 때우는 사람은 못 합니다.”
“하하!”
“그리고 필요하면 공부 잘하는 사람 고용해서 쓰면 되지 않겠어요?”
“······!”
농담으로 한 이야기였지만, 렌커는 확실히 사업가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루산이 본부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렌커는 손수 마차를 준비해 왔다.
“가까운데 걸어서 가도 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렇잖아도 기사님을 자주 뵙지 못하는데 이럴 때나 모셔 보죠.”
루산은 못 이기는 척하며 마차에 탔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이동했다.
주로 렌커가 이야기하고 루산은 들었다.
라돔 시와 8구역의 변화, 개척민들의 일상, 다른 변경 구역 소식 등 루산이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를 렌커는 잘도 골라 풀어 나갔다.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어요. 8구역 말이에요. 예전에는 개척촌이라고 하면 허덕허덕 농사나 짓고 가축 몇 마리 키우고 그걸로 빚을 갚기 위해 악착같이 아끼며 살아갔는데, 지금은 사람들 얼굴에 웃음기가 돌잖아요. 세상에! 통치자님이 주민들을 생각해서 투어를 시켜 주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이 세상 다 돌아봐도 그런 곳을 없을 거예요. 이게 다 여유에서 나오는 거라니까요.”
“그런가요?”
“그럼요! 이게 다 기사님 덕입니다.”
뜬금없는 찬사에 루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자기요?”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제 생각에 변경 투어가 생기면서 시작된 변화에요. 사업가들이 여기에 공장을 한두 개 세우면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고 새로운 물건이 돌면서 시작되었죠. 볼거리, 즐길 거리도 늘어나고. 그러다 레이크 시티에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이 들어오고, 멕 나이트 생산 단지가 들어오고, 납품 업체 공장들이 줄줄이 들어오면서 8구역 주민들 수입이 확 늘었단 말이죠.”
유능한 여행 가이드 아니랄까 봐 렌커는 입을 쉬지 않았다.
“변경 투어를 해 본 수도의 사장님들이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프 마법 연구소와 무관한 공장들을 계속 짓고 있어요. 광산도 속속 개발하고 있고, 큰 식품 공장도 곧 들어온다고 하고. 반달 호수에서 가끔 거대 괴수가 고개를 쳐들고 멕 나이트들이 뛰어다니지 않는다면 여기가 변경인지 누가 알겠어요? 본부에서 학교를 세우고 훌륭한 선생님들을 좋은 조건에 모셔 오고···, 이런 곳은 없어요. 변경뿐 아니라 바깥세상 포함해도 말이에요. 다 기사님 덕입니다.”
루산이 민망함에 억지웃음을 짓자마자 렌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안해하더라고요.”
“······?”
“몇 년 사이에 살기 좋은 곳이 됐는데, 전쟁으로 이런 삶이 무너지지는 않을지······.”
북부 전선 패전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최근 개척민 유입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북부 전선의 패전과 관련이 있었다.
바덴이 북부 지방 신문들에 8구역 개척민 모집 광고를 대대적으로 냈고, 그것을 본 북부 사람들이 지원해 들어왔고, 그들로 인해 전쟁의 암울한 기운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루산은 아직 북부 지방에서 개척민이 대대적으로 유입된 배경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전쟁이 변경 주민들마저 두렵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마디 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네?”
“필센 제국은 강하거든요.”
필센 제국에 정나미가 떨어진 상황에서 필센 제국의 강함을 강조해 안심시키는 것은 뭔가 모순적이라고 느꼈지만, 루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필센 제국군은 현재 전력이 전부가 아니에요. 증편 작업을 마치면 전력이 두 배나 늘어납니다. 그러면 모든 전선에서 대대적인 역공이 시작될 거예요. 침략자 아우로라 놈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테고, 동방 영토에 웅크리고 있던 제국군은 강하게 뛰쳐나가 아우로라 놈들의 땅을 휩쓸게 될 거예요.”
“아!”
렌커가 탄성을 질렀다.
루산의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민들에게 들려줄 만한 기쁜 소식을 확보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루산은 이왕 입을 연 김에 조금 더 풀기로 했다.
“북쪽 전선은 약간 어려움이 있는지 몰라도 남쪽 전선 - 아라드 왕국 말이에요 - 남쪽 전선은 침략한 아우로라 놈들을 항구까지 완전히 몰아붙였어요. 증편 작업이 완료된 필센 제국 남방군 1개 군단이 아우로라 연합군 3개 군단을 밀어버리더군요.”
굳이 자신의 활약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이건 최근에 들어온 생생한 정보예요.”
“와!”
“필센 제국은 강해요. 그러니 안심해도 됩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기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의도치 않게 루산은 주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필센 제국군 홍보 요원 활동을 한 뒤,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렌커를 돌려보내고 본부로 들어갔다.
보고할 내용과 결정할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