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변경 5구역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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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살벌한데요?”
바이크가 북방군 3군단 본부의 첫 느낌을 나직이 표현했다.
아라드 왕국에서 두 번이나 참전해 전쟁을 경험해 봤지만, 이런 살벌한 긴장감은 처음이었다.
아라드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치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곳에서는 레오파드를 타고 산을 넘어 독자적으로 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처럼 전선을 맞대고 대치하는 군인들의 긴장감을 느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바이크뿐 아니라 루산도 마찬가지였다.
패배의 분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필센 제국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제국 영토 안으로 적을 들일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살인적인 작업 지시를 내리는 상관에 대한 증오심.
이런 것들이 뒤섞여 뿜어져 나오는 최전선 장병들의 긴장감과 서릿발 같은 군기는 특급 에이스 파일럿조차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레오파드 열두 대가 임시 연병장에 들어서자 작업하던 장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와! 저게 바로 레오파드구나! 파워 네 대, 스피드 여섯 대, 라이트닝 한 대야!”
“슈퍼 파워, 슈퍼 스피드는 안 온 겨? 고것이 와야 아우로라 놈들의 블랙 드래곤을 쳐부술 것인디.”
“겉모양을 봐서는 그냥 파원지 슈퍼 파원지, 그냥 스피든지 슈퍼 스피든지 모른다니께. 타 봐야 아는 것이여!”
간편식 레오파드가 보급된 지 반년이 넘은 지금, 병사들은 어느새 레오파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바이크와 시에나는 기대감과 희망으로 레오파드를 쳐다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병사들을 지나며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했다.
‘그 레오파드 파일럿이 바로 나야!’
뽐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도착하자마자 그런 짓을 할 만큼 물색없지는 않았다.
잠시 후 볼프강은 루산 일행을 군단장 아이젠 자작에게 안내했고, 바이크와 시에나는 인사만 하고 나가 숙소를 배정받았다.
단 둘이 남은 군단장실에서 아이젠 자작이 루산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나.”
황궁에서 훈장을 받을 때 만났으니 1년 3개월 만이었다.
“네, 교수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내 몸은 문제없다. 전선이 문제지.”
아이젠 자작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루산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위로할 수도 없고, 격려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승리를 약속한다거나 3군단을 위해 참전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가프 용병단의 단장이라니, 변경 생활을 관두고 용병으로 전직한 것이냐?”
루산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산악 특임 기동 전대 같은 겁니다.”
“응?”
산악 특임 기동 전대는 루산이 아라드 왕국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조직 이름이었다.
“번거로움을 피하고 교육 효과를 높이려고 만들어 낸 이름이죠. 변경 파일럿이라고 하면 전선 파일럿들이 제대로 듣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똑같이 무시를 당해도 변경 파일럿보다 용병 파일럿이 진짜 전쟁 냄새를 풍겼다.
변경 파일럿은 기껏해야 도축업자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그런 것이구나.”
“네.”
“알았다. 모르는 척하겠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남쪽 전선은 어떻더냐?”
남쪽 사정을 전혀 몰라서가 아니라 직접 참전한 루산의 입을 통해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아우로라 연합군이 항구가 있는 룬드 지방까지 후퇴해 그곳에서 남방군 1군단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남방군 1군단 전력이 대단하더군요.”
“대단하다?”
“네. 군단 하나가 3개 군단 규모입니다. 오베론 가문이 미리 작심하고 키우지 않았다면 그 시점에 그 정도 규모로 증편 작업을 마칠 수는 없습니다.”
“흐음, 그 정도인가?”
아이젠 자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쪽 전선이라도 풀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적의 강력한 군세에 맞서 싸우는 북쪽 전선은 증편 작업이 지지부진해 곤란을 겪고 있는데 홀로 사전에 증편을 마친 것도 모자라 그 규모도 통상적인 제국군 규모를 넘어선다 하니, 불공정이 지나쳐도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쨌든 룬드 항까지 밀어내고 그곳에서 대치 전선을 형성했으니 아라드 쪽 전쟁은 거의 끝난 건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우로라 연합군도 병력이 아직 상당하고, 평지에서 산길을 넘어오는 적을 막아내는 형국이라 지리적 이점을 안고 싸우고 있으니까요.”
남방군은 더 우세한 멕 나이트 전력을 충분히 전개해 싸울 수가 없었다.
“특단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 한 이런 대치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루산 나름의 객관적인 상황 분석이면서 바람이기도 했다.
필센 제국이 패하면 곤란하다.
그러나 오베론 공작 가문이 큰 공을 세우면 안 된다.
“그렇군.”
“북쪽 전선은 어떻습니까?”
루산의 질문에 아이젠 자작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반격을 준비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루산도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으나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북부 전선에 투입된 정규 군단만 5개 군단 아닙니까? 게다가 수도 군단의 일부와 지방군도 상당수 동원되었고요. 증편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북부 전선 전체 병력은 우리 제국 쪽이 압도적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가 않아. 일단 증편 작업 속도가 지지부진해. 멕 나이트 공급이 북부 쪽으로 잘 이루어지지가 않거든. 한두 대씩 찔끔찔끔 들어오다가 이번에야 처음으로 상당 규모의 지원을 받은 것이야.”
“왜 그런 겁니까? 가프 마법 연구소 같은 신규 멕 나이트 메이커도 생산 시설을 크게 늘리고 있으니, 기존에 멕 나이트를 생산하던 다른 마법 연구소들은 더 빠르고 더 많이 생산 시설을 증설해 물량이 폭발할 시점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왜······?”
“멕 나이트 신규 생산 물량이 거의 다 동방으로 가고 있다.”
“······!”
처음 듣는 이야기에 루산은 깜짝 놀랐다.
“동방군과 네세베르 공략군 증편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아니, 급한 전선을 내버려 두고 왜 해외 영토의 전력을 확대한다는 겁니까?”
북부 전선이 뚫려 필센 제국 본토가 전쟁터로 변하면 백성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기울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방비를 튼튼히 한 다음에 역공을 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집을 먼저 확실히 지킨 뒤에 남의 집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군략의 기본이다.
내 집, 내 가족이 불타고 나서 남의 집을 부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황제 폐하는 비범하신 분이지. 결코 남들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어.”
황제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루산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대 세력을 그런 식으로 일거에 쓸어버리는 계책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아우로라의 병력이 오카수스 대륙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보신 것이다. 아우오라 연합국의 병력을 다 합치면 우리의 네 배가 넘는다. 아무리 우리가 잘 막아도 저쪽에서 계속 넘어오면 결국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우리가 저쪽으로 넘어가 저들의 집에 불을 질러야 한다는 거야.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도록 말이야.”
“으음!”
“처음에 굴다크 공작의 빠른 전진에 북부 동맹국이 밀렸을 때는 네세베르 공략군 편성을 뒤로 미루고 이쪽으로 병력을 추가로 보냈지만, 얼추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자 네세베르 공략군 편성을 서두르고 동방군 증편을 마무리해 아우로라 대륙에서 우리가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하신 거지.”
루산은 해외 영토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이번에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우로라 연합은 아라드 왕국에서 크게 밀리고 있음에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건가?’
충분히 가능하고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단, 북부 전선이 뚫리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하지만, 이쪽 전선이 위태로운 것 아닙니까?”
루산의 질문에 아이젠 자작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그 한정된 자원을 동방으로 투입하기를 원하시지. 그럼 북방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막아 낼 수밖에.”
“그런······!”
“그걸 해내면 능력 있는 장군이 되는 것이고, 해내지 못하면 무능한 장군인 것이지.”
아이젠 자작은 무능한 장군이 아니었다.
이스타드 왕국에서 패해 후퇴할 때에도 상당한 전력을 보존했을 뿐 아니라 이스타드 왕국의 백성들과 장병들을 지키며 물러났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병력을 휘어잡아 땅을 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해 적 멕 나이트의 전진을 악착같이 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북부 전선 전체를 책임지는 사령관이 아니라 약 6분의 1을 관장하는 군단장이었고, 강력한 굴다크 공작의 본대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지만, 조금씩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황제에게 다른 수단이 있는 건가? 3군단이나 북방군이 패해도 이를 만회할 수 있는 수단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아니면, 배수의 진처럼 그저 장병들의 분발을 기대하는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아이젠 자작의 얼굴만 봐도 북방군 3군단의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이었다.
***
“왜 허리를 끊지 않는 거죠?”
레오파드 조종시 주의할 점과 효과적인 전술을 교육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루산이 볼프강에게 물었다.
볼프강은 신설될 레오파드 전단의 선임 전대장이면서 교육생이었다.
루산이 재차 물었다.
“북부 전선은 무척 길지 않습니까? 굴다크의 병력이 이스타드 왕국을 점령하고 변경에 닿을 정도로 깊이 들어왔으니 허리를 끊거나 오베르 왕국을 점령하면 이미 상륙한 병력은 고립되는 것이 아닙니까?”
루산의 질문을 들은 볼프강이 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지휘관의 성향이 모두 같지는 않다는 것이오. 북방군 사령관께서는 모험을 싫어하시지.”
루산은 그가 상관에 대해 차마 험담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변화를 싫어하고 현상 유지에 만족하는 지휘관.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가 실패하면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에 주저하는 것이다.
물론 황제가 동방에 자원을 밀어 준다면 북방군은 지켜 내기만 해도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지켜 내는 데 성공하려면 때로는 적의 약점을 과감히 공격할 필요도 있었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뛰어난 지휘관은 아닌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우로라 연합군 병력이 너무 늘어나서 섣불리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이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필센 제국은 동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아우로라 대륙을 전란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우로라 연합은 자기 땅에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력을 이쪽으로 보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굴다크가 이끄는 아우로라 연합군 병력이 늘어나다니?
“굴다크 공작은 이스타드 왕국을 점령하자마자 변경 개발을 시작했소. 얼마나 염원하던 변경이오? 아우로라 연합에서 방귀께나 뀐다는 나라와 영주들이 변경에서 한몫 차지하려고 너도 나도 병력과 물자를 보냈지. 자기들 손으로 생산한 괴수 부산물과 가공 물자를 본국으로 무사히 돌려보내려면 길목을 잘 지켜야 하지 않겠소? 허리가 끊기면 안 되지. 그래서 중요한 접경 지역마다 우리의 공격에 대비해 멕 나이트를 바글바글하게 배치해 놓았다는 것이오.”
“하!”
루산은 어이가 없었다.
‘이 얼마나 욕망에 충실한 움직임인가!’
이런 상황을 굴다크 공작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아우로라 연합 지배자들이 벌써부터 자기 몫을 챙기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필센 제국 북방군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루산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변경이라고?’
변경을 개발해 괴수 부산물을 차지할 수 있게 되자 아우로라 연합의 병력이 꿀단지에 꼬이는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
‘그렇다면 괴수 부산물을 차지하지 못하게 만들면 흩어질 것이 아닌가?’
루산이 생각에 푹 빠져 있을 때 볼프강이 루산에게 말했다.
“···끝난 것 같소만.”
“네?”
“휴식 시간이 끝났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아, 아닙니다.”
루산은 다시 레오파드 교육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휴식 시간에 그는 바이크를 불러 지시했다.
“변경 5구역으로 가. 가서 그곳 지리에 가장 밝은 사람을 찾아 봐.”
“알겠습니다, 대장님.”
바이크는 북방군 3군단의 군용 화물 자동 마차를 얻어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다시 열차 역으로 갔다.
엉덩이가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표정을 결코 풀지 않은 채 열차를 타고 변경 5구역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