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굶고 싶으면 안 해도 돼
188. 굶고 싶으면 안 해도 돼
이스타드의 변경은 주민을 이주시켜 개척촌을 건설하고 인간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필센 제국의 변경과 많이 달랐다.
오로지 괴수 사냥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변경의 주민들은 괴수 사냥꾼들의 가족이거나 괴수 사냥꾼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거나 짐승을 사냥하거나 작은 공장을 운영해 생필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괴수 사냥은 꽤 많은 수입을 올리는 일이었기에 사냥 수입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구입해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돈으로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혹독한 북방의 겨울나기를 위한 삶의 방식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침 북방 마무투스의 대이동 시기이긴 하지.”
비어슨이 말했다.
“마무투스가 뭔데?”
바이크의 질문에 루산이 대답했다.
“코끼리와 닮았는데 덩치가 더 큰 녀석이야.”
“코끼리보다 덩치가 더 크면 괴수급인데요?”
“뭐, 그렇게 보기도 해.”
그때 비어슨이 말했다.
“마무투스는 맛이 별로 없던데······.”
“먹어 봤어?”
바이크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비어슨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변경에서 내가 모르는 녀석은 없다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보로츠가 끼어들었다.
“입맛이 까다로운가 보군. 그 정도면 먹을 만한데 말이야. 마무투스가 딱이야.”
이스타드 변경은 광활한 면적에 비해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부 인근 개척촌들과 중간중간 들어서 있는 작은 도시들, 그리고 사냥 캠프 역할을 하는 전진 기지 수십 개를 포함하면 2만 명은 족히 넘었다.
거기에 아우로라 대륙에서 넘어온 사냥꾼 포로와 아우로라 연합군 포로들이 2천여 명.
이들이 긴 겨울을 나려면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무리 지어 이동하는 거대한 마무투스만큼 적합한 사냥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냥감은 마무투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끼와 여린 풀을 찾아 이동하는 타란드루스(거대한 뿔을 달고 있는, 사슴을 닮은 초식동물)도 있었고, 원시의 초원을 누비는 타우루스(긴 털로 뒤덮인 사나운 소)도 있었다.
강과 호수 아래에는 먹을 수 있는 물고기도 많았다.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면 사냥이 쉽지 않을 뿐.
“일단 마무투스 먼저 잡고 다른 것들도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죠.”
루산의 말에 보로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은 울젠 남작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겨울을 나야 할지도 모르니 적이 다시 찾아오기 전에 사냥을 해야겠습니다.”
“음.”
울젠 남작도 수긍했다.
“레오파드 라이트닝 30대, 스피드 30대를 동원했으면 합니다.”
“굳이 짐승을 사냥하는 데 우리 멕을 쓸 필요가 있소?”
“옛날부터 사냥은 군사 훈련의 일환이었습니다. 6전단 파일럿들과 이스타드 변경 파일럿들은 당분간 하나의 부대로 움직이게 될 텐데, 손발을 맞춰 봐야죠.”
울젠 남작은 레오파드를 아끼고 싶었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세척하고 윤활유를 갈기도 했지만, 제대로 수리나 정비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 마구 사용해서는 곤란했다.
그러나 이스타드 해방 전선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6전단 파일럿들이 이스타드의 낡은 멕을 타고 작전을 수행할 필요도 있었고, 그동안 이스타드 파일럿들은 레오파드를 타고 이동할 필요도 있었다.
합동 작전을 펴야 하는 것이다.
“알았소. 그렇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전단장님.”
루산이 굳이 레오파드 스피드와 라이트닝을 동원한 까닭은 전투 훈련을 겸해 양측의 손발을 맞춰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일단 빠르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이스타드의 멕들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타드 변경 파일럿들에게 레오파드 라이트닝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가격은 이스타드에서 사용하는 중고 멕 나이트보다 다소 높지만 유지비는 훨씬 낮고, 중량이 밀려 대형 괴수를 상대하기가 부담스럽지만 속도가 빨라 중소형 괴수를 몰이 할 때 훨씬 수월한 멕 나이트.
애초에 변경용으로 개발한 멕 나이트라서 써 보면 충분히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 대라도 더 팔면 좋지.’
그렇게 루산은 레오파드 라이트닝 30대, 레오파드 스피드 30대를 동원해 사냥에 나섰다.
파일럿은 6전단 파일럿 60명, 변경 파일럿 60명을 데리고 가서 2인 1멕 체제로 운용하기로 했다.
신타르를 타는 기동 정찰병도 100명이나 동원하고 멕 워커도 50대를 데리고 갔다.
등에 철제 바구니를 짊어지고 있는 낡은 아이언 워리어 한 대가 사냥을 나가는 행렬 뒤를 기우뚱기우뚱 따라갔다.
비어슨의 멕 나이트였다.
***
그동안 겨울나기를 위한 사냥을 벌인다 해도 이렇게 규모가 큰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식료품은 변경 밖에서 들어온 것을 구입해 먹었기 때문에 많이 사냥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냥도 전진 기지마다 따로 이루어졌다.
기껏해야 멕 나이트 한두 대를 중심으로 신타르 정찰병 10여 명이 몰이 하는 방식으로 사냥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원한 멕 나이트만 60여 대, 신타르는 100마리나 되었다.
규모가 크다 보니 사냥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비어슨이 잘난 체하며 나섰다.
“멕 나이트가 없던 시절에도 북방 변경 사람들은 마무투스를 대량으로 사냥해서 겨울을 났지.”
“그 큰 걸 멕 나이트도 없이 어떻게 잡아? 창칼로는 두꺼운 가죽이 뚫리지도 않을 텐데?”
바이크가 궁금하여 물었다.
“지형을 이용하는 거야. 마무투스의 이동로에 있는 절벽에 숨어 있다가 마무투스가 지나가면 깜짝 놀라게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는 거지. 놀라 절벽에서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 어때?”
“오!”
“한두 마리 잡고 만족할 게 아니잖아. 뛰어다니며 일일이 잡을 거야? 한 번에 끝내고 더 맛있는 녀석들을 잡으러 가자고!”
잘난 체하는 태도가 거슬렸지만, 그의 해박한 변경 지식에 이스타드의 사냥꾼들도 결국 귀를 기울였다.
“주의할 게 있는데, 이동하는 마무투스 무리 주위에는 육식 괴수들이 따라붙어. 벨로키나 데이노 같이 빠르고 사나운 녀석들이 무리에서 떨어지는 마무투스를 노리고 주변을 어슬렁거린단 말이야.”
벨로키나 데이노에 공격을 받는다 해서 멕 나이트가 부서지지는 않지만, 장갑판은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바실리스크나 타르보, 미커가 따라붙기도 하고.”
이 녀석들과 맞붙으면 무게에서 밀려 멕 나이트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는 이 녀석들을 견제하고, 일부는 마무투스를 의도한 방향으로 몰이 해야지.”
이스타드 사냥꾼들은 비어슨의 말을 알아들었다.
보로츠가 말했다.
“일단 마무투스 무리를 발견하는 게 먼저야. 그 뒤에 절벽 지형 근처에서 육식 괴수를 퇴치하고 마무투스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면 되겠군.”
“음!”
“그렇게 하지.”
사냥꾼들이 찬성했다.
곧이어 조가 편성되고 마무투스 무리를 발견하기 위해 레오파드 라이트닝들이 흩어져 나갔다.
비어슨은 마무투스 무리가 괴수들의 천국을 통과해 산맥 남쪽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 산맥 북쪽의 사정은 전혀 몰랐다.
반면 이스타드 변경 사냥꾼들 가운데에는 마무투스 이동 경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굳이 멀리 떨어진 괴수들의 천국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원시의 땅을 한참 동안 헤매던 사냥꾼들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마무투스 무리를 발견했어!]
레오파드와 신타르 정찰병들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멀리서부터 마무투스의 이동을 알 수 있었다.
뿌오오오오-
마무투스의 울음소리.
우르르르르-
육중한 동물들이 대규모로 이동하여 땅이 울리는 소리.
메마른 평원에는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 하늘을 덮었다.
거대한 멕 나이트들도 자연이 연출한 장관 앞에서는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이대로 남쪽으로 가면 협곡 지대가 나온다. 그쪽으로 몰이 하려면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해!]
[알았다!]
레오파드와 신타르들이 땅을 흔들며 이동하는 마무투스 무리 옆에서 달렸다.
뿌오오오오-
뿌오오오오-
건조한 날씨에 강물이 마르고, 마무투스 무리가 바짝 마른 강을 건넜다.
일부는 강물이 말라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을 마시려고 웅덩이 주위에 달라붙어 목을 축였다.
마무투스 무리가 강에 달라붙어 남아 있던 물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바이크가 루산에게 물었다.
[지금 쳐도 되지 않을까요?]
[휩쓸리면 곤란할 수도 있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괴수들을 어떡하려고? 처음 계획한 대로 해.]
[네.]
마침내 협곡 지대와 가까운, 마무투스의 대이동 경로에 도착한 사냥 팀은 역할을 나누어 기다렸다.
- 준비가 되면 시작할 텐데, 신타르 정찰병은 마무투르 무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
보로츠가 주의를 준 뒤 마나 통신기로 말했다.
[여기서 협곡 지대까지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아! 포위망이 풀리지 않도록 잘 감싸서 몰고 가야 해!]
[알았소!]
[그럼 시작한다!]
레오파드 스피드와 라이트닝들이 일제히 소음 발생기를 작동시키며 이동하는 마무투스 무리의 옆구리로 달려들었다.
- 애애애애애애애!
- 삐유삐유삐유유!
- 애애애애애애애!
마무투스 무리가 깜짝 놀라 방향을 바꿔 달아나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이동하다 말고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포위망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경 써!]
레오파드 스피드들이 간격을 크게 유지하여 반원형 포위망을 유지한 채 마무투스 무리를 몰아붙이고, 레오파드 라이트닝들은 포위망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마무투스들을 삼지창으로 찔러 의도한 방향을 유지하게 했다.
츠쿵츠쿵츠쿵-
경쾌한 발놀림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마무투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레오파드 라이트닝에는 모두 이스타드 변경 파일럿들이 타고 있었다.
[오! 이거 참 좋군! 가벼워서 그런가? 방향 전환이 빨라!]
[신타르와 경주해도 이기겠는걸.]
[당연하지! 게다가 유지비가 아이언 워리어의 4분의 1도 안 된다더라고.]
[정말인가?]
[그럼! 필센 제국군 작전 참모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야.]
자신의 중고 멕 나이트가 상할까 봐 조심조심 타던 이스타드의 변경 사냥꾼들은 빠르게, 마음껏 내달리는 라이트닝의 속도감에 흠뻑 빠져들었다.
조종실 안에 있어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마치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듯한,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츠쿵츠쿵츠쿵-
삼지창으로 마무투스를 찌르거나 배를 후려쳐 방향을 유지하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원시의 초원에서 마무투스를 방목하는 발 빠른 목동이 된 것 같았다.
레오파드의 몰이에 마무투스 무리가 옆으로 크게 떨어져 나가자 대이동 행렬이 흩어지고 육식 괴수들이 따라붙었다.
레오파드가 몰아가는 방향으로도 상당수의 괴수들이 달려왔다.
엄청난 먼지 구름 속에 숨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육식 괴수들의 핏발 선 눈동자가 무시무시했다.
특히 포위망에 갇힌 채로 서쪽으로 이동하다 자꾸 남쪽으로 방향을 틀려 하는 마무투스를 막기 위해 레오파드 라이트닝과 함께 고군분투하던 신타르 정찰병들은 몰려오는 중대형 육식 괴수들을 보고 기겁했다.
[포위망은 라이트닝과 신타르 정찰병이 맡고, 스피드가 육식 괴수를 퇴치해!]
[알았다!]
6전단 파일럿들은 즉시 방향을 틀어, 몰려오는 괴수들을 향해 달려갔다.
마나 진동 대검에 빛이 일렁이고, 그 빛이 번쩍번쩍 춤을 추자 괴수들이 픽픽 쓰러졌다.
루산과 시에나도 괴수들이 신타르 정찰병을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해 한동안 칼춤을 추었다.
마무투스의 대이동로에서 협곡 지대까지는 상당히 멀었다.
풀이 다 시든 초원과 메마른 작은 강을 몇 개 지나야 했다.
그러나 사냥 팀은 포위망을 공고히 유지한 채 마무투스 떼를 몰아 무사히 벼랑 끝에 도착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속도 늦추지 말고!]
보로츠는 서로 충돌하는 지시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사냥에 참가한 6전단 파일럿들과 이스타드 사냥꾼들은 놀랍게도 모순되는 그의 지시를 이해했다.
벼랑을 발견한 마무투스들이 본능적으로 속도를 늦추며 목 놓아 소리를 질렀다.
뿌오오오오!
뿌오오오오!
그러나 사냥 팀 파일럿들은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마무투스 무리를 밀어붙였다.
소음 발생기의 소리도 더욱 커졌다.
- 애애애애애앵!
마침내 마무투스 무리가 벼랑 아래로 줄줄이 떨어졌다.
뿌오오오오!
뿌오오오오!
뿌오오오오!
거대한 마무투스 수백 마리가 슬피 울며 떨어지는 광경은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었다.
자연의 거대한 흐름을 깨뜨렸다는 데 대한 놀라움과 이 놀라운 일을 해낸 데 대한 자부심, 협력으로 이룩해 냈다는 전우애와 뿌듯함 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6전단 파일럿, 이스타드 사냥꾼 모두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다들 멍하니 있지 말고, 마무리 작업을 해. 멕 워커 불러서 옮겨야지. 벼랑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안 그러면 괴수들 좋은 일만 시킨 거야.]
비어슨이 낡은 아이언 워리어를 타고 다가오며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든 사냥꾼들은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비어슨이 레오파드들이 잡은 괴수의 생명 구슬을 채취하는 동안, 멕 워커들뿐 아니라 멕 나이트들도 먼 길을 돌아 벼랑 아래로 내려가서 무거운 마무투스를 옮겼다.
이것들을 여러 전진 기지까지 나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반한 뒤에도 해체하고, 훈제하고, 염장하고, 말리고 하느라 전진 기지 사람들은 쉴 새가 없었다.
포로들도 이 작업에 동원되었다.
“굶고 싶으면 안 해도 돼.”
이 말 한마디에 포로들도 마무투스 손질 작업에 기꺼이 동참했다.
사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짧으면 4개월, 길면 6개월 동안 먹을 식량을 비축해야 했기 때문에 사냥 팀은 계속해서 원시의 땅을 오가며 몰이사냥을 했다.
마무투스, 타란드루스, 타우루스 같은 짐승들을 대량으로 잡아 운반하고 손질하고 저장해 나갔다.
6전단 파일럿들과 이스타드 해방 전선 사냥꾼들은 함께 사냥을 하며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내렸다.
“와! 예뻐요!”
시에나의 반응에 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11월도 되지 않았는데, 눈이 내린 것이다.
아우로라 연합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스타드 변경에서 얼마나 더 발이 묶이게 될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 혹은 불행하게도 - 아우로라 연합군이 내리는 눈을 뚫고 이스타드 변경으로 다가왔다.
“식량 비축 작업을 중단하고, 이스타드 해방 전선 대원들과 6전단 파일럿들은 전원 변경 본부로 집합하라!”
울젠 남작의 명령이 각 전진 기지로 빠르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