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혼자서 다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167. 혼자서 다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마나 등이 희미하게 밝혀진 실내.
비쩍 곯은 몸, 얼굴을 뒤덮은 수염과 머리카락으로 인해 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남자가 철창 안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느라 펜을 멈추자 철창 밖에서 노려보고 있던 중년의 사나이가 말없이 몽둥이로 쇠창살을 두드렸다.
텅텅텅!
한시도 쉬지 말라는 뜻이었다.
철창 안의 남자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고는 얼른 다시 무언가를 써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덜컹 열리고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 소리의 주인, 스텐커가 입을 열었다.
“루트 오베론.”
“예!”
비쩍 곯은 남자, 루트 오베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냉큼 대답했다.
직접 가혹 행위를 하지는 않지만, 말 한마디로 때리게 만들기도 하고 굶기기도 하고 헐벗게 만들기도 하는, 이 사설 감옥소의 왕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가져와.”
“예!”
루트는 그동안 작성한 종이를 철창 사이로 내밀었다.
스텐커가 그것을 받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흐음······.”
마뜩지 않은 목소리.
스텐커는 종이를 좍좍 찢었다.
루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오늘도 남방군 파일럿들에게 던져질 것만 같았다.
매타작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음은 아직 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정직한 몸은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니었다.
스텐커가 말했다.
“눈 가리고 데리고 나와.”
“네.”
스텐커의 조수와 루트를 감시하던 남방군 출신 파일럿이 철창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루트는 발버둥을 쳤지만, 몸이 워낙 말라서 힘도 없고 가벼워 저항이라는 말도 무색했다.
게다가 남방군 출신 파일럿은 거동이 불편해 보였으나 루트 정도는 한 손으로도 제압이 가능할 정도로 강한 신체의 소유자였다.
“날 어쩌려는 것이오? 협조하면 살려준다고 했잖소!”
팔을 붙들린 채 눈이 가려진 루트가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군. 입을 막아.”
“알겠습니다.”
조수가 천으로 입을 막았다.
“태워.”
“네.”
“으으읍!”
루트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틀었지만, 질질 끌려 집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방군 파일럿 두 사람이 루트의 팔을 한 쪽씩 잡고 자동 마차 뒷좌석에 태운 뒤 달아나지 못하도록 양쪽에 앉았다.
이윽고 스텐커와 조수가 탔다.
운전대를 잡은 조수가 자동 마차를 몰아 집 밖으로 나가자 남아 있던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문을 닫았다.
루트는 두려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오랫동안 갇혀 지내다 정말 오랜만에 외출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이놈들아! 협조해 왔잖아!’
“으으으읍!”
입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절절한 몸짓만으로 그의 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방군 파일럿들은 루트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양쪽에 앉은 두 사람이 루트 쪽으로 밀착하자 그는 정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루트를 속박한 채로 자동 마차는 한참 동안 달렸다.
그러다 속도를 점점 늦추더니 멈추었다.
스텐커의 손짓에 남방군 파일럿 하나가 루트의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을 풀어 주었다.
루트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이 잘 가꿔진 공원 옆에 있는 고급스러운 건물의 정문이 보였다.
왠지 눈에 익었다.
잠시 후 잘 차려입은 귀족 소녀들이 재잘거리며 몰려나왔다.
정문 앞에 서 있던 시녀들이 소녀들을 데리고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마차와 자동 마차로 데려갔다.
루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딸이 다니는 학교였던 것이다.
루트가 다시 발버둥을 쳤다.
“으으으읍!”
‘어쩌려는 것이냐! 이놈들아!’
그때 정문을 주시하고 있던 스텐커가 손가락으로 이제 막 교문을 나온 소녀를 가리켰다.
소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시녀를 보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레타!’
“으으으읍!”
오랜만에 딸의 얼굴을 본 루트가 눈물을 흘리며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두 남방군 파일럿 사이에서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녀와 함께 자동 마차로 이동하던 그레타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스텐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제대로 협조할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겠군. 가자.”
“네.”
조수가 자동 마차의 시동을 켜고 서서히 움직였다.
남방군 파일럿들이 루트의 눈을 다시 가렸다.
어둠 속에서 딸의 환한 얼굴이 더욱 부각되자 루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사설 감옥 안에서만 지내다 밝은 세상에 나와 딸의 얼굴을 직접 보니 미칠 것 같았다.
이놈들이 딸에게 해코지할까 봐 두렵고, 다시는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속인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작년에 잡혀 들어갔던 공업 은행 관계자들이 다 풀려나 활동을 재개했더군. 다시 또 사기를 치고 있단 말이야. 당연히 네 아버지가 풀어 줬겠지. 그자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휘어잡아 왔는지, 자세히 알고 싶어.”
“으으으읍!”
“대강의 내용 말고 아주 자세한 내용이 필요해.”
“으으우우!”
“기억이 안 나면 곤란할 거야.”
“으어어어!”
루트는 한없는 무력감과 두려움에 눈물을 철철 흘렸다.
눈을 가린 천이 축축하게 젖었다.
“아 참! 네 형이 남쪽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더군. 승승장구하는 모양이야. 네 아버지나 형이나 네 존재를 기억하기는 할까?”
“······!”
그날 다시 사설 감옥으로 돌아간 루트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써 나갔다.
***
필센 제국의 북쪽 국경은 동서로 길게 뻗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 넓은 골짜기와 완만한 고개들을 통해 남쪽 필센 제국과 북쪽의 동맹국 사람들이 왕래해 왔는데, 지금은 그곳들이 필센 제국군과 아우로라 연합군이 대치하는 전선이 되었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거대한 산맥은 서쪽으로 더 뻗어 나가 인간의 영토뿐 아니라 원시의 땅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그래서 필센 제국 변경 5구역에서 이스타드 왕국 변경으로 가려면 산맥을 빙 돌아가야 했다.
서쪽으로 쭉 갔다가 산맥이 낮아지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다시 동쪽으로 쭉 가야 하는 것이다.
산맥이 낮아지는 지점까지 가 봤다는 사람은 비어슨이 유일했다.
그만큼 산맥은 길었고, 그래서 비어슨을 데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야영지에서 모닥불 옆에 앉아 있던 비어슨이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바닥에 선을 죽 그으며 말했다.
“중간에 북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있거든.”
“정말이야?”
바이크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루산 일행이 6전단의 눈총을 받는 이유는 길잡이 비어슨 때문이고 비어슨을 데려온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거리와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럼! 설마 나를 못 믿는 거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확인 차원에서 물어본 거지.”
“뭐, 알았어. 그런데 그 길이 멕 나이트가 지나갈 만한 길인 건 맞지만, 조금 까다롭지.”
그러면서 비어슨은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 앞에 흙을 반반하게 고른 뒤 나뭇가지로 그림을 크고 자세히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좁은 골짜기를 지나면 산맥 안에 지대가 낮아지는 넓은 지역이 나와. 커다란 호수도 있고 호수 옆에 울창한 숲도 있지. 그 땅을 통과해서 북쪽 좁은 골짜기로 나가면 산맥을 통과하는 거야. 나만 아는 괴수들의 천국이지. 히히히!”
“괴수들의 천국?”
“응. 엄청 많거든.”
비어슨이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이 산맥을 경계로 기후가 확 달라져. 겨울에는 더 엄청나지. 여기도 춥지만 북쪽은 말도 못하게 춥단 말이야. 그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괴수들은 떼를 지어 남쪽으로 이동을 하는데, 녀석들이 이곳을 통과해서 남쪽으로 내려온단 말이지. 날이 풀리면 다시 이곳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고. 알겠어?”
“아!”
“어떤 괴수들은 여기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3구역이나 7구역까지도 내려갈 거야. 그러다 웨이브도 일으키고.”
“웨이브를 일으킬 정도라고?”
“그럼! 놈들이 원시의 땅을 이동할 때는 흙먼지가 하늘을 덮는다니까! 무시무시한 파도처럼, 해일처럼 이동하는 거야. 엄청나지? 사실 파도나 해일을 본 적은 없어. 난 변경에서 태어나서 이 땅을 벗어난 적이 없거든. 히히히!”
괴수의 연쇄적인 대규모 이동, 웨이브의 원인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비어슨이 웨이브을 일으키는 원인 하나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것도 마치 직접 목격한 것처럼.
루산은 그 이야기 역시 궁금했지만, 그것은 나중에 듣기로 했다.
“그래서 그 괴수들의 천국이라는 지역을 통과하면 된다는 건가? 그런데 그게 까다롭다고?”
“응. 그런 좋은 길목에는 당연히 사냥꾼들이 지키고 있지 않겠어? 아! 사람은 아니야. 여기까지 와 본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말한 사냥꾼은 괴수야. 어마어마한 녀석들이 살고 있지.”
“오!”
바이크와 시에나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초봄이나 늦가을이라면 절대 통과하지 못할 거야. 그때는 이동하는 괴수들의 물결에 휩쓸려 버릴 테니까. 무시무시한 사냥꾼 녀석들도 한창 물이 올라 있고 말이야. 다행히 지금은 여름이잖아. 괴수의 대이동이 없는 계절이거든.”
“흐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지. 사냥꾼 녀석들은 여전히 거기 머물고 있으니까. 그 좋은 장소를 두고 다른 데로 갈 리가 없잖아. 히히히!”
말만 들어도 무척 위험한 장소인 것 같았다.
루산이 물었다.
“괴수들의 천국을 가로지르는 것과 산맥이 끝나는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것은 시간 차이가 얼마나 날까?”
“글쎄? 적어도 한두 달은 차이가 나겠지?”
변경 5구역에서 이스타드 변경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달이 아니라 두 경로의 시간 차이가 최소 한 달이다.
변경 5구역에서 산맥 끝을 돌아 이스타드 변경까지 가려면 두 달도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원시의 땅을 한 달 넘게 가다 보면 어떤 위험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괴수들의 대이동 통로를 통과하는 게 낫겠군.’
루산은 그렇게 결정했다.
그때 시에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비어슨에게 물었다.
“근데 이 멀리까지 혼자서 사냥을 다녔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시에나는 변경 8구역에 들어온 이후 혼자서 사냥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3인 1조가 기본, 최소 2인 1조였다.
멕 나이트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늘 두 대 이상 다녔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위험한 원시의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혼자 다닌다는 말인가?
그러나 루산은 비어슨이 왜 혼자서 다니는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 역시 변경 1년 차부터 원시의 땅 깊숙이 정찰하는 임무를 혼자서 수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귀족 물이 덜 빠져 미움을 받던 시절, 델타 기지 캡틴 트리어는 규정과 무관하게 변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초짜 파일럿을 위험한 임무로 내몰았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일, 그게 바로 변경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괴수의 생태와 해부학을 공부했고, 홀로 무시무시한 괴수들을 사냥해서 생명 구슬과 뼈와 이빨과 발톱과 기타 값나가는 부산물을 가죽에 꽁꽁 싸매 멕 나이트 어깨에 잔뜩 짊어지고 돌아왔다.
비어슨과의 차이가 있다면 루산은 멕 나이트 등에 멕 워커가 지고 다니는 철제 바구니를 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살아남았기에 망정이지 증오와 원망이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 짐작해 보건데 비어슨은 따돌림을 당한 지 몇 년은 돼 보였다.
루산은 굳이 비어슨을 위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시에나의 질문을 듣고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그를 보고 말했다.
“혼자서 다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능력이 있으니 혼자서 원시의 땅을 누빌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덕을 보고 있는데.”
시에나는 루산이 자신을 꾸짖었다고 생각해 당황했다.
“저는 단지······.”
“그 얘기는 그만하고.”
“···네.”
시에나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산은 비어슨을 쳐다보고 물었다.
“괴수들의 천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도와줄 수 있겠어?”
“그, 그럼!”
“잘 부탁해.”
“어? 어! 히히히!”
비어슨이 웃자 루산도 희미하게 웃었다.
바이크는 루산과 비어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불티를 일으키며 타들어 갔다.
불티는 하늘로 솟아오르다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원시의 땅에서 올려다본 여름의 밤하늘에는 불티가 올라가 박힌 것 같은 별들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