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식기 전에 드세요
179. 식기 전에 드세요
대학로 노천카페 거리에 어둠이 깔렸다.
날이 저물자 약간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먼저 도착하여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 있던 바덴이 몸을 살짝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비서 소피아가 손가방에서 숄을 꺼내 바덴에게 건넸다.
그녀는 숄을 두르며 중얼거렸다.
“벌써 가을인가? 시간 참 빠르네.”
오늘은 상무대신이 먼저 만남을 요청했다.
무슨 용건인지는 알지 못했다.
지난번 공업 은행장과 상업 은행장, 재무대신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용무인지 바덴은 몰랐다.
저렴한 가격과 젊음의 활기 덕에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이곳 노천카페들은 손님이 절반 이상 차 있었다.
그래도 전에 루산과 함께 왔을 때처럼 가득 차 있지는 않아 안타깝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차에서 내린 상무대신이 다가와 말했다.
“내가 좀 늦었습니다. 회의가 있어서······.”
바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상무대신이 손으로 앉을 것을 권하자 바덴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내가 다닐 때는 빵이 들어간 콩 수프에 돼지고기 목살 스테이크가 저녁 메뉴 중에는 가장 잘 나갔는데, 지금도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저희 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상무대신님.”
“하하, 그런가요? 고슬라 사장도 좋아합니까?”
양이 많고 고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바덴은 굳이 메뉴 선정으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저도 괜찮습니다. 시킬까요?”
“그러죠.”
바덴의 눈짓에 소피아가 얼른 주문을 한 뒤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고슬라 사장 덕에 좋은 만남의 장소를 새삼 알게 되어 여기서 종종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답니다. 나이 들어 주책이라고 흉볼지 모르지만, 옛날 생각도 나고 젊음의 기운을 느낄 수도 있어서 참 좋아요.”
“누가 흉을 보겠어요? 다 자기들 이야기에 몰두하느라 관심도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벤야민도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덴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한 이유는, 솔직히 말할게요, 고슬라 사장이 진지하게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예요.”
“네?”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올바르게 일한다는 건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고슬라 사장을 만나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사실 옳지 않은 것이겠지만, 정부 안에서는 믿고 일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정치적 고려라는 이름으로 많은 일들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가지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서두를 길게 늘어놓는 것일까?
바덴은 궁금했다.
“고슬라 사장도 이제는 작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뭐···, 네.”
“은행장들과 재무대신을 끌어내리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그 배후에 오베론 공작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안 그런가요?”
“네?”
바덴은 조금 놀랐다.
“후후, 정말 몰랐나요? 아니면 살짝 관련이 있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나요? 뭐, 상관없죠.”
“······?”
“어쨌든 은행 감독 업무가 상무부로 이관되고, 대대적으로 은행 감사를 벌였잖아요?”
“네.”
“정말 엄청난 일들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상무대신은 웃으며 말했지만, 결코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바덴은 상무대신이 말한 엄청난 일들에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작년에 일어난 반란 사건 직후에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이 신문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 기자들을 접촉해 그 기사를 부탁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상무대신은 은행 감사를 통해 오베론 가문에서 은행을 움직여 귀족 가문들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갈취했다는 것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신문을 동원해 공업 은행장의 사기 사건과 피해자 기자 회견을 실었고, 그 직후 상무대신을 만나 재무대신의 비리 증거를 넘겨주었다.
‘상무대신은 일련의 연상 과정을 거쳐 내가 오베론 공작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벌였다고 생각하는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덴은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 해도 굳이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상무대신도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오베론 공작을 공격하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가 하나 있어요. 너무 커서 어마어마한 그늘을 드리운단 말이에요. 그 밑에서는 햇빛을 받지 못해 다른 식물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잘라 버리려 해도 너무 커서 자를 수가 없어요.”
“······.”
“그런데 그 나무가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까닭은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많은 양분을 쭉쭉 빨아 먹었기 때문이에요. 기반이 튼튼하다는 거죠.”
바덴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정계에서 그를 끌어내리는 것은, 스스로 내려가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워낙 그의 그늘이 넓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의 막강한 힘은 가문의 힘에서 나오죠. 예전에는 광대한 영토였다면 지금은 규모가 어마어마한 사업.”
상무대신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 했다.
“고슬라 사장도 큰 사업을 하지 않습니까? 휴양 사업, 식품 사업, 기계 설비 사업, 장난감 사업, 선박 사업···, 앞으로는 자동 마차까지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하더군요.”
“뭐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럼요. 열심히 사업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합니다.”
벤야민이 웃으며 말하자 바덴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예의상 짓는 웃음이었다.
상무대신이 자신이 하는 사업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물론 사업의 구조를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결국 사업이란 시장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일이 아니겠어요? 어차피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경쟁은 피할 수 없지요. 큰 상대를 쓰러뜨려야 내가 크는 것이기도 하고······.”
모든 사업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경영학 원론을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바덴은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 큰 상대가 그 가문이 될 수도 있겠죠.”
“······!”
“놀랄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고슬라 사장의 투자자들도 그 가문에 복수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테고······.”
‘투자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바덴은 벤야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발휘했다.
‘아! 상무대신은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내가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의 피해 가문들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구나! 상무대신은 은행 감사를 통해 그 당시 막대한 돈의 흐름이 오베론 가문으로 흘러가는 것을 봤을 테고, 작년에는 반대로 오베론 가문에서 그 가문들로 거액의 피해 보상금이 움직인 것을 확인했을 거야. 아마 사건을 덮기로 합의한 금액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
더 생각을 확장해 보면, 백작 이상은 아니지만 재산이 상당한 남작, 자작 가문들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뒤 복수를 하기 위해 뭉쳐 회사를 세웠고, 그 대표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면 상무대신의 이런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모른 채 최근 벌어진 사건들과 은행 감사 결과만 놓고 짜 맞춘 생각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사기 사건 피해 가문은 그야말로 알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만큼 큰 사업체를 경영하도록 투자할 자금이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알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팔아 그들의 삶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 외부에서 막연히 짐작할 때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귀족 가문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복수를 위해 남은 재산을 털어 이 정도 사업체를 일구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일개 평민 출신 여자 사장이 오베론 공작이 배후에 있는 은행장과 재무대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열 개 이상의 부유한 귀족 가문들이 뭉쳐 오베론 공작 가문에 대항한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사리에 맞는 것이다.
‘나를 피해 가문들의 대리인 정도로 보는 것이구나?’
바덴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상무대신님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그 가문의 기반을 무너뜨리면 정치적으로도 무너지는 것이니까 그 가문의 사업체들과 경쟁을 해서 이기라는 것인가요?”
벤야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바덴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임지는 것을 싫어하는 정치가들의 못된 습성이 아닐까?’
그러나 굳이 그런 말을 대놓고 할 필요는 없었다.
“상무대신님, 그 가문의 자산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모릅니다.”
상무대신은 부끄러움도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토지 개혁으로 가문의 땅 5분의 4를 농민들에게 분배한 이후에도 필센 제국에서 가장 큰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필센 제국에서 가장 큰 해운사를 소유하고 있는 가문.
필센 제국에서 노바 동부 공업 지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오베론 공단을 보유하고 있는데, 노바 동부 공업 지구는 황제의 개인 재산이 아니지만 오베론 공단은 오베론 가문의 재산이었다.
자산으로만 놓고 보면 황제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문.
정확한 자산 규모가 가늠이 되지 않는 가문.
“그렇죠.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니 당황스럽네요.”
그러나 벤야민은 당황하지 않았다.
“하하, 그렇습니까? 나는 고슬라 사장이 좀 더 대범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네?”
“최근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더군요. 물론 작년에 규모가 큰 사업체를 여럿 인수했기 때문이지만, 그것 말고도 순수하게 사업 경영으로 늘려나간 매출 증가율, 시장 점유율이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아이디어도 그렇고 사업 수완이 대단합니다. 왜 투자자들이 고슬라 사장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아요.”
여전히 오해하고 있었으나 어쨌든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이 속도로만 가도 고슬라 그룹은 크게 성공합니다. 충분히 그 가문과 경쟁할 만하지요. 솔직히 그 정도 자신감은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장부를 내밀었을 때 이미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슬라 그룹!
벤야민은 은연중에 바덴을 자극하고 띄우려 했다.
“게다가 내가 간간이 도움을 준다면 성장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겁니다.”
“······!”
필센 제국의 상무대신이 돕는다?
사업의 인허가, 은행 감독 권한을 가진 상무부의 최고 책임자가?
여자라서 만만하게 본 것인가?
이 정도 띄워 주면 기뻐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나?
그러나 바덴은 충분히 흔들렸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외람되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군요. 진심으로 협력하기를 원하신다면 마음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저도 투자자들과 충분히 상의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바덴은 존재하지 않는 투자자들을 팔았다.
투자자는 오로지 루산뿐이었지만, 그녀는 루산을 투자자라기보다 고용주라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바꿔 준 은인이면서 이익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지 않는 동반자로 이해했다.
“상의··· 하셔야죠.”
벤야민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국심 때문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지난번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대답이었다.
“물론 믿습니다.”
바덴은 믿었다.
사익 추구와 애국심은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다.
상무대신은 오베론 공작을 끌어내리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오베론 공작도 자신이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바덴의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와 성의가 없다고 느낀 벤야민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은행 감사를 했는데, 그 결과를 누구에게도 보고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옳지 않지요.”
벤야민은 은행 감사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오베론 공작의 행태에 너무나 놀랐다.
그러나 황제에게 보고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약점을 태연히 거론하며 자신을 위협한 오베론 공작.
그가 두렵기도 했지만,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뻗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과연 이 사실을 모르고 계셨을까?’
오베론 공작의 말처럼 황제 역시 공작의 먼지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알면서도 약점을 잡히고 있고, 함부로 쳐낼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갖고 있어서 모른 체하고 어울려 지내는 것이다.
벤야민은 욕심이 많고 야심이 컸다.
오베론 공작을 쳐내야 이 비정상을 바로 잡고 일다운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베론 공작이 버티고 있으면 자신은 더 올라갈 곳이 없을 것이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저 그런 관료가 아니라 뛰어난 관료, 명재상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쳐내기로 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정치가나 관료들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대학 후배이면서 똑같은 평민 출신이고 믿을 수 없게도 상당한 규모의 사업체를 경영하는 바덴이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오베론 가문을 증오할 만한 가문들과 연결된 것 같았고, 실제로 적대하는 행동을 했다.
‘그 가문들과 바덴을 이용해 오베론 가문의 사업을 무너뜨린다! 뿌리가 잘리면 줄기도 시들 수밖에 없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올바름을 위한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삶은 가치가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이 곧 애국이었다.
“저, 손님······.”
그때 음식이 나왔다.
바덴이 종업원에게 말했다.
“아! 여기 놓고 가세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심각한 분위기에 끼어든 것 같아 긴장한 채로 음식을 테이블에 놓고 돌아갔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흐트러졌다.
‘속마음이야 더 만나 보면서 확인해 가는 거지, 말을 들었다고 알 수 있겠어?’
루산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지 않는 동반자 관계인 바덴으로서는 어차피 오베론 공작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상무대신의 속마음이 무엇이든 도와준다면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제안을 처음부터 덥석 물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조바심이 나도록, 이쪽의 가치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바덴이 웃으며 말했다.
“투자자들과 상의한 뒤에 말씀 드릴게요. 식기 전에 드세요.”
“그럴까요, 그럼?”
루산이 간편식 레오파드를 으적으적 씹으며 머나먼 변경 땅을 질주하는 동안 바덴은 상무대신과 빵이 들어간 콩 수프에 돼지고기 목살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맛있게 먹었는지, 누가 더 힘든 싸움을 하게 될는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