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당신은 좋은 파일럿이야
166. 당신은 좋은 파일럿이야
멕 나이트가 등장하기 전, 변경의 사람들이 오거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이족 보행 괴수 퐁고.
단일 개체로는 최강이 아닐지 몰라도 대형 괴수의 넓적다리뼈를 휘두르며 원시의 땅에 사는 수많은 괴수들을 몰이사냥 하는 최상위의 포식자.
그 퐁고들이 긴 팔을 앞다리처럼 짚으며 네 발로 빠르게 돌진해 멕 나이트 방패 벽에 충돌하고, 그 직후 몸을 일으켜 쥐고 있던 뼈 몽둥이를 휘둘렀다.
터덩텅텅!
[대형 유지해!]
2, 3, 4, 5전대의 레오파드들은 대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그때 방금 지나온 지점 양쪽 봉우리에서 1전대 레오파드들이 일제히 달려 내려가 이제 막 숲에서 나온 퐁고 무리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퐁고 무리들도 레오파드를 향해 달렸다.
[우두머리를 처치하기 위해 1전대가 움직였다! 힘을 내라!]
루산이 탑승한 레오파드 스피드는 가장 먼저 봉우리에서 내려와 선두로 질주했다.
중량이 가볍다 보니 속도가 매우 빨랐지만, 루산은 조금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익숙해진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에 비해 엔진 출력이 약하다 보니 속도는 물론이고 바닥을 디딜 때도 힘차게 박차고 나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에 비해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지 퐁고를 상대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퐁고는, 대규모 무리를 지었을 때가 두려운 것이지 한 마리, 한 마리가 겁이 나는 괴수는 아니었다.
멕 나이트 등장 이후, 인간의 영역 가까이 있던 퐁고 서식지가 모두 사라진 것만 봐도 멕 나이트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종인 것이다.
우허어어엉!
덩치 큰 퐁고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레오파드 스피드는 두 팔로 마나 진동 대검을 굳게 쥐고 검신을 오른쪽 어깨 뒤로 붙인 채 달리는 힘을 이용해 퐁고의 오른쪽 팔을 가볍게 그으며 지나갔다.
스륵!
퐁고가 앞으로 나뒹굴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우허허헝-!
레오파드 스피드는 결코 달려오는 퐁고와 정면충돌하지 않았다.
퐁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해 검을 강하게 휘두르지도 않았다.
충돌 직전에 바닥을 박차고 오른쪽, 왼쪽으로 피하며 어깨 가까이 밀착한 대검으로 슥 그으며 지나갈 뿐이었다.
일대일로는 결코 지지 않는 싸움이지만, 파일럿의 체력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퐁고처럼 무리를 짓는 괴수와의 싸움에서는 체력을 아끼는 것이 중요했다.
우오오오-!
루산이 슬쩍슬쩍 베고 지나간 퐁고들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을 하고, 루산은 그런 녀석들을 뒤로 한 채 계속 달렸다.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퐁고들 사이를 지그재그 돌파해 나가는 레오파드 스피드.
확실히 몸체가 가볍지 않다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지만, 몸체가 가볍다 하여 누구나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뒤따라오던 1전대 파일럿들은 혀를 내둘렀다.
[헉헉! 정말 대단하구나! 레오파드의 기동성을 극한으로 발휘하고 있어!]
[군단장님이 왜 용병 나부랭이를 치켜세우시나 했더니 확실히 움직임이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어!]
시에나가 탑승한 레오파드 파워나 바이크가 타고 있는 레오파드 라이트닝도 움직임이 가볍고 날카로웠다.
지난 몇 년 동안 레오파드를 몸의 일부처럼 움직여 왔기 때문에 레오파드를 조종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파일럿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에나와 바이크는 루산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벌리면서 뒤를 따라갔다.
좌우에서 달려드는 퐁고들을 저지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마침내 루산은 다 자란 퐁고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거대한 퐁고에게 다가갔다.
근위대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퐁고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녀석들 사이를 지나갈 틈이 없었다.
루산은 전진하다 말고 뒤로 물러났다.
우두머리를 에워싼 퐁고들이 괴성을 지르며 우르르 몰려왔다.
[내가 녀석들을 끌어들일 테니 너희들이 우두머리를 처리해!]
[네, 대장님!]
루산은 맨 앞에 달려오는 퐁고를 한 칼씩 먹이며 뒤로 물러났다.
퐁고들은 쓰러진 동족의 몸뚱이를 타 넘으며 악착같이 달려들었지만, 레오파드 스피드는 아슬아슬하게 녀석들의 돌격과 몽둥이질을 피해 물러났다.
그 사이 1전대 레오파드들이 합세해 루산의 레오파드가 상대하던 퐁고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우허허허헝-!
그때 우렁찬 퐁고 우두머리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어지간한 마나 진동 대검보다 훨씬 긴 거대 괴수의 뼈를 휘두르며 가까이 다가온 시에나와 바이크의 레오파드를 때려 부수려 했다.
바위도 깨부술 만한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괴수에게나 통하는 공격이지 시에나에게는 그리 위협이 되지 않았다.
시에나는 오히려 우두머리 몸통으로 더욱 밀착해 내리치는 팔을 방패로 막고 높이 쳐들었다.
퐁고 우두머리의 팔이 높이 들리고 겨드랑이가 열리자 바이크가 냉큼 마나 진동 삼지창으로 강하게 찔렀다.
푹!
퐁고 우두머리가 고통에 찬 괴성을 질렀다.
으허어어어엉-!
산천초목을 뒤흔든 비명에 6전단을 공격하던 퐁고들이 놀라 추격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우두머리가 팔을 휘두르자 손끝에 걸린 레오파드 라이트닝이 붕 날아가 쓰러졌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러나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어서 레오파드 라이트닝은 냉큼 일어나 다음 공격을 피했다.
시에나는 퐁고 우두머리가 바이크를 공격하느라 몸을 돌려 등을 보이자 두툼한 목뒤를 마나 진동 대검으로 재빨리 찔렀다.
찰나의 순간 질긴 가죽이 마나 진동 대검의 날카로운 검첨에 저항하다 찢어지고 검신이 깊이 꽂혔다.
푹!
뒷목을 찌르고 이마에서 튀어나온 마나 진동 대검.
퐁고 우두머리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거대한 기둥이 쓰러지듯 그대로 앞으로 넘어갔다.
쿵!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퐁고들이 두려움에 감싸여 비명을 지르며 돌아나기 시작했다.
으허허헝-!
우어어어-!
동료가 쓰러져도 달려들던 광기 어린 행동은 어디 가고 겁에 질려 미친 듯이 숲속으로 달아나는 퐁고들의 모습에 6전단 파일럿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우두머리가 쓰러졌다고 이렇게 된다고?]
[허 참! 이거야 원······.]
그때 비어슨이 루산에게 마나 통신을 걸어왔다.
[근데 말이야.]
[응?]
[쓰러진 퐁고 생명 구슬 좀 채취해도 될까?]
[뭐라고?]
[부산물 작업을 제대로 다 할 수는 없어도 생명 구슬은 채취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이대로 놔두고 가면 아깝잖아.]
[하!]
루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길잡이가 길을 제대로 안내하지 못하고 대규모 퐁고 서식지로 들어가 큰일이 날 뻔했다면 아무리 고가의 괴수 부산물에 눈이 돌아간 변경 파일럿이라 해도 제국군 기사들에게 눈치가 보여 생명 구슬을 채취한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면서 비어슨을 지켜보니 정상적인 상황 파악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어딘가 모르게 얼이 빠져 있는 사람 같았다.
말이 많은데 조리가 없고 횡설수설하는 것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후유!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두드려 맞는 광경을 자주 봐서 충격을 받아 정신에 좀 문제가 생겼나?’
남의 사정을 봐줄 상황은 아니었지만, 루산은 그런 생각이 들어 비어슨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혼을 내거나 야단을 쳤을 때 원한을 품고 나쁜 길로 안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루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비어슨에게 차분히 말했다.
[나야 그렇게 해 주고 싶지만, 북방군 파일럿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퐁고 우두머리가 쓰러졌을 때 얼른 숲을 통과해야 해.]
[아! 맞아! 새로운 우두머리가 금방 생길 테니까!]
루산을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비어슨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금방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 많은 녀석들을 놓고 가기는 아까운데······.]
어린 소년 같은 집착.
루산도 변경 파일럿으로서 충분히 이해했다.
[너는 북방군 파일럿들을 이끌고 먼저 숲을 통과해. 내가 생명 구슬 채취한 뒤에 따라가서 건네줄 테니까.]
[정말? 이 많은 생명 구슬을 나한테 다 준다고?]
[그래. 길안내만 제대로 해 줘.]
[와! 당신은 좋은 파일럿이구나!]
루산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생명 구슬을 어떻게 채취하는 줄 알아?]
루산은 대답 대신 마나 진동 대검으로 쓰러져 있는 퐁고의 가슴을 갈라 레오파드 스피드의 두 팔로 쩍 벌린 다음 능숙하게 생명 구슬을 꺼냈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파일럿들은 정비 문제로 멕 나이트에 피나 오물이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루산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비어슨이 좋아했다.
[와! 솜씨가 좋네.]
루산은 레오파드 스피드가 들고 있는 생명 구슬을 비어슨의 아이언 워리어에 건네주며 말했다.
[자, 됐지? 내가 채취해서 너한테 넘겨줄 테니까 빨리 통과해. 숲이 다시 막히기 전에.]
[좋아! 걱정 말라고!]
비어슨은 아이언 워리어의 허리에 차고 있는 그물망 주머니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퐁고의 생명 구슬을 넣고 큰소리쳤다.
허리에는 그물망 주머니를 차고, 등에는 거대한 철제 바구니를 메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이언 워리어의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됐으나 루산은 왠지 이제 저 넝마주이 같은 중고 멕을 타고 있는 길잡이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단장님, 길잡이를 따라 빠르게 숲을 통과하십시오. 지체하다가는 다시 퐁고 무리에 둘러싸일 수 있습니다.]
[알겠소. 그런데 객원 참모는?]
[잠시 지형을 조사하고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복귀할 때를 생각해서요.]
[흐음, 알았소. 늦지 않게 오시오.]
[네.]
비어슨의 아이언 워리어가 앞동산 산책하듯 유유자적 숲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레오파드 스피드, 파워, 라이트닝 150대가 각종 물자를 싣고 있는 멕 워커 30대를 호위해 그 뒤를 따라 숲속으로 사라졌다.
6전단 멕이 모두 보이지 않게 되자 루산이 말했다.
[자, 작업하자. 서둘러.]
쓰러져 있는 퐁고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레오파드 스피드, 레오파드 파워, 레오파드 라이트닝. 각기 다른 세 대의 레오파드는 전쟁터의 시체를 터는 패잔병들처럼 퐁고의 몸에서 생명 구슬을 털었다.
한참을 작업하던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대장님, 근데 저 비어슨이라는 사람 믿어도 될까요? 누가 데려왔는지 몰라도 참······.]
평소 말이 많은 바이크가 못 들은 척 입을 꾹 다물고 퐁고 생명 구슬 채취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비어슨이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도움이 안 되더라도 상관없어. 좀 돌아갈 뿐이지. 처음으로 아라드 왕국 변경에 갔을 때처럼 높은 곳에 올라 지형을 살피며 가면 돼.]
루산은 그렇게 시에나와 바이크를 안심시켰다.
[너희들도 이번 기회에 지도 작성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도 지형을 눈여겨 봐.]
[네, 대장님!]
[예스, 커맨더!]
바이크가 유난히 크게 대답해 루산과 시에나가 피식 웃었다.
그들은 서둘러 퐁고의 생명 구슬을 채취했다.
그런 뒤 6전단을 따라가기 위해 숲속을 달렸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같은 원시의 거대 침엽수들이 잔뜩 자라 있는 광대한 숲이었지만, 멕 나이트가 지나간 자리는 흔적이 남아 따라잡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루산 일행이 숲을 중간쯤 통과했을 때 퐁고들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산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레오파드 스피드의 대검을 몸에 가까이 대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퐁고들을 슥 그으며 돌파해 나갔다.
시에나는 굳이 퐁고를 쓰러뜨릴 생각이 없어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루산의 뒤를 따랐고, 바이크는 퐁고보다 훨씬 날렵하게 레오파드 라이트닝을 조종해 숲을 통과했다.
한춤 후 그들은 숲을 완전히 통과한 뒤 잠시 쉬고 있는 6전단과 합류했다.
루산은 퐁고의 생명 구슬이 가득 들어 있는 그물망 주머니를 비어슨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잘해 주었다, 비어슨. 앞으로도 잘 부탁해.]
비어슨이 그물망 주머니를 아이언 워리어의 등에 있는 철제 바구니에 담으며 말했다.
[당신은 좋은 파일럿이야. 걱정하지 마. 이스타드 변경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될 테니까.]
비어슨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지만, 루산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좋은 파일럿이 되지 않으면 이 원시의 땅에서 정말 전멸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자신이 변경과 원시의 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겠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 같았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비어슨이 목동처럼 앞장서서 길을 이끌었다.
6전대는 양 떼처럼 그 뒤를 따라갔다.
광활한 원시의 땅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정신이 약간 이상한 것 같은 비어슨뿐이었다.
루산은 이제 비어슨을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이크, 시에나와 함께 지형을 철저히 살피고 틈틈이 지도를 작성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