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윗대가리 중에 나쁘지 않은 놈이 어디 있어요?
173. 윗대가리 중에 나쁘지 않은 놈이 어디 있어요?
여름이라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날도 후텁지근하여 오래된 맥줏집에는 퇴근길에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쫓아 보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자동 마차를 타고 맥줏집 앞에 도착한 스텐커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여기만 전쟁을 잊은 것 같군.”
“그러게요. 차에서 대기할까요?”
“오랜만에 한잔 할 것 같으니까 넉넉하게 저녁 3시간 정도 뒤에 와.”
“알겠습니다.”
스텐커는 자동 마차에서 내려 맥줏집 밖에 설치된 테이블들 가운데 빈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일 잘하는 종업원이 바쁜 와중에도 얼른 다가와 물었다.
“뭘 드릴까요?”
“사람이 한 명 더 올 테니 그때 시키지.”
“알겠습니다.”
스텐커는 소음이나 다름없는 옆자리 테이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를 탐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직업적 습관 같은 것이었다.
상사에 대한 욕, 부당한 횡포를 부리는 거래처 사장에 대한 욕, 반가운 친구를 만나서 하는 욕, 전쟁을 일으킨 아우로라 연합에 대한 욕.
다른 말들이 훨씬 많았지만, 유독 욕이 귀에 꽂혔다.
그때 또 다른 욕이 들려왔다.
“젠장!”
사복을 입은 그리마가 인상을 찡그리며 옆에서 다가왔다.
그는 툴툴대며 스텐커 맞은편 의자를 쭉 빼고 앉았다.
“우리 그만 보자니까 바쁜 사람을 왜 여기까지 부르고 그래요?”
“근데 왜 왔어? 불러도 오지 말 것이지.”
스텐커가 빙글빙글 웃으며 농을 걸었다.
“나 말고는 부를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 할 수 없어서 왔죠.”
인상을 쓰면서 말은 그렇게 해도 그리마는 대신 칼빵을 맞아 준 선배가 부르는데 나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얼른 종업원을 향해 큰 소리로 주문했다.
“이봐! 여기 맥주 큰 잔으로 두 개 줘! 여름 과일 모둠이랑 또, 선배 저녁 안 먹었죠? 스테이크 잘 익힌 것도 두 개 갖다 줘!”
“뭘 그렇게 많이 시켜? 경찰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거 왜 이래요? 경찰 밥이 몇 년인데? 게다가 작년에는 어떤 대단한 선배가 무슨 백인지 몰라도 정말로 2계급 특진을 시켜 줘서 급료가 많이 올랐거든요?”
“나 아니래도 그러네.”
“그럼 누가 나처럼 지방이나 전전하던 일선 형사를 본청 수사과장에 앉혀 줘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 사건 말고는 특이한 일이 없는데······.”
슈텐달 남작 가문 사기 사건을 막았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때 스텐커는 브레머에 근무하던 그리마에게 도움을 요청해 사기 치려는 일당을 모두 붙잡았고, 그 뒤로도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나서 해외로 도피하려던 루트 오베론을 배를 타고 쫓아가 바다 위에서 잡아 올 수 있었다.
스텐커는 도움을 준 것을 잊지 않고 율리안에게 부탁해 - 밤베르크 백작을 통해 - 그리마를 경찰청 수사과장에 앉힌 것이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다.
순전히 그리마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베론 백작과 황제가 개입되어 있는 사건에 뛰어든 이상, 사설탐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어 나중에라도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누가 도움을 줬으면 어때? 능력 있는 형사가 자기 자리 찾아 간 거지.”
“와!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인가 보네? 누군데요? 어떤 줄을 잡았기에 2계급 특진을 시켜 줘요?”
그리마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캐물었다.
스텐커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마침 맥주가 먼저 나왔다.
두 사람은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치고 쭉 들이켰다.
탁!
잔을 내려놓은 스텐커가 주위를 둘러보며 한마디 했다.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늙었어요? 왜 그래요?”
“늙긴 늙었지. 큰애가 곧 결혼하는데······.”
“와! 그 꼬맹이가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벌써 20년, 아니 20년이 뭐야? 25년은 된 것 같은데?”
“하긴······.”
스텐커의 말에 그리마는 저도 모르게 잊고 싶은 과거로 끌려 들어갔다.
신입 경찰 그리마는 이곳 동부 공업 지구에서 첫 근무를 하게 되었다.
스텐커가 바로 그의 사수였다.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동부 공업 지구.
워낙 넓어 눈길이 닿지 않는 건물과 구조물이 많고 사람이 많고 돈이 많이 돌다 보니 범죄도 많았다.
야간에 공장 지대를 순찰할 때는 경찰들도 얼마나 긴장하는지 모른다.
공장 설비를 통째로 훔쳐가는 일당, 고가의 원자재를 터는 일당, 직원들 급료를 주기 위해 금고에 넣어 둔 현금을 터는 일당, 유흥가를 노리는 폭력배들, 단순 강도, 도둑··· 칼과 석궁 같은 무기를 대놓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그리마는 스텐커와 함께 공장 지대를 순찰했는데 잔뜩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유흥가를 지나 경찰서로 돌아가려는데, 유흥가 뒷골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달려가 보니 취객을 상대로 강도짓을 하고 있었다.
강도가 취객을 쓰러뜨리고 그 몸을 뒤지는 광경을 본 그리마는 눈이 뒤집혀 철제 단봉을 빼 들고 달려갔다.
그때 스텐커가 무어라고 소리쳤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마가 냅다 강도를 후려칠 찰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강도 일당 하나가 단검으로 그의 옆구리를 힘차게 찔렀다.
그 순간, 그리마는 옆에서 공격해 오는 강도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이미 대응하기에는 늦었다.
바로 그때 스텐커가 그리마와 강도 사이로 몸을 날렸다.
푹!
유혈이 낭자한 밤이었다.
“젠장!”
그리마는 그날의 기억을 털어 버리기 위해 다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종업원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여기 한 잔 더! 아니, 이만한 맥주 통 있지? 아예 그걸 갖다 놔!”
“쉬엄쉬엄 마셔. 누가 뺏어 먹냐?”
“그냥 간만에 마시고 싶어서 그러죠. 누가 중늙은이를 일 많은 자리에 앉히는 바람에 말년에 나도 고생이 많다고요.”
“말년은 무슨 말년? 아직 한창인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어요.”
스텐커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생계가 곤란해지자 그의 아내가 공장에 취직했다.
낮에 아이 둘을 맡기고 공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즉시 아이들을 건사하고 남편을 병구완하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젊은 나이로도 버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스텐커의 아내는 공장에서 픽 쓰러져 기계에 몸이 끼는 사고를 당해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리마는 그 처참한 모습과 그 당시 스텐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스텐커는 결국 경찰에 복귀하지 않았다.
낮에는 아이들을 맡기지만, 밤에는 돌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야근이 잦고 생활이 불규칙한 경찰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가 없어 결국 그만두고 탐정 사무소를 개업했다.
그렇게 혼자서 두 아이를 키워 대학을 보내고 결혼까지 시킨다 하니 그리마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게다가 하필 지금 앉아 있는 장소도,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동부 공업 지구 유흥가였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마가 맥주잔을 다시 한번 들자 스텐커가 말렸다.
“술은 곧 실컷 마시기로 하고, 일단 맨 정신으로 이야기 좀 하자고.”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요?”
그리마는 툴툴거렸지만, 거친 말투와 달리 맥주잔을 탁자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러자 스텐커가 몸을 그리마 쪽으로 기울이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에 공업 은행장이 들어가고 어제는 상업 은행장이 들어갔잖아? 알지?”
“당연히 알죠. 큰 사건인데. 근데 그게 왜요?”
“그거 우리 쪽에서 작업한 거야.”
“······!”
그리마의 눈이 똥그래졌다.
“우리?”
“음! 우리!”
스텐커는 그리마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더 말하기는 그렇고,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끙!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더 들어 봐.”
“······.”
“여하튼 공업 은행장은 아주 나쁜 놈이고, 상업 은행장은 그보다는 덜 나쁘지만 상당히 나쁜 놈이지. 백골이 되도록 감옥에서 살아도 이 사회에 전혀 손해가 없는 놈들이야. 그런데 문제는 재무대신이 뒷배를 봐주고 있단 말이지. 그래서 그자도 함께 호송 마차에 태워 보낼 생각이거든.”
“······!”
슈텐달 남작 가문 사기 사건 때에도 당시 체포한 녀석들을 내무대신이 다 석방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당사자 - 스텐커가 직접 은행장들에 이어 재무대신까지 거론하자 그리마는 충격을 받았다.
“공업 은행장 안스탈이 혼자 먹어서 탈이 날 것 같으니까 재무대신한테 한 재산 만들어 준 게 있어. 코끼리 자동 마차가 사실 재무대신 거야.”
“코끼리 자동 마차? 첨 들어 보는데요?”
“회사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안스탈이 작업을 쳐서 꿀꺽 삼켰다가 여러 번 회사 이름을 바꾸고 소유자를 바꿔서 세탁한 다음에 재무대신한테 넘겨준 거거든. 당연히 차명이고. 게다가 민수용이 아니라 군용 화물 자동 마차로 주로 납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몰라. 아주 알짜 회사지.”
“흐음!”
“코끼리 자동 마차를 털어서 장부를 찾으면 돼. 추적을 피하려고 재무대신한테 꼬박꼬박 현금으로 갖다 바쳤을 거야. 위에 알리지 말고 급습해서 나한테 갖다 줘. 다른 데로 새면 일이 복잡해져.”
“나를 죽여요, 그냥!”
“아니! 안 죽어. 이 일만 성공하면 상무대신이 재무대신을 칠 거야. 재무대신 쪽은 다 쓸려 나가는 거지. 윗사람들이 싸우는 거니까 너는 거론도 안 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스텐커는 코끼리 자동 마차의 소재지와 사장의 인적 사항, 주소, 특이 사항이 적혀 있는 쪽지를 넘겨주었다.
가슴이 답답한 와중에도 그리마는 그 쪽지를 자세히 읽어 보고 주머니에 넣었다.
“미안하다.”
“젠장!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요.”
“근데 진짜 나쁜 놈이야. 감옥에 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윗대가리 중에 나쁘지 않은 놈이 어디 있어요? 털면 감옥 안 갈 놈이 있기는 하나고요?”
“허허, 그것도 그런가?”
“웃지 마요! 정드니까!”
그때 종업원이 작은 맥주 통을 낑낑대며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마는 맥주잔을 가득 채워 벌컥벌컥 마셨다.
“끄윽!”
한 잔 마시고 다시 채워 또 마셨다.
스텐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마시기 시작했다.
“근데 선배, 이거면 확실히 보낼 수 있어요?”
“보낼 수 있어. 그리고 보험으로 몇 가지 더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후유! 알았어요. 큰애 결혼식 때 꼭 불러요. 갈 테니까.”
“···고맙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허허, 그래 마시자! 마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맥주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화장실을 몇 번 가고, 몇 번인가 토했다.
세 시간 후,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동무를 했다.
“가쟈! 내 쟈동 마챠로 집까지 태워 쥴게.”
“쟈동 마챠가 오디 있는데?”
“쩌어어어~기!”
“우와아아! 션배! 팔쟈 좌악~ 폈네. 쟈동 마챠에~ 운전기샤까지 있고~!”
“흐흐흐! 쥬인~ 잘 만나셔어~ 그러취!”
“누군지 쇼개 좀 시켜줘 봐요~! 나도 덕 쫌 보게!”
“흐흐흐! 나아아아~중에! 글고 너는 떳떳한 길 가라! 자랑스러운 제국의 경차알 아니냐!”
“개뿔~! 무어시 자랑스러운데? 쓰벌!”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동 마차까지 한참 동안 걸어가서 조수의 도움으로 힘겹게 뒷자리에 올라탔다.
조수가 차를 출발시켰다.
뒷자리에 축 처져 있던 그리마가 술 냄새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얀함미다, 션배!”
그 말을 들은 스텐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런 소리 마라. 내가 미안하다.”
자동 마차는 동부 공업 지구를 빠져 나가 노바 중심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