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포위되기 전에 쓰러뜨리면 됩니다
165. 포위되기 전에 쓰러뜨리면 됩니다
자동 마차 한 대가 스텐커의 사무실 앞에 멈춰 서더니 한 사람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변호사 포렌시스였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후유!”
포렌시스가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도른하임 자작이 사망했습니다.”
“아!”
스텐커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했다.
작년에 루산은 오베론 공작과 담판을 지어 사기를 당한 열두 귀족 가문에 피해를 입은 재산 가액을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피해 가문들에 그 돈을 피닉스 제철에 투자해 줄 것을 호소했다.
쫄딱 망한 가문에 갑자기 거액이 생기면 재산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고, 문제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오베론 가문이 그 엄청난 금액을 순순히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곱 가문은 루산의 말을 듣지 않고 돈만 받고 돌아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도른하임 자작이었다.
원래 나이가 많고 사기를 당한 이후 울화병에 시달려 사망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역시 그의 사후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도른하임 가문은 필센 제국 중서부의 알짜 땅을 보유하고 있었고 광산도 여럿 운영하던 터라 사기로 그 재산들을 몽땅 잃은 피해의 대가로 돌려받은 금액이 가장 많았다.
무려 350만 골드.
도른하임 자작은 사기를 당하기 전에 보유하고 있던 땅과 광산을 다시 구입해 가문의 재산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려 했으나 자식과 일가친척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전쟁 통에 땅값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는데, 무슨 땅을 삽니까? 이럴 때는 금에 투자해야죠.”
“땅이나 금이나 묻어 두는 건 마찬가지인데, 굴릴 생각을 해야지 묻어 둘 생각을 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특히 전시에는 원자재를 매점해서 가지고 있으면 100배도 넘는 이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전시에 물자를 매점한다? 그런 짓을 함부로 했다가는 정부에서 가만있지 않죠. 헐값에 나온 공장들이 많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공장을 돌려야 하는 시점이에요. 전시에 물자를 생산하는 것은 정부에서 권장하는 일이고, 농사나 짓는 것보다 최소 열 배, 스무 배의 이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도른하임 자작 가문은 매일매일 시끌시끌했다.
그럼에도 도른하임 자작은 꼬장꼬장한 인물이라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고 가문의 예전 땅과 광산들을 다시 구입해 나갔다.
그러나 잘게 쪼개진 그 땅들을 모두 다시 사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노자작은 가문의 재산을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애를 쓰다 사망해 버린 것이다.
“가문의 땅을 다시 구입하는 데 쓴 자금이 30만 골드 정도, 금을 구입하는 데에도 20만 골드 정도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이제 상속 문제가 남아 있고, 남은 재산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로 다투겠군요?”
“맞습니다. 큰아들은 유약한 인물이니 둘째 아들과 숙부들 간의 다툼이 주가 되겠죠.”
스텐커와 포렌시스는 이들 가문의 분쟁 상황을 상당히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귀족 가문 사기 피해 사건에 대해 조용히 넘어가는 대가로 오베론 가문이 지불하기로 한 액수의 총액은 무려 2,800만 골드.
그중 절반인 1,400만 골드는 즉시 지불했고, 나머지는 5년 동안 분할하여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1,400만 골드는 어마어마한 거액이라 오베론 공작 가문이 제아무리 부유하다 해도 쉽게 내줄 금액이 아니었다.
루산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강탈해 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사기 피해 가문들에 그 돈을 피닉스 제철에 투자하라고 호소했고, 그 말이 먹히지 않았음에도 가문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상업 은행과 공업 은행의 다툼이 되는 셈인가요?”
“세상 우습죠? 이런 대형 은행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다니 말이에요.”
포렌시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둘째 아들의 배후에는 상업 은행이 도사리고 있었고, 숙부들은 공업 은행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은행 모두 오베론 공작의 입김이 닿아 있었다.
공업 은행은, 예전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을 도운 일로 고위 관계자들이 잡혀 들어갔는데, 어느새 풀려나 업무에 복귀한 상태였다.
상업 은행 또한 고위 관계자들이 오베론 공작의 심복인 울름 남작과 몇 번 만난 뒤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둘째 아들이 이기든 숙부들이 이기든, 결국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이 다시 되풀이될 상황이었다.
포렌시스는 이런 거대한 권력과 싸워 어떻게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갑자기 루산이 보고 싶었다.
“기사님께 연락할 수 있습니까?”
“마지막 편지에 8구역을 떠나 모종의 일을 수행하신다고 하더군요. 여러 달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기사님께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렸다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감시하고, 추적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진행해 왔지만, 중요한 조치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할 때는 지금까지 늘 그렇게 해 왔다.
“흐음······.”
스텐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범한 의뢰를 수행하는 일반적인 관계라면 의뢰인의 명확한 요구와 지시 없이 일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
의뢰인의 의도가 확실하더라도 자칫하다가는 위험에 휘말릴 수 있는 일을 자의적으로 수행하면 안 된다.
그러나 루산과 자신은 일반적인 의뢰 관계가 아니었다.
이 위험한 사건에 깊이 개입하여 진실을 파헤치고 엄청난 보상금을 받은 순간, 이미 특별한 관계로 접어든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의뢰하고 이를 수행하는 관계를 넘어서서 삶이 총체적으로 엮인 관계.
명시적으로 주군과 가신으로 계약을 맺은 적은 없지만, 무한한 신뢰와 막대한 보상을 지급한 루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의무를 진 것이다.
“기사님의 뜻을 추정해서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요. 그게 신의에 맞습니다.”
“으음······.”
포렌시스가 신음을 흘렸다.
그 역시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싸움을 결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후유, 알겠습니다.”
루산의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루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일까?
스텐커가 말했다.
“기사님은 오베론 가문이 피해 보상금을 회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피해 가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든 오베론 가문이 강해지는 것을 막아 복수하기 위해서이든 루산이라면 사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포렌시스가 그 말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야겠죠.”
보름스 가문이 겉으로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
“변호사님은 피해 가문 사람들 중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접촉해서 배후에 있는 은행들이 무엇을 미끼로 사람들을 흔들고 있는지 파악해 보십시오.”
“탐정님은요?”
“오베론 가문과 은행 고위 관계자들의 연결 고리를 찾고,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 보겠습니다. 재무부 관리들도 훑어볼 필요가 있을 테고요.”
“음······.”
“아직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른 것은 아닌데, 관계자들을 이 사건 말고 다른 사건으로 엮어 날려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건으로 뇌물을 받았다거나 부정을 저질렀거나 말입니다. 담당자가 교체되면 최소한 시간을 벌 수 있고, 잘하면 업무 감사를 받게 될 수도 있겠지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텐커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이미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의 배후를 파헤친 경험이 있었다.
마법 연구소, 황제, 오베론 공작이 엮여 있는 사건에 뛰어들어 결국 진상을 파악해 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적, 물적 바탕이 갖춰져 있었다.
자신과 조수 두 명은 그대로였으나 사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영입한 피해 가문의 젊은 귀족들은 미행, 추적, 잠복, 자료 조사에 익숙해졌고, 몸이 비록 불편하다지만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바트 오베론이 있었다.
그가 반복해서 작성하고 있는 지난날의 행적, 주요 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록은 그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던 많은 일들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고, 배후에 펼쳐진 거대한 권력의 그림자를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물론 그가 모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배신감이 엄청나다고는 하나 아버지를 궁지에 몰아넣을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바트 오베론을 만나 봐야겠군.’
스텐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일이 많습니다. 늘 조심하십시오, 변호사님.”
“알겠습니다. 탐정님도 조심하십시오.”
포렌시스가 먼저 사무실을 나가서 자동 마차를 타고 떠났다. 조수석에는 경호원이 타고 있었다.
곧바로 스텐커가 조수 한 명과 함께 자동 마차를 타고 떠났다.
가난하여 늘 걸어 다니던 변호사와 사건 조사를 위해 낡은 마차 한 대를 가지고 있던 탐정은 어느새 자동 마차를 타고 다니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
필센 제국군 파일럿들은 변경의 파일럿들보다 훨씬 강했다. 그리고 그들로 이루어진, 규율 잡힌 군대는 더욱 강했다.
그러나 광활한 원시의 땅은 그들에게도 버거웠다.
[2, 3전대는 정면 막고, 4전대는 좌측, 5전대는 우측을 막아라! 서서히 물러난다!]
레오파드 전단이라고 일컬어지는 6전단장 울젠 남작이 마나 통신기에 대고 소리쳤다.
레오파드들이 방패 벽을 세우며 물러나자 퐁고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우오오오-!
으허허헝-!
대형 괴수의 넓적다리뼈로 만든 단단한 뼈 몽둥이가 레오파드 방패 벽을 거세게 두드렸다.
쿵쾅쿵쾅!
텅텅텅텅!
레오파드들은 뒤로 물러나면서도 때때로 마나 진동 대검으로 퐁고를 찔러 수를 줄여 나갔지만, 새로이 달려드는 개체가 훨씬 많았다.
다 큰 개체가 멕 나이트보다도 큰, 거대한 오랑우탄처럼 생긴 퐁고 무리가 마나 진동 대검으로도 잘 베이지 않는 단단한 뼈 몽둥이를 휘두르며 끝없이 밀려오는 것은 전선의 베테랑 파일럿들에게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비어슨이 잘 안다고 장담하며 이끈 광활한 숲이 퐁고의 대규모 서식지였다.
처음 한두 마리 나타났을 때는 가볍게 무찔렀는데, 점점 안으로 들어가면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어슨, 이 길로 가는 게 맞아?]
루산이 화를 꾹 참고 물었지만, 그는 횡설수설했다.
[그럼! 이쪽 봉우리, 저쪽 봉우리 사이로 난 숲길을 통과하면 된다고! 근데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 지역이 많으니 헷갈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여기가 맞을걸? 그래! 퐁고들이 이주해 왔나 봐. 원시의 땅에는 웨이브가 일어날 때가 있거든. 몇 년 전 웨이브 때 이주해 왔을 거야.]
[퐁고 무리는 웨이브에 밀려오지 않아. 이렇게 대규모 무리가 웨이브에 휩쓸린다고? 이건 오랫동안 퐁고의 서식지였던 땅이라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루산은 비어슨을 혼낼 시간도 아까웠다.
퐁고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싸우다가는 전멸할지도 몰라!’
루산은 할 수 없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단장님, 퐁고는 우두머리를 해치우면 두려워서 달아납니다.]
[우두머리가 어디에 있소?]
[숲이라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고? 지금 장난하는 거요?]
[서서히 물러나십시오. 퐁고 무리를 초지로 끌어내는 겁니다. 우두머리가 그 뒤쪽에서 따라올 겁니다. 그때 1전대를 뒤로 먼저 빼서 숨겨 두고 초원으로 죽 빠지십시오. 1전단과 함께 우두머리를 치겠습니다.]
[흐음, 알았소!]
루산은 시에나, 바이크와 함께 1전대에 합류해 먼저 빠져 나와 비어슨이 말한 두 봉우리 뒤쪽에 반씩 나눠 매복했다.
숲속에서 은은히 울리던 퐁고들의 괴성과 전투의 소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4개 전대 멕 나이트들이 일방적으로 두드려맞는 형세로 뒤로 물러나며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퐁고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개미 떼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컸지만, 퐁고 무리는 마치 개미 떼처럼 밀려왔다.
볼프강이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저 많은 무리 사이에서 우두머리를 친단 말이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루산이 봉우리에서 전방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우두머리가 어디 있소? 다 그놈이 그놈 같은데?]
[기다려 보죠.]
[흐음······.]
마침내 6전단이 계속 두드려맞으며 물러나 두 봉우리 사이를 통과했다.
퐁고들도 두 봉우리 사이를 지나 계속 6전단을 추격했다.
잠시 후 숲 속에서 다른 퐁고들보다 확연히 덩치가 큰 녀석들이 나왔다.
[왔습니다!]
그런데 우두머리와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퐁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덩치가 좋은 퐁고들이 마치 근위대처럼 우두머리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저걸 치다가 오히려 우리가 포위당할 것 같은데?]
볼프강이 말에 루산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포위되기 전에 쓰러뜨리면 됩니다.]
[허!]
볼프강은 어이가 없었다.
이것은 작전의 개념이 아니었다.
내가 맞기 전에 때리면 된다, 내가 찔리기 전에 찌르면 된다는 말을 작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산 외에는 퐁고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루산이 소리쳤다.
[가자!]
[네, 대장님!]
레오파드 스피드, 레오파드 파워, 레오파드 라이트닝이 먼저 봉우리 허리를 돌아 달려 내려갔다.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볼프강이 눈썹을 꿈틀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명령을 내렸다.
[1전대, 덩치 큰 괴물 놈의 목을 쳐라!]
[예스, 커맨더!]
두 봉우리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레오파드 30대가 일제히 달려 내려갔다.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츠쿵-
퐁고 우두머리가 그 광경을 보고 괴성을 질렀다.
우오오오-!
퐁고들이 따라서 소리를 질렀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퐁고들의 함성이 원시의 땅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