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뚫거나 죽어라
189. 뚫거나 죽어라
보고를 받고 한동안 말을 잃은 굴다크 공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병사들만 돌아왔다고? 멕 나이트 100대, 멕 워커 30대, 군마 200필을 모두 잃고 병사들만?”
그의 언성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분노가 잔뜩 서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각하!”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른다고?”
“···네.”
“허!”
굴다크 공작이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변경에 용이라도 나타나 우리 멕 나이트만 집어삼키기라도 했단 말인가!”
4군단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굴다크 공작은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는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가문의 위세만으로 아우로라 연합군의 한 갈래를 책임지는 사령관직에 오른 것이 아니다.
과거 대전쟁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망한 뒤 떨어져 나가려는 가신 가문들을 단호하게 휘어잡고 남아 있는 멕 나이트를 모두 동원하여 남쪽 대륙에 식민지를 넓힘으로써 기울어 가던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일을 시작한 때가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용맹과 지혜, 과감성과 결단력을 갖춘 굴다크 공작은 결코 분노로 부하들을 휘어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이스타드 변경 사냥꾼들이 보유한 기체가 100대, 우리 아우로라 사냥꾼들의 기체가 200대, 변경 주둔군의 기체가 60대야. 변경의 괴수 사냥꾼들이 낡은 기체를 타고 우리 주둔군과 우리 사냥꾼들을 물리쳤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지.”
“······.”
“다른 부대가 있어.”
“네?”
“다른 부대가 변경으로 숨어든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돼.”
“하지만, 이스타드 왕국을 비롯해 필센 북쪽 나라들을 우리 군이 통제하고 있는데 어떻게 변경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놈들을 잡아 심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어차피 해치워야 할 놈들이 아닌가?”
“마, 맞습니다!”
“멕 나이트 100대 정도는 가뿐히 물리칠 정도의 병력이 들어온 거야. 기동 군단급 병력이 들어왔다고 보는 게 맞겠지. 다만, 멕 나이트 전력만 들어왔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병사들을 왜 체포하지 않고 쫓아 버리기만 했겠어? 포로를 감시할 만한 병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나?”
굴다크 공작이 결론을 내렸다.
“동쪽에서 들어갈 수는 없지. 필센 녀석들이 산맥을 넘었거나 원시의 땅을 멀리 우회하여 서쪽에서 이스타드 변경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지원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기는 어려워. 막대한 피해를 입을 테니까. 어쨌든 군단급 규모의 멕 나이트 부대가 이스타드 변경을 장악하고 우리 배후를 찌르려 하는 거야. 누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과감한 일을 벌인 거지.”
군단장은 군단급 멕 나이트 부대가 산맥을 넘었을지 모른다는 말에 의문이 들었다. 멕 나이트가 아닌 사람도 산맥을 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타드 변경에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는 공작의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타드 변경 사냥꾼들이 낡은 멕 나이트로 굴다크 공작군을 해치웠다는 것은 수수깡으로 만든 무기를 들고 철제 무기를 든 군대를 무찔렀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만큼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최소한 군단급 규모의 병력을 변경에 투입해야겠군요?”
“쯧쯧쯧.”
굴다크 공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적에게 끌려다녀서 어떻게 이기겠다는 건가?”
“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1개 군단급 전력이 이스타드 변경에 있다? 그 말은 전선에 1개 군단급 전력이 줄어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아!”
“더 강하게 쳐서 전선을 뚫어 버리면 된다.”
적이 의도한 대로 끌려가지 않고 적의 계책을 역으로 이용한다!
4군단장은 과감하고 용맹한 굴다크 공작의 결정에 탄복했다.
“변경은 4군단이 맡는다. 들어가서 무턱대고 싸우지 말고 시간만 끌어. 어차피 지원 병력과 보급 물자가 충분하지 않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파탄이 나게 돼 있어.”
“알겠습니다, 각하!”
<4군단>
1전단(1전대와 2전대, 변경에 주둔하다 궤멸)
2전단(이번에 출동해서 멕 나이트 전부 상실)
3전단
4군단장은 1전단 3전대와 3전단, 그리고 굴다크 공작이 특별히 붙여 준 마나포 부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다행히 1전단 3전대는 작년에 이스타드 변경을 제압했던 부대라 변경의 지리와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적이 군단급 규모라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지만, 완전히 소탕하라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끌라는 명령이었다.
수행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한편 굴다크 공작은 필센 제국 북방군 3군단과 대치하고 있는 휘하 부대의 전대장 이상 지휘관들을 모두 불렀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는 지휘관들을 젊은 공작이 매서운 눈길로 훑었다.
굴다크의 용맹한 지휘관들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공작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남쪽 전선이 어렵다 한다.”
아라드 왕국의 전쟁 소식은 지휘관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북쪽은 어떠한가?”
지휘관들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굴다크 공작이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싸우다 죽으면 그대의 자식들은 내 밑에서 장군이 될 것이요 영주가 될 것이다!”
멕 나이트 부대의 지휘관들은 공작이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전의에 몸을 떨었다.
“전선을 뚫거나 죽어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굴다크 공작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북부 전선을 강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방군 3군단이 파 놓은 참호와 함정에 아군 멕 나이트가 빠지면 그것을 밟고 타 넘어 전선을 짓밟았다.
거대한 멕 나이트들이 보이는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북방군 3군단은 악착같이 버텼지만, 방어선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
희끗희끗 내리는 눈을 뚫고 나타난 새로운 적.
“멕 나이트가 약 140대. 멕 워커 50대. 마나포 80문, 기마 정찰대 200기, 3개 보병 연대, 보급 물자 200수레. 이상입니다!”
다가오는 적을 감시하던 파일럿이 말했다.
“똑같이 유인 작전으로 섬멸하는 것이 어떻소?”
보로츠가 의견을 냈다.
“그게 좋겠소.”
울젠 남작이 보로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50여 대의 낡은 멕 나이트를 희생시켜 90여 대의 멕 나이트와 30여 대의 멕 워커를 손상 없이 획득한 작전.
심지어 적들은 유인 작전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몰랐다.
인명 피해도 거의 없다 보니 반대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루산이 생각할 때 이전 상황과 지금 상황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 다가오는 적은 자신의 동료가 어떻게 당했는지는 몰라도 크게 당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일 것이 확실했다.
유인 작전이 통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그리고 루산은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나약함을 보이기 위해 낡은 멕 나이트를 희생시켰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희생시킨 멕 나이트는 전투에 활용하기 어려울 만큼 무척 오래되고 부식이 심한 것들이었다.
이제 그 정도로 상태가 나쁜 기체는 없었다.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기체를 희생시키기는 아까웠다.
그렇다는 말은 가뜩이나 조심하고 경계하는 적을 유혹할 만한 미끼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래도 유인 작전을 반대할 필요는 없었다.
상황을 보아 가며 대응하면 되는 것이다.
“작전 참모, 전처럼 유인 부대를 이끌어 보겠소?”
“알겠습니다, 전단장님.”
루산은 울젠 남작의 말에 기꺼이 대답한 뒤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를 데리고 굴다크 공작군 4군단 앞에 섰다.
[참모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볼까요?]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 하나가 웃으며 루산에게 물었다.
그들은 새로이 나타난 적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벌써 아우로라 사냥꾼, 변경 주둔군, 진압군을 합쳐 무려 300대 이상의 멕 나이트를 해치웠던 것이다.
발 빠른 레오파드 부대가 변경 전역에 흩어져서 제각각 괴수를 잡던 아우로라 사냥 팀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내고 루산의 유인 작전으로 적의 기동 전단을 수렁 늪지로 끌어들여 만들어 낸 결과였지만, 어쨌든 이스타드 변경 사냥꾼들이 직접 참여해 거둔 성과여서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해 보세요.]
루산이 허락하자 이스타드 변경 파일럿이 앞으로 나가 도발했다.
- 바다를 건너온 아우로라 도적놈들아!
멕 나이트 외부 확성기에서 나온 변경 사냥꾼의 목소리가 눈발을 해치고 변경 본부 동쪽의 너른 평원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괴수 부산물이 갖고 싶으면 엎드려 빌어라! 제발 괴수 피 한 바가지만 갖게 해 주세요~! 괴수 뼈 두 개만 주세요~! 그렇게 사정하면 생각 좀 해 볼 텐데, 도둑놈의 새끼인가, 남의 땅을 뺏으려 하면 되겠느냐?
- 확 괴수 뱃속에 다 처넣어 버릴까 보다! 우리한테 깝친 너희 동료 도적놈들도 이제 다 소화 됐을 거야!
마지막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속은 후련했다.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몸을 떠는 아우로라 파일럿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그때 굴다크 공작군 멕 나이트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오른발 왼발, 걸음까지 정확히 맞추며 걸어오는 굴다크 공작군 4군단 멕 나이트 부대의 행진은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앞으로 나가 적을 도발하던 변경 파일럿이 찔끔하여 물러섰다.
‘통했나?’
루산이 반가워하며 부대를 뒤로 물렸다.
[자! 지금 모두 무질서하게 퇴각합니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낡은 멕 나이트 100여 대가 눈발을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멕을 버리고 달아나지는 않았지만, 관절이 고장 난 듯 일부러 넘어지기도 하고, 겁이 나 주변이 보이지 않는 듯 동료 멕과 부딪치기도 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그런데 굴다크 공작군 4군단은 변경 본부 건물 서쪽 평원까지만 질서 있게 행군하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변경 본부를 장악하고 본부 주위에 마나포를 설치했다.
그와 동시에 보병 연대는 건물을 복구하고 기마 정찰병들은 주변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누가 봐도 변경 본부를 장악하고 눌러 앉아 천천히 이스타드 변경 상황을 파악하겠다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볼프강이 루산에게 마나 통신을 걸어왔다.
[변경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지 않으면 굴다크 공작이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소?]
[곤란해지죠.]
변경에서 괴수 부산물을 획득하고자 굴다크 공작에게 많은 물자와 지원군을 보낸 아우로라의 유력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괴수 부산물 생산이 막힌다면 굳이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 빨리 해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오. 저 정도 규모의 병력을 변경으로 빼도 상관없다는 건가? 흐음······.]
볼프강을 비롯한 6전단 지휘관들은 고민에 빠졌다.
루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 마나포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멕 나이트 140대와 마나포가 버티고 있는 변경 본부를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유인 작전에 넘어오지 않는다면 사실상 변경 본부를 공격하기 어려웠고, 아우로라 연합군이 변경 본부를 장악하고 있으면 이곳을 통해 들어오는 물자는 완전히 끊기게 된다.
‘변경을 막아둔다고? 괴수 부산물 생산을 포기한다고? 그러면 곤란해질 텐데?’
루산은 굴다크 공작의 생각을 추측하느라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이스타드 변경 파일럿이 조심스럽게 마나 통신을 걸어왔다.
[참모님, 조금 전에 흔든 꼬리가 그리 유혹적이지 않았나요? 다시 한번 흔들어 볼까요?]
루산이 웃으며 말했다.
[충분히 유혹적이었어요. 쫓아가서 박살을 내고 싶었을 겁니다. 다만······.]
[······?]
[두려움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나 보죠.]
[아! 그런 걸까요? 하하하!]
루산은 이스타드 변경 사냥꾼의 자신감을 북돋워 주고 적들을 지켜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눈발이 점점 강해져 멕 나이트의 머리와 어깨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