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마나 연료봉을 면세로 준다면
177. 마나 연료봉을 면세로 준다면
루산과 볼프강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휴식을 취하며 잡담하거나 장비를 만지던 6전단 1전대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볼프강과 루산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주시했다.
순간, 원시의 숲속에 정적이 흘렀다.
그들이 딱히 당장 루산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볼프강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언제든 행동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기가 없었다.
바이크에게 그것은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야!”
이럴 때는 예민한 바이크가 신타르에게 먹이를 주다 말고 나직이 시에나를 불러 눈짓했다.
시에나가 숲속 공터의 그 싸늘한 공기를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이것들이 우리 대장님을······!’
시에나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제국군 기사 30여 명과 싸우는 극단적인 상황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리 루산이 대단하다 해도 맨몸으로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시에나는 바이크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기까지 자신이 조종해 온 보로츠 사냥 팀의 낡은 멕 워커를 향해 조용히 이동해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올라탔다.
후웅-
숲속 정적을 깨뜨리는 멕 워커의 시동 소리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일제히 쏠렸다.
괴수의 체액을 담은 거대 드럼통을 짊어진 멕 워커가 성큼성큼 걸어와 루산 뒤에 섰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는 바이크가 자신과 루산이 탈 신타르 고삐를 쥐고 루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의 여의치 않으면 재빨리 루산에게 달려가 신타르 고삐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 광경을 본 볼프강은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았다.
“허!”
루산의 부하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장님을 함부로 건드리면 너희 다 밟아 버리겠다!’
‘대장님, 일단 몸을 피하시죠!’
그의 귓가에 젊은 남녀 파일럿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루산과 싸움을 벌이는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결코 무사할 것 같지가 않았다.
시에나와 바이크의 의지를 느낀 것은 볼프강 혼자만이 아니었다.
1전대 기사들도 시에나와 바이크의 행동을 적대적이라고 느끼고 무기에 손을 가져가거나 멕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볼프강은 쓸데없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먼저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하하! 대단한 부하들을 두셨구려.”
그 말에 루산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고는 멕 워커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어디 고장 났어? 다 쉬고 있는데 정신 사납게 뭐 하는 거야?”
시에나도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 동화기 장력이 좀 약한 것 같아서요. 테스트 좀 하다 보니······.
“어차피 여기서는 못 고쳐!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내려와.”
- 네, 대장님!
시에나의 목소리가 멕 워커 확성기를 통해 원시의 숲과 1전대 기사들의 가슴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침내 시에나가 멕 워커를 뒤로 물린 뒤 내리고, 바이크 역시 간간이 루산 쪽을 힐끗거리면서도 다시 신타르에게 먹이를 주었다.
북방군 기사들도 한숨을 내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감히 제국군 기사 수십 명을 상대로 전혀 물러나지 않고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가프 용병단의 젊은 남녀 파일럿의 모습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인상을 주었다.
용병이라고, 나이가 어리다고, 여자라고 은연중에 경시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잠깐의 해프닝에 불과했으나 루산은 가슴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자 마음속에 여유가 피어났다.
작전을 앞두고 싸울 필요는 없었다.
볼프강이 원시의 땅을 지나오는 동안 루산의 능력을 인정했듯이 루산 역시 기사답고 군인다운 볼프강을 인정했다.
진정한 기사, 진정한 군인은 변경의 기사가 되기 전에 그가 꿈꿔 온 삶이었다.
변경 파일럿들에 대한 볼프강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돈만 알고 비겁하고 야비한 구석이 충분히 있었다.
갑자기 반발심이 불쑥 치솟아 한마디 한 것이 이런 촌극을 빚을 줄은 몰랐다.
루산은 사과하려 했다.
“좀 전에······.”
그런데 그때 볼프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스타드 변경의 파일럿들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작전 참모의 의견이 옳소. 레오파드 전단을 최대한 오랫동안 숨긴 상태에서 이스타드 변경 파일럿들의 소행인 것처럼 하여 적의 피해를 늘리게 되면 우리의 역할은 유격전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북부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오.”
더 나아가 필센 제국 북방군과 대치하고 있는 아우로라 연합군의 측면이나 배후를 강하게 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장밋빛 전망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어디까지나 이 땅의 변경 파일럿들을 동원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 아니겠소? 작전 참모의 말대로라면 싸울 의무도 없는 이들을 어떻게 움직인다는 말이오?”
볼프강은 조금 전에 있었던 해프닝은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의사를, 오로지 작전에 집중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루산은 그의 대범하고 우직한 태도에 경의를 표하며 차분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어떤 가치를 덧씌워 치장하든 충성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쌍무적인 거죠.”
주군에 대한 기사의 충성은 봉토와 주군의 울타리에서 나온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충성은 안전 보장에서 나온다.
낭만적인 충성은, 양 당사자의 관계가 오랜 세월 또는 강력한 믿음으로 형성되어 굳이 쌍무 계약을 내세울 필요가 없을 때의 모습이 부각된 것뿐이다.
그때에도 쌍무적인 관계가 훼손되면 충성은 사라진다.
“요는, 이스타드 변경 파일럿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그들도 기꺼이 우리에게 협력해 싸울 겁니다.”
“변경 파일럿들이 원하는 것?”
“이익이죠.”
“이익이라······.”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스타드의 국왕이 다스릴 때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요. 수입은 이미 크게 줄어들었고 미래는 더욱 불안합니다. 아우로라 연합에서 온 사냥 팀이 이 땅에 적응하면 할수록 기존의 사냥 팀은 도태될 겁니다. 아우로라 인들이 오카수스 인을 위해 이익을 나눠 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으음······.”
보로츠가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암담한 미래가 새삼 그려졌던 것이다.
“굴다크 공작이 이끄는 아우로라 연합의 대군이 무서워 떨쳐 일어나지 못할 뿐 아우로라 연합의 통치가 만족스러워서 가만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약속하면 기꺼이 협조할 겁니다.”
루산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볼프강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이오?”
“첫 번째는 확실한 물질적 보상입니다. 이스타드 국왕 시절이 지금보다 더 낫다고는 하나 기껏 목숨 걸고 싸웠는데 이전과 동일한 처우를 받을 뿐이라면 사람인 이상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목숨 바쳐 싸웠는데 말이죠.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죠. 확실한 보상을 해 줘야 합니다.”
“음!”
볼프강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나 우리는 이스타드 왕국 변경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없소. 보상을 약속할 권한이 없어요.”
그렇다고 다시 먼 길을 돌아 필센 제국으로 달아난 이스타드 국왕을 찾아가 변경 파일럿들에게 보상책을 약속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른 전장에서 몇 달을 그렇게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는 융통성을 발휘해야죠. 6전단장님의 이름으로 약속하면 됩니다. 최선을 다해 이스타드 국왕을 설득하겠다고 말이죠. 설마 이스타드 국왕이 나라를 되찾는데 기여한 변경 파일럿들을 나 몰라라 하고 구두쇠처럼 굴겠습니까? 필센 제국이 부탁을 했는데도 외면할까요? 필센 제국이 손을 떼면 이스타드 왕국은 망합니다.”
이대로 나라를 아우로라 연합에 빼앗기는 것보다 변경 파일럿들에게 좀 더 이익을 주더라도 나라를 되찾는 것이 이스타드 국왕에게도 이로웠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전단장님께 말씀을 드리겠소. 두 번째는 무엇이오?”
“승리죠.”
“승리!”
“아무리 큰 이익을 약속해도 패할 전쟁에 뛰어들고 싶겠습니까? 이길 만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야죠.”
“그렇지!”
보로츠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첫 번째 싸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쉽게, 압도적으로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이스타드 변경은 기꺼이 우리 편이 되어 줄 겁니다. 안 그런가요?”
루산이 보로츠를 향해 물었다.
“당연한 말씀이오!”
보로츠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우리도 오카수스 인이오! 아우로라 놈들을 몰아내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소? 개인적으로는······.”
보로츠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마나 연료봉을 면세로 준다면 기꺼이 협력하겠소.”
말하고도 민망한지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루산은 변경 파일럿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미소를 지었고, 볼프강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똑같이 원시의 땅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이라도 변경 정책은 제각각이었다.
필센 제국은 변경을 기본적으로 국가가 관리했다.
변경 본부를 두고 변경 군단을 설치해 괴수 부산물을 생산하고 개척민을 이주시켜 변경을 인간의 영역으로 개발해 나갔다.
멕 나이트를 충분히 보유하여 그중 상당수를 변경으로 돌려도 지장이 없는 군사력, 어마어마한 개척 비용을 미리 투입할 수 있는 경제력, 그리고 변경으로 개척민을 보내도 사회 유지에 지장이 없는 많은 인구 덕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아라드 왕국은 가프 마법 연구소에 변경 개발권을 팔았다.
직접 변경을 개발할 여유가 없는 가난한 나라로서는 이 방식이 더 이익이 될 수도 있었다.
한편 이스타드 왕국은, 주민을 이주시켜 개척하는 것보다 괴수 사냥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굳이 변경을 개척해야 할 만큼 인구가 많지 않았고, 변경으로 많은 멕 나이트를 보낼 만큼 군사력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개척촌을 건설하고 변경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으니 개척촌을 보호할 병력을 나라에서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이스타드 왕국 변경에는 민간 사냥 팀이 특히 많았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괴수를 사냥해 큰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
국가는 이런 민간 사냥 팀을 적절히 통제할 수준의 병력만 주둔시켰다.
개척민이나 개척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필센 제국 변경에 비해 그 규모도 적었고 역할도 달랐다.
이들은 대대로 변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사냥 팀을 상대로 장사하거나 사냥 팀의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진 기지 또한 필센 제국과 개념이 달라 사실상 사냥 캠프나 다름없었다.
사냥 팀들이 괴수를 사냥해 부산물을 가져 오면 매집해서 본부까지 운반해 주고,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점검하고, 마나 연료봉을 교체하고, 그러는 동안 잠시 사냥꾼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냥 캠프.
“우리가 가는 둘둘 기지는, 상시 머물러 있는 본부 멕 나이트가 2대, 경비병 20여 명, 드나드는 아우로라 사냥 팀이 다섯 개 정도, 이스타드 사냥 팀이 여섯 개 정도 되오. 사냥 팀 수는 아우로라 쪽이 더 적어도 한 팀당 보유하는 멕 숫자는 훨씬 많소. 세 배는 될 것이오.”
보로츠가 둘둘 전진 기지의 구조를 바닥에 그리면서 상황을 브리핑했다.
“해가 지기 직전에 들어가죠.”
루산의 말에 볼프강과 보로츠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 무렵 보로츠 사냥 팀이 둘둘 전진 기지를 향해 다가갔다.
기지 입구에서 아우로라 연합의 경비병이 제지했지만, 그는 긴장하지도 않았고 심하게 수색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저 지루한 듯 출입 상황을 기록할 뿐이었다.
원시의 땅 깊숙한 곳에서 이미 항복하고 괴수나 잡아 돈이나 버는 사냥꾼들을 두려워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 말도 경각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짝 의아해서 하는 말이었다.
- 지난번에 새로 들어온 애들이 몇 명 있었잖아.
“아! 그런가?”
- 그럼! 배고프고 피곤하니까 후딱후딱 하자고.
보로츠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어, 알았어.”
어차피 다 수염이 덥수룩해서 그놈이 그놈 같았기에 경비병은 유심히 살펴보지도 않고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전진 기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괴수 부산물의 종류와 수량을 확인하고 돈을 주고받는 일이었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로츠 사냥 팀 - 루산 일행과 북방군 3군단 6전단 1전대 파일럿들 - 은 이스타드 변경의 넓고 허름한 전진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해가 원시의 땅 너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