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원래 복잡한 나라였는데 좀 더 복잡해진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183. 원래 복잡한 나라였는데 좀 더 복잡해진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대전쟁의 와중에 해외 출장을 가겠다는, 그것도 아우로라 대륙 부르사 왕국에 다녀온다는 슈텐달 남작의 말에 가족들과 피닉스 제철 중역들은 깜짝 놀랐다.
부르사와 인접한 부르고스는 필센 제국의 해외 영토로 전쟁 발발 지역이었고, 부르사 왕국은 오랫동안 내전이 끊이지 않아 치안이 불안한 나라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우로라 연합 해군이 필센 제국의 배를 공격하게 되면 부르사의 철광석을 실어 나르는 아인베크 해운의 벌크선들은 언제든 격침될 위험이 있다 하여 보험사들이 보험 가입도 받아주지 않았다.
해군이 호위해 주고 있다고 해도 거절했다.
슈텐달 남작이 출장을 다녀오겠다는 부르사는 바로 그런 나라였다.
가족과 회사 중역들이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슈텐달 남작은 뜻을 꺾지 않았다.
“피닉스 제철은 선봉장이야. 위험하다고 뛰어들지 않으면 그게 어디 선봉장인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사업에 임하는 각오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그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오베론 공작이라는 큰 적과의 싸움에 앞장서기로 했던 것이다.
그가 선봉장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는 마음의 빚 때문이었다.
사기로 망하기 직전에 그를 구해 주고 살길을 열어 준 루산.
피닉스 제철이 단기간에 이만큼 성장한 것도 루산의 사람인 바덴의 도움 덕이었다.
변경과 노바를 넘나들며 고군분투하는 청년에게 받기만 하고 해 준 것이 없었다.
“원수는 갚고, 은혜는 보답해야지!”
결국 그는 경호원 두 명, 비서 한 명과 함께 기어이 배를 타고 떠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우로라 대륙의 부르가스.
부르가스 행정청에 들러 행정관 칼을 만났다.
그는 필센 제국 사람들의 해외 사기 피해를 막고 재산권 보장을 돕는 투자 지원부에서 일했다.
슈텐달 남작이 전에 부르사에서 광산을 매입할 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어이쿠, 남작님! 이 시국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겠어요? 칼 행정관을 보고 싶어서 왔지. 겸사겸사 일도 하고.”
“하하하!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보러 오시다니, 이거 영광이군요. 신경을 많이 써 드려야겠어요.”
슈텐달 남작의 농담에 칼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부르사 왕국의 철광산을 더 매입하려고 왔어요.”
“그러시군요. 투자 위험은 전보다 더 높아졌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어쩌겠어요? 그래서 행정관을 찾아왔지요.”
“알겠습니다.”
칼은 출장 신고를 하고 슈텐달 남작과 함께 부르사 왕국으로 떠났다.
부르사 왕국은 오랜 내전으로 치안이 불안한 나라라 슈텐달 남작이 경호원 두 명을 대동했다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르사 현지에서 경호원을 더 고용하고 마차 두 대를 추가로 빌려 이동했다.
총 세 대의 마차에 무장한 경호원들이 앞뒤로 타고 있었지만, 도시를 통과할 때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도시는 오물과 쓰레기, 정비되지 않은 도로와 무너진 집들로 채워져 있었고, 길가에는 구걸이 일상화된 아이들과 언제든 마차를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빈민들로 가득했다.
먹고살 것도 없는 도시로 왜 왔느냐고 궁금하겠지만, 시골은 더욱 살 수가 없었다.
애써 농사를 지어도 도적 떼와 군벌들이 다 빼앗아 가기 때문에 시골을 떠난 것이다.
황폐화된 농촌과 거대한 빈민촌이 된 도시.
슈텐달 남작은 부르사에 처음 왔을 때 이러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보니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안타깝고 마음이 불편할 뿐.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중무장하고 있는 마차로 덤벼드는 것은 쉽지 않아서 슈텐달 남작은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
“부르사에서 철광석 물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네. 현재 남작님이 보유하고 있는 서부 철광산은 항구와 가깝고 국왕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라 부르사에서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입니다. 매장량도 나쁘지 않고 근처에서 철광산을 추가로 개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사에서 철광 매장량이 아주 풍부한 지역은 따로 있습니다. 부르사 중부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슈텐달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 지역은 왕제의 영향력이 강한 곳인데, 최근에 왕제가 사망했습니다.”
“그런가요?”
“네. 그래서 내부 사정이 상당히 복잡한 편이에요. 바로 그 때문에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흐음!”
부르사는 여러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거 부족 시절부터 이어져 온 혈통에 대한 신봉이 부르사 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해 통치자는 왕가 - 옛날 대부족장 - 의 핏줄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여러 부족들은 왕가의 혈통을 모셔 최고 지위로 받들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각 부족의 족장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상징적으로 받들던 왕가의 핏줄이 실권을 쥐려고 시도하기도 했고, 그런 통치자 밑에서 병력을 통솔하던 장군이 권력을 쥐어 군벌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한 나라가 더욱 복잡하게 된 것은 필센 제국과 아우로라 연합의 대립 때문이었다.
아우로라 연합은 부르가스를 점령한 필센 제국이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부르사까지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중부 세력을 지원해 내전을 조장하고 질서를 무너뜨려 국가를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부르사를 차지하려고 이 땅에 뛰어드는 순간 필센 제국은 복잡한 갈등 요소와 황폐해진 사회 기반, 가난에 찌든 백성들을 떠안게 되어 깊은 수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필센 제국은 부르사 왕국국의 정치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두면서 민간 투자를 지원하며 부르사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는 것으로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왕제는 호전적이어서 국왕파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의 둘째 아들은 마리노 유학파로 꽤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내전을 끝내고 군벌을 없애 부르사의 혼란을 종식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라고 합니다.”
“흐음,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말로가 그리 좋지 않던데······.”
슈텐달 남작도 부르사 왕국에 대해 상당히 많은 공부를 했다.
내전을 끝내고 모든 부족이 화합해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한 훌륭한 사람들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부르사의 사정은 그런 사람들까지 집어삼킬 정도로 혼탁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죠.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군벌들이 모두 적대적이에요. 반면, 국왕파와의 대립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겠죠. 그래서 중부의 철광석을 획득해 군벌 점거 지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면 국왕파의 땅을 거쳐 항구까지 운반하는 것은 수월할 겁니다.”
“말만 들어도 중부 철광석의 통행료가 장난이 아닐 것 같군요.”
“하하, 그건 어쩔 수 없죠. 부르사 아닙니까?”
“부르사······.”
혼란의 땅 부르사.
자원의 가격은 무척 저렴하지만, 그 자원을 무사히 운반하기 위해서는 무장해야 하고 군벌과 세력가를 무마해야 한다.
그렇게 무사히 항구까지 도착한다 해도 아우로라 연합의 해군이 필센 제국의 철광석 운반선을 격침시킬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다른 업체들이 이 나라에 뛰어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닉스 제철의 원료 공급처가 밝혀졌으니 곧 다른 회사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 나라에 들어올 것이고, 경쟁이 치열해지면 철광석 가격도 오를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나라의 철광을 다 장악해야지!’
그렇게 다짐한 슈텐달 남작은 여러 험한 지역을 지나 중부의 새로운 통치자 왕질 - 국왕의 조카 - 을 만났다.
30대 초반의 왕질은 영리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철광을 원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부르사의 철광석이 으뜸이니까요.”
“그걸 항구까지 어떻게 가져가시려고요?”
“당연히 비용을 지불해야지요.”
“무엇으로 지불하실 겁니까?”
‘수수께끼를 하자는 건가?’
슈텐달 남작은 왕질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국왕께는 황금으로 드렸습니다만······.”
왕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금도 좋지만, 황금으로는 길을 못 뚫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멕 나이트로 주세요.”
“······!”
슈텐달 남작도 염두에 두고 있던 품목이기는 했지만, 첫 만남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요구해 올 줄은 몰랐다.
멕 나이트를 확보하여 반발하는 군벌과 부족들을 과감하게 치겠다는 뜻!
부르사의 복잡한 판도는 멕 나이트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부르사 중부의 새 통치자가 무척 과감한 성격이라는 것.
“우리 제국에서 멕 나이트가 들어오면 문제가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중부를 지원해 온 것은 아우로라 연합이었다.
그런데 왕질은 필센 제국 사업가에게 멕 나이트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아우로라 연합에서 지원을 강화해 내전이 더욱 격화될 수도 있고, 그 결과로 기존의 철광마저 운반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왕질은 개의치 않았다.
“원래 복잡한 나라였는데 좀 더 복잡해진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슈텐달 남작은 예의가 바르면서도 거칠고 야심이 가득한 부르사 중부의 새로운 통치자를 마주하여 가슴이 떨렸다.
‘새로운 통치자가 통이 크구나!’
왕질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조용히 넘겨주시면 더 좋죠.”
“허허허!”
슈텐달 남작은 왕질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뒤 국왕파의 영역으로 가서 현재 자신이 보유한 철광산 인근에 새로 철광 개발이 가능한지 검토했다.
두 가지 방법을 다 채택할 생각인 것이다.
부르사를 떠나기 전, 행정관 칼이 말했다.
“남작님, 왕질은 영악한 인물입니다. 우리나라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여 손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짐작하고 있어요.”
“그럼······?”
“고민해 봐야지요.”
“알겠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편지로 물으셔도 됩니다. 바쁘신데 매번 오가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작님의 사업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러지요.”
슈텐달 남작은 부르사 항에서 철광석을 실은 아인베크 해운의 벌크선을 타고 필센 제국으로 향했다.
“멕 나이트라······.”
멕 나이트의 해외 수출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정식 수출로는 어렵다는 뜻.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위험이 동반될 뿐.
그래도 이번 부르사 출장으로 슈텐달 남작은 많은 것을 얻었다.
큰 사업도 사장이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필센 제국으로 돌아와 바덴에게 부르사에서의 일을 이야기한 뒤 그는 곧바로 아라드 왕국으로 떠났다.
아라드의 철광 개발 건도 아라드 왕국 고위층과 직접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남부선 철도를 타고 국경에 도착한 슈텐달 남작은 남방군 1군단에 새로이 충원될 대규모 멕 나이트 부대의 이동을 목격했다.
“남부 전선은 유리하다고 들었는데 새로 100대가 넘게 동원되다니!”
아라드 왕국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슈텐달 남작이 아라드 왕국의 전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라드 왕국에서의 싸움이 끝난다면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
이스타드 변경에서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우로라 연합군 1개 전단 접근 중!”
감시병의 보고를 들은 6전단과 이스타드 해방 전선 지휘부는 한데 모여 작전을 확인했다.
이미 여러 차례 논의해 왔기 때문에 질문이나 의문은 없었다.
루산이 작전의 주요 내용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필센 제국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전단 본대는 최대한 뒤로 빠져서 레오파드를 적에게 노출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다만, 주요 지점에 라이트닝을 숨겨 통신으로 적의 움직임을 빠르게 전해야 합니다.”
“알겠소.”
“이미 대피를 다 했겠지만, 남아 있는 주민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세요.”
“그러겠습니다.”
“기동 부대는 유인 작전을 시작합니다. 성능이 크게 떨어지는 만큼 정면으로 붙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해방 전선 대원들은 우리 제국군 파일럿들의 지시에 잘 따라주길 바랍니다.”
“걱정 마시오.”
마침내 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우로라와 필센 제국의 모델이 뒤섞인 낡은 멕 나이트 100여 대가 변경 본부 서쪽 공터에 대기하고 있다가 굴다크 공작 휘하의 기동 전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겁을 먹은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낡은 멕 나이트의 요란한 관절음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것이 틀림없다고 보증해 주는 것 같았다.
끼이익- 찌그덕-
끼이익- 찌그덕-
[지금 저런 고물들로 우리 군에 맞서겠다는 건가? 허, 참!]
[이 정도면 함정이라도 따라가야지.]
이것은 자존심과 기세의 문제였다.
변경 본부 서쪽은 확 트인 평원이라 매복할 곳도 없었다.
전단장이 명령을 내렸다.
[추격하라!]
굴다크 공작군 4군단 2전단 멕 나이트 100대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쿵쿵쿵쿵-
쿵쿵쿵쿵-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을 울리며 달리는 와중에도 앞으로 크게 돌출하거나 뒤로 처지지 않는 굴다크 공작군 멕 나이트 기동 부대!
요란하게 삐거덕거리며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엉망진창 흩어져 달아나는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
양군의 첫 번째 대면은 그렇게 강렬한 대비를 보이며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