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체액 세 드럼 뽑아 가세요.
171. 체액 세 드럼 뽑아 가세요.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원시의 숲.
한여름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햇빛을 막아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에서는 괴수 사냥이 한창이었다.
- 조심해! 정찰병들, 다 뒤로 빠져!
멕 나이트 한 대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나왔다.
“물러나!”
까까-
까까-
신타르에 타고 있던 정찰병들이 재빨리 뒤로 빠졌다.
그런데 그때 흰색 거미줄이 쭉 뻗어 오더니 신타르에 달라붙었다.
까까아- 까까아-
깜짝 놀란 신타르가 물러나려 했지만, 굵은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사방에서 거미줄이 날아와 신타르와 그 위에 타고 있던 정찰 요원의 몸에 붙었다.
나무 위에서 날아온 거미줄들은 신타르와 정찰 요원을 순식간에 고치처럼 뒤덮어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까까아- 까까아-
“살려 줘!”
공포에 휩싸인 신타르와 정찰병이 비명을 질렀다.
- 멕 나이트, 붙어!
리더의 지시에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서둘러 신타르 쪽으로 다가가면서 투덜댔다.
- 젠장, 무사히 넘어가는 날이 없냐!
- 오늘도 제대로 건지기는 어렵구나.
리더를 포함하여 세 대의 멕 나이트가 신타르와 정찰 요원을 보호하며 마나 진동 대검으로 거미줄을 둘둘 말았다.
그런데 그들의 머리 위, 나뭇가지를 타고 거대한 거미들이 계속해서 다가왔다.
체고 3미터, 길이 6미터가 넘는 거미형 괴수 아라네였다.
아라네들은 한번 잡은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끈적끈적한 거미줄을 뿌려 댔다.
어느새 멕 나이트 몸체에 허연 거미줄이 뿌옇게 뒤덮였다.
끈적끈적하고 질긴 거미줄이 계속해서 달라붙자 팔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놀라 마나 통신기로 말했다.
[대장, 이러다 큰일 나겠는데? 지금이라도 빠지자.]
[빠지자고? 트라비는 어쩌고?]
[젠장, 지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걱정할 때야? 이러다 다 뒈진다고!]
[흐음······!]
[대장!]
그러나 리더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마나 진동 대검을 활성화시키고 거미줄을 자르려 했다.
그러나 워낙 여러 겹의 거미둘이 몸체를 두껍게 덮어 멕 나이트 팔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마나 진동 대검으로도 잘리지 않았다.
다른 멕 나이트 두 대가 거미줄에서 벗어나려 힘차게 발을 움직여 봤지만, 신축성이 강해 쭉 늘어나다 다시 당겨지고 말았다.
어느새 멕 나이트 세 대에 아라네의 거미줄이 잔뜩 뒤덮여 마치 거대한 고치가 된 것 같았다.
까아아아-
거미줄이 입을 막아 숨을 쉬기 어려운지 신타르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뒤로 물러난 정찰병들과 멕 워커 세 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다 아라네들이 자신들에게 오기 전에 달아나려고 이미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세 대의 멕 나이트는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탈출은 불가능했다.
[제기랄!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내 팔자에 대규모 아라네 서식지를 발견하나 싶더라! 쓰벌!]
멕 나이트 파일럿 하나가 절규하는 가운데 아라네들이 거미줄을 타고 다가왔다.
놈들은 여전히 꿈틀거리는 멕 나이트를 더 확실히 붙잡기 위해 거미줄을 계속해서 칭칭 감았다.
고치가 더욱 불룩해졌다.
그런 뒤 가장 큼지막한 먹이 - 리더의 멕 나이트 - 를 먹기 위해 고치 사이로 강철 같은 대롱을 넣고 몸체에 박으려 했다.
팅팅-
대롱이 장갑판에 부딪쳐 금속음이 들렸다.
“으으으!”
리더는 소름이 돋았다.
당장은 뚫리지 않겠지만, 두껍고 단단한 거대 괴수의 껍질도 타액으로 녹이고 체액을 빨아먹는 녀석이었다.
설사 놈들이 빨아먹지 않더라도 거미줄로 완전히 휘감긴 이상 벗어나지 못한 채 굶어 죽을 것이다.
치이-
톡톡 두드리던 대롱에서 타액이 흘러나왔는지 장갑판이 녹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네들이 덩치 큰 먹이부터 먼저 먹으려고 멕 나이트 세 대에 달라붙고 나중에 다가온 녀석들이 신타르와 그 위에 타고 있는 정찰병에게 다가갔다.
멕 나이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미줄을 덜 맞은 정찰병은 불투명한 거미줄 장막 사이로 아라네가 다가오는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시, 싫어! 살려 줘!”
그 간절한 목소리를 하늘이 들어서일까,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며 무언가가 아라네의 몸통을 꿰뚫었다.
푹!
단단한 아라네의 껍질이 깨지고 누런 체액이 튀었다.
그 소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쐐액!
푹!
슉슉슉슉!
퍼퍼퍼퍽!
마나 진동 투창이 쉴 새 없이 날아와 아라네의 몸통을 꿰뚫었다.
살았다는 기쁨도 잠시, 거미줄에 휘감긴 정찰병이 소리쳤다.
“이, 이봐! 조심해! 그만 던져! 여기 사람 있다고!”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마나 진동 투창을 던진 레오파드 라이닝들이 전조등을 켜고 겅중겅중 달려왔다.
그 뒤로 레오파드 스피드, 레오파드 파워, 멕 워커들이 유령처럼 밀려왔다.
괴수들의 천국을 통과한 뒤에도 이스타드 왕국 변경까지는 멀었다.
계속해서 괴수들과 싸우며 산과 들, 숲과 늪을 지나오느라 그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오물과 낙엽, 풀과 나뭇가지로 뒤덮인 레오파드 라이트닝이 아라네의 거미줄에 붙들려 있는 신타르와 정찰병 쪽으로 다가왔다.
바이크가 외부 확성기로 물었다.
- 너희들, 정체가 뭐야?
거미줄에 붙들려 있던 정찰병은 생각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러나 죽다 살아난 그는 죽고 싶지 않았기에 차마 그렇게 묻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
이스타드 왕국 변경에서 활동하는 민간 사냥 팀.
리더의 이름은 보로츠.
멕 나이트 세 대.
멕 워커 세 대.
정찰병 12명.
“민간 사냥 팀이란 말이죠?”
“그렇소.”
루산 - 그의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다 - 의 질문에 보로츠가 대답했다.
보로츠는 등에 철제 바구니를 메고 있는 아이언 워리어 한 대가 자신과 동료들의 기체에 묻은 아라네의 거미줄을 돌돌 말아 챙기는 것을 보고 속이 쓰렸으나 차마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그 정도로 물색없지는 않았다.
물론 처음 보는 멕 나이트의 수가 무려 150대나 되는 것이 그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 변경 전진 기지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본부까지는 얼마나 멀고?”
울젠 남작이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전진 기지는 음, 한 열흘 걸리나? 거기서 본부까지 다시 열흘 정도 걸릴 거요.”
대답하면서도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아라네의 부산물을 수거하는 넝마주이 아이언 워리어를 향하고 있었다.
고가의 아라네 거미줄을 다 수거한 그 강철 거인은 땅에 떨어져 버둥대는 아라네의 숨통을 간단히 끊어 버리고는 꽁무니에서 실샘을, 입에서는 타액 주머니를 아주 쉽게 채취해 냈다.
‘오! 저런 능숙한 솜씨는 오랜만이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아주 비싼 부산물만 원하는지 몸체를 쉽게 부숴 버려 체액이 철철 흘러 나왔다.
아라네의 체액은 어지간한 대형 괴수의 체액보다 비쌌다.
“아! 아까워라!”
보로츠가 저도 모르게 아쉬운 탄성을 토하자 루산도 그가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포로 - 보로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 가 심문에 집중하지 않자 울젠 남작이 버럭 화를 냈다.
보로츠가 화들짝 놀랐다.
그때 루산이 울젠 남작을 말리며 나직이 말했다.
“변경 파일럿들의 습성이 원래 저렇습니다. 제게 맡기시죠.”
“···알았소.”
울젠 남작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자 루산은 중년의 민간 사냥 팀 리더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라네의 체액은 얼마에 거래되죠?”
“한 드럼에 1천 골드는 받을 거요.”
한 드럼은 멕 워커 등에 지는 거대한 드럼통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안 비싸네?”
“괴수 부산물 시세에 대해 좀 아시오?”
“이 동네 시세는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아는 편이죠. 아! 우리는 필센 제국군이에요.”
“흐음, 어쩌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아우로라 놈들이 서쪽에서 나타날 리는 없으니까. 멕 나이트도 아우로라 놈들이 타는 것과 다르고······. 어쨌든 대단하오. 원시의 땅을 얼마나 돌아서 왔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대단하오. 역시 필센 제국인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아부하는 말은 아니었다.
필센 제국은 이스타드 왕국의 동맹국이면서 아우로라 연합으로부터 오카수스 대륙을 수호하는 굳건한 기둥이었다.
“그런데 아라네 체액 가격 말입니다. 왜 그리 싸죠?”
“그야 아우로라 놈들이 변경을 차지하면서 기존 변경 파일럿들이나 민간 파일럿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계속 일하게 해 주는 대가로 가격을 후려쳤기 때문이지.”
아우로라 연합에서 이스타드 왕국의 변경을 차지했다 하여 그 전에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교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변경이 돌아가지 않는다.
이 땅의 지리와 생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운영 방식도 모른 채 단순히 멕 나이트 부대를 투입한다고 해서 괴수 부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타드의 변경 사냥꾼들을 그대로 일하게 한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우리는 원시의 땅을 우회하여 아우로라 놈들을 공격할 겁니다. 협조 부탁해도 될까요?”
“으음······!”
보로츠는 신음을 흘렸다.
그 역시 이스타드 왕국 사람이자 오카수스 대륙 사람으로 아우로라 연합을 뼛속까지 증오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저 변경의 파일럿으로서 일개 생활인에 불과했다.
아우로라 연합과 싸울 생각이었다면 진즉 이스타드 왕국군에 투신했지 변경에 남아 괴수를 사냥하며 새로운 주인이 된 아우로라 연합에 괴수 부산물을 납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돕지 않겠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무려 150대나 되는 필센 제국군 멕 나이트에 둘러싸여 나는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목숨을 구해 준 것도 크게 작용했다.
“알았소. 협조해야지요. 그렇긴 한데······.”
보로츠가 말끝을 흐리자 루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라네 체액 세 드럼 뽑아 가세요. 다른 부산물도 챙겨 가고. 그거 먼저 팔아서 돈 받은 뒤에 우리가 치면 몇 달 동안 생활비 걱정은 없겠죠?”
“······!”
“우리가 최대한 빠르게 변경을 정리 하고, 이스타드 왕국에서 적을 몰아낼 겁니다. 협조해 주시겠어요?”
“당연히 협조하겠소!”
보로츠가 확연히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산은 아이언 워리어 쪽으로 다가가 크게 소리쳤다.
“비어슨! 이쪽 사냥 팀이 아라네 체액 먼저 뽑게 해 줘.”
- 뭐, 나는 드럼통도 없으니까. 알았어! 어이! 와서 작업 시작해! 일단 체액만 먼저 뽑아! 나머지는 내가 먼저 챙길 거야!
그 와중에도 부산물 욕심을 내는 비어슨을 보고 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봐도 변경 파일럿이었다.
마침내 보로츠 사냥 팀 멕 워커 세 대가 거대한 거미 괴수에 붙어 체액을 뽑기 시작했다.
체액을 빨린 거미 괴수가 쪼그라들자 비어슨이 아라네를 해체해 고가의 기관을 빼갔다.
보로츠 사냥 팀 멕 워커들이 남은 몸통에서 쓸 만한 것들을 추렸다.
작업이 모두 끝나자 루산이 말했다.
“보로츠와 트라비를 제외한 사냥 팀 모두는 우리 본대와 함께 멀찍이 뒤따라옵니다. 사냥 팀의 멕 나이트 두 대, 멕 워커 세 대, 신타르는 나와 내 부하들, 1전대가 타고 갈 겁니다.”
보로츠가 협조한다고 약속했지만, 다른 인원들까지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루산은 사냥 팀 멤버를 거의 다 교체했다.
보로츠는 깜짝 놀랐으나 이미 협조하기로 한 마당이라 받아들였다.
시에나는 멕 워커를 타고, 나머지 멕 나이트와 멕 워커는 볼프강과 북방군 파일럿들이 탔다.
탐탐을 타 본 적이 있는 루산과 바이크는, 말을 잘 타는 북방군 파일럿들과 신타르를 탔다.
까까-
까까-
주인이 바뀌자 예민한 신타르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바이크가 어디선가 구해온 똥구리 애벌레를 먹이자 이내 온순해졌다.
보로츠 사냥 팀은 이스타드 왕국 전진 기지를 향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 레오파드 전단이 움직였다.
마침내 이스타드 왕국 변경 탈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