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혼자는 못 사는 법이야
169. 혼자는 못 사는 법이야
자세한 설명은 스텐커가 맡았다.
“공업 은행장과 상업 은행장을 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베론 가문은 이용할 만한 사람의 약점을 쥐고 있더군요.”
정확히 말하면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을 진행한 루트 오베론이 이용할 사람의 약점을 쥐고 있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약점이 있는 사람을 포섭해 일을 진행했다.
사실 오베론 가문의 이름값이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지간해서는 협조를 했겠지만, 반란과 관련된 자금 마련과 중요 거점 확보를 위해 워낙 크게 판을 짜다 보니 조금도 소홀할 수 없어 배신하지 못할 사람을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공업 은행장은 비리 백화점이더라고요. 오베론 가문에서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은행장이 아니라 오래전에 죄수가 되었을 겁니다. 그것도 종신형으로 평생 감옥에서 썩었을 사람이지요. 고객 돈, 은행 돈을 건드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 정도예요?”
“그 정도 되니까 휘어잡아 귀족 가문을 사기 치는 일에 가담시킨 것이죠.”
바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통이 큰 작자인지 오베론 가문에서 귀족 가문들의 재산을 그런 식으로 쭉 빨아먹는 것을 보고 스스로 몇 군데 작업을 했더군요.”
“오베론 가문이나 마법 연구소와 무관하게요?”
“네. 물론 덩치는 귀족 가문들보다 작지만, 상당히 규모가 큰 우량 사업체들을 과대 대출로 엮어서 파산시키고 헐값에 낙찰되게 만들어 차명으로 인수한 뒤 몇 단계 거쳐 세탁해서 팔아먹은 모양이에요.”
“어휴······.”
바덴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그 사건들로 엮어 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 상업 은행장은 공업 은행장보다는 약하지만 몇 가지 확실한 약점이 있어요. 두 사람을 쳐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잘하면 은행 감사로 연결시킬 수도 있고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사기 피해 가문들에 다시 작업을 걸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스텐커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런 자들이 은행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재무대신이 있었어요. 실제로 귀족 가문 사기 사건에서도 은행장의 무리한 지시에 의아해하고 주저하던 일선 지점장들을 재무부 관리들이 방문해 안심시킨 적이 있지요. 결국 재무대신을 함께 쳐내지 못하는 한 은행장들만 처리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지금의 은행장들을 다른 사건과 엮어 감옥에 집어넣더라도 새로운 은행장 역시 비슷한 사람이 앉아 비슷한 일을 해 나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무대신이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을 뒤에서 도왔다 해도 여전히 바덴은 재무대신을 쳐서 끌어내린다는 이야기가 도저히 와닿지 않았다.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 시도를 하다가 돌아올 후환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동안 열정과 젊음을 바쳐 쌓아 올린 사업들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이 떠올랐다.
평민 여성으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복잡한 심경이 뒤섞여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스텐커가 말했다.
“재무대신을 무너뜨리는 것은 단지 사기 사건을 막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그럼요?”
“공작과 황제 사이에 불화를 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공작이 사기 피해 보상금 회수 같은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겠지요.”
“······!”
너무 놀라 바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재무대신은 대표적인 황제파로 알려져 있지만, 오베론 공작과도 매우 친분이 두텁습니다. 이전 대전쟁 때 동방에서 오베론 공작과 같은 전선에서 싸운 전우라고 하더군요.”
“처음 듣는 얘기네요.”
바덴도 벌써 여러 해 사업을 해 오면서 고위 관리나 고위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재무대신과 오베론 공작의 친분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굳이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때는 거의 모든 귀족이 대전쟁에 참전했고, 그 당시 재무대신은 그리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대전쟁이 끝난 뒤에는 오베론 공작과 황제 사이에 알력이 있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으니 굳이 친분을 내세워서 좋을 일이 없었겠지요.”
바덴은 스텐커가 그런 내밀한 친분까지 알아낸 것이 놀라웠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그래서요?”
“여하튼 친분이 상당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원래 은행은 재무부 관할이 아니었답니다. 상무부 담당이죠. 그런데 과거 오베론 공작이 농지법과 은행법 개정을 추진할 때 국가 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재무부 관할로 바꾼 겁니다. 그 즈음에 지금의 재무대신이 자리에 앉았고요.”
말하자면 재무대신은 황제파로 알려져 있지만, 오베론 공작 쪽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황제와 오베론 공작의 불화가 아우로라 연합을 속이고 반란 세력을 한꺼번에 소탕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 해도 그 사이 두 사람의 사이가 세상의 시각만큼은 벌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포렌시스가 스텐커의 말을 받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지금의 상무대신은 이반 황제의 평민 우대 정책 실시 이후에 대학을 졸업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오롯이 황제파 사람이야. 우리 노바 대학 선배이기도 하고. 게다가 귀족 가문 사기 사건 이후에 임명된 사람이지. 의욕이 대단하고 욕심이 많아. 그에게 재무대신의 부정에 대한 정보를 흘려주고 은행이 옛날에는 상무부 관할이었다는 사실을 슬쩍 언급하기만 해도 기꺼이 재무대신을 치는 데 앞장서지 않을까? 모든 관리는 자신의 권한이 커지는 걸 바라거든.”
“으음······.”
바덴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황제와 오베론 공작의 불화는 15년 넘게 이어진 이야기야. 갑자기 재상이 되었다고 해소되지 않아. 정부 내에서도 오히려 의아해하고 의심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많지. 건수만 던져 주면 물어뜯으려는 사람이 제법 많을 거야.”
“그렇기는 하죠.”
“상무대신이든 다른 관리든 재무대신을 공격했다고 쳐. 그렇게 해서 실제로 황제가 재무대신이 경질한다고 해 보자고. 그러면 공작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질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논의가 오가는 것만으로 공작은 황제가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할 거야. 원래 정부 관리들 대부분이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는데 황제마저 그런다? 다른 일에 신경 쓸 수가 있겠어?”
바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텐커와 포렌시스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귀족 사기 사건 피해 보상금을 다시 사기 쳐 빼앗으려는 시도를 막고, 오베론 공작이 이쪽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도록 황제와 공작 간의 갈등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계획은 이해했으나 너무나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이것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기에는 너무나 과도한 계획이 아닌가?
황제와 공작의 다툼이 어떤 양상으로 일어날지 예측이 불가능한 부분이 아닌가?
재무대신이 경질되어도 황제와 공작 사이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법을 전공한 바덴은 스텐커와 포렌시스의 계책을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이것은 과잉 대응이었다.
명백한 정치 행위였다.
음험하고 무서운 정략이었다.
이 두 사람이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맞나 싶었다.
루트 오베론이 쥐고 있던 정보와 그의 일처리 방식을 알게 된 스텐커가 포렌시스와 상의해서 짜낸 계책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바덴은, 스텐커와 포렌시스가 무섭고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음험한 방법으로 타인의 재산을 빼앗은 것은 오베론 공작이 먼저라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루산 보름스의 의도에 부합하는 일일까?’
루산이 부재중일 때 그의 재산을 지키고, 그의 힘 - 비록 잠재적 세력일지라도 - 을 지키기 위해 그의 적을 선제적으로 친다.
그 방법이 음험한 정치적 모략일지라도.
‘아!’
바덴은 원치 않았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쳐야 한다, 그거죠?”
“맞아!”
“맞습니다.”
“알았어요. 해 볼게요!”
바덴은 결국 위험한 정치의 바다에 발을 들이기로 했다.
***
“위험하지 않겠소?”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쪽으로 가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게다가 두 달이라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으음!”
6전단장 울젠 남작은 결국 비어슨이 괴수들의 천국이라고 부르는 괴수들의 대이동 통로를 지나기로 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장점이었다.
그리고 원시의 땅에서는 길잡이의 안내를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위험은 루산이 어느 정도 해소해 준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북방군 3군단 6전단은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뒤를 따르는 아이들처럼 거대 산맥의 작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굽이굽이 골짜기를 돌아 북쪽으로 얼마쯤 지나자 놀랍게도 넓게 트인 땅이 나타났다.
호수도 있고, 숲도 있고, 늪도 있다는 비어슨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무시무시한 사냥꾼들도 있었다.
[저게 뭐야?]
노련한 전선의 파일럿들도 처음 보는 거대 포식자를 대면하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변경에 익숙한 루산 일행도 놀랐다.
[세상에! 대장님, 바실리스크가 저렇게 커도 되나요?]
[대체 얼마나 잘 먹고 살았던 거야?]
성체 바실리스크의 크기가 8군단 변경에서 본 것보다 1.5배는 더 커 보였다.
한가롭게 나무 그늘에 누워 자고 있던 바실리스크들은 대이동의 계절도 아닌데 남쪽에서 무리 지어 올라오는 낯선 이족 보행 괴수 - 멕 나이트들을 보고 경계하다 시험 삼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높은 바위 위에서 껑충 뛰어 내리면 무게에 눌려 멕 나이트가 쓰러지고, 워낙 날래 제대로 공격을 가하기도 어렵고, 공격을 가해도 피부가 워낙 단단해 마나 진동 대검도 잘 박히지 않았다.
게다나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타액에는 금속을 부식시켰다.
치이이-
북방군 파일럿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루산이 앞으로 달려가며 마나 통신을 열었다.
[레오파드 라이트닝, 뒤로 물러나고, 파워는 방패로 바실리스크의 입을 막고 버텨! 스피드가 측면에서 입을 찢고 배를 찔러!]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루산이 탄 레오파드 스피드는 속도를 높여 계곡 경사면을 타고 다른 6전단 레오파드들을 앞질러 가 선두를 공격하는 바실리스크의 입을 대검으로 좍 베어 버렸다.
거대한 바실리스크가 방방 뛰며 꼬리로 후려치자 냉큼 거리를 벌려 피한 뒤 재차 접근해 배 아랫부분에서 대검을 힘차게 찔렀다.
푹!
그러나 워낙 중량이 가볍고 003(레오파드 슈퍼 스피드)에 비해 출력이 부족해 의도한 만큼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실리스크가 오른쪽 앞발을 들어 치자 레오파드 스피드가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루산은 재빨리 레오파드를 일으켜 다음 공격을 피하며 소리쳤다.
[대검 던져!]
[네, 대장님!]
시에나가 달려와 마나 진동 대검을 던지며 방패로 루산과 바실리스크 사이를 가로막았다.
착!
대검을 받아든 루산은 마나 진동 기능을 활성화시켜 시에나의 방패를 물고 세차게 흔드는 바실리스크의 다리를 베어 버렸다.
서걱!
바실리스크가 괴성을 지르며 오른쪽으로 넘어졌다.
그 사이 선두에 있던 레오파드들이 배를 드러낸 바실리스크의 복부에 마나 진동 대검을 힘차게 꽂아넣었다.
푹!
푹!
푹!
푹!
루산의 마나 진동 대검까지 무려 다섯 자루의 긴 대검을 몸에 꽂고도 바실리스크는 요동을 쳤다.
[모두 덮쳐서 머리와 몸을 눌러! 그래야 독액에 피해를 입지 않아!]
루산의 레오파드 스피드가 먼저 몸을 던져 바실리스크의 목을 두 팔로 꽉 조이자 다른 레오파드들도 몸통을 누르고 꼬리를 붙잡았다.
그 사이 마나 진동 대검이 바실리스크의 배에 마나 진동 대검을 쉴 새 없이 찔렀다.
꾸어어어어!
꿀렁꿀렁하던 괴수의 배가 마침내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었다.
녀석의 몸을 누르고 있던 레오파드의 몸에는 바실리스크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어마어마하구먼!
- 후유, 이 길로 가도 되는 거야?
그때 어느 틈에 철제 바구니를 등에 짊어진 아이언 워리어가 다가와 말했다.
- 잡담할 시간이 없을 텐데? 오는 거 안 보여?
비어슨의 말대로 동족의 죽음을 목격한 거대 바실리스크들이 일말의 두려움과 강한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하고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 젠장!
[다들 알았지? 독액에 맞지 않게 조심해! 레오파드 파워가 방패 들고 입을 막는다! 스피드가 그 틈에 대검을 찔러 넣어!]
[알겠습니다!]
6전단 레오파드들이 전열을 갖추며 바실리스크를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비어슨은 능숙하게 쓰러진 바실리스크의 배를 갈라 거대하고 영롱한 생명 구슬을 꺼냈다.
루산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혼자는 못 사는 법이야. 기여에 따른 분배를 잊지 마.]
루산 역시 변경 파일럿으로서 처음 보는 거대 바실리스크의 생명 구슬이 탐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살아가는 법에 대해 한마디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1년 차 때의 따돌림을 마음 깊이 새기고 분노와 원망만으로 세상을 대했다면 지금의 친구들과 재산과 힘은 절대 갖지 못했을 것이다.
루산의 말에 비어슨이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좋은 파일럿은 당연히 분배에 참여할 자격이 있지. 솜씨가 아주 좋던데? 괴수 사냥 좀 해 봤나 봐? 히히히!]
루산은 대꾸하지 않고 쓴웃음을 흘리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앞쪽으로 달려갔다.
[가자!]
[네, 대장님!]
시에나와 바이크가 뒤를 따랐다.
‘괴수들의 천국 초입에서 만난 것이 거대 바실리스크라면 안쪽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냥꾼들이 있을까?’
레오파드를 타고 위험 가득한 땅을 질주하는 변경의 파일럿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