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흥정은 해 봐야죠
193. 흥정은 해 봐야죠
[멈추지 마라! 돌격!]
굴다크 공작군의 멕 나이트는 필센 제국 북방군 3군단이 파 놓은 멕 나이트 저지용 참호와 함정을 악귀처럼 돌파해 나갔다.
[다음 지점으로 퇴각하라!]
북방군 3군단은 죽음을 불사한 굴다크 공작군의 맹렬한 공격에 밀려 점점 남쪽으로 물러났다.
필센 제국과 이스타드 왕국의 접경지대에는 양군의 부서진 멕 나이트와 천막들이 흉물스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승리를 거두고 있다지만, 굴다크 공작군의 피해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멕 나이트 손실은 굴다크 공작군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굴다크 공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승자가 다 갖는 거야. 모두 다 쏟아부어도 상관없다. 가라!”
굴다크 공작은 휘하의 3개 군단을 이스타드 왕국에서 필센 제국으로 넘어가는 접경지대 - 오랜 세월 왕래하며 생긴, 산맥 사이에 난 완만한 도로 - 에 몽땅 밀어 넣었다.
처음에 아우로라 연합군이 북부 전선에 투입한 전력은 굴다크 공작이 지휘하는 2개 군단으로 멕 나이트 600대 규모였다.
그러던 것이 이스타드 왕국까지 전격적으로 진군하고 결국 변경 땅을 차지하자 괴수 부산물을 아우로라까지 무사히 운송하기 위해 각국에서 북부 전선으로 병력을 경쟁적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남쪽 전선이 밀리자 아우로라 연합 총사령부에서도 승리를 거둔 북쪽 전선을 적극적으로 밀어 주었다.
굴다크 공작 또한 자신이 직접 필센 제국으로 쳐들어가 이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공작 가문의 병력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북부 전선에는 굴다크 공작군만 4개 군단이 들어와 이스타드 왕국에서 북방군 3군단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필센 제국 북방군 1군단과 2군단은 이스타드 연합에서 파견된 다른 부대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동안 숱한 전투를 치르며 적지 않은 멕 나이트가 부서졌으나 페르보 제국에서 적극적으로 충원해 준 덕에 굴다크 공작군 4개 군단은 정수를 늘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변경 구역에서 변고가 발생하자 4군단을 그쪽으로 파견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해 나머지 3개 군단으로 전선을 돌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려 멕 나이트 900대에 달하는 전력!
그에 맞서는 북방군 3군단은 전시 증편 절차에 들어가 있었으나 이스타드 왕국에서 병력을 잃고 굴다크 공작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피해가 누적되어 5개 전단의 멕 나이트 수가 350여 대 - 새로 편성된 6전단의 레오파드 150대는 루산의 제안에 따라 원시의 땅을 우회하여 이스타드 변경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 밖에 되지 않았다.
900 대 350.
1 대 1로 손상이 되더라도 550대가 남는다.
2 대 1로 손상이 되더라도 200대가 남는다.
‘승리만 한다면 아우로라 연합에서는 기꺼이 병력을 계속 보내온다!’
굴다크 공작은 그것을 믿었고 알았다.
마침내 굴다크 공작군은 이스타드 왕국과 필센 제국을 잇는 산간 도로를 지나 중간중간 존재하는 작은 국경 도시들을 점령하며 필센 제국 북서쪽 끝에 있는 플라네그 지방에 도착했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굴다크 공작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물러난 북방군 3군단이 마지막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그곳을 돌파하면 필센 제국 영토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
‘그 결정이 실수였던가!’
아이젠 자작은 레오파드 150대와 루산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그러나 후회할 시간도 없었다.
“멕 나이트 저지용 참호 건설에 모든 병력을 투입하라! 이 지방에 있는 민간 멕 워커를 모두 징발해 작업에 투입하라!”
북방군 3군단은 부족한 멕 나이트 전력을 멕 워커와 보병을 투입해 지형과 참호 전술로 보완하면서 버텼다.
“군단장님! 2전단이 위태롭습니다!”
“3전단을 투입해! 멕 나이트 전력을 함부로 잃어서는 안 된다!”
“군단장님! 외곽 참호선이 뚫렸습니다!”
“서서히 물러나! 4전단과 5전단이 적을 막아라! 병사들과 멕 워커들이 새로운 참호를 팔 시간을 벌어 주어야 한다!”
“원군이 오기는 오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라! 수도 군단이 출동할 것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서서히 물러나며 플라네그 역을 사수해야 한다!”
아이젠 자작은 굴다크 공작군이 강공을 펼쳐 접경지대 거점을 모두 잃고 물러나면서 이미 보고를 했다.
북방군 다른 전선에서는 3군단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지방군은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 둔 채 북방 전선과 동방 전선으로 모두 이동해 있었다.
수도 군단과 근위대가 필센 제국의 마지막 예비 전력이었다.
현재 전시 증편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 전장이 아우로라 대륙으로 옮겨질 때 강력한 공격 부대로 투입될 계획인 수도 군단.
그 수도 군단이 출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받고, 수도 군단 출동 명령을 내리고, 수도 군단이 전투 준비를 갖추고 멕 나이트 운반 화물차를 마련해 플라네그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10일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열흘은 아주 낙관적으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필센 제국은 대전쟁을 맞아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시 증편 작업이 남방군 1군단과 동방군에 집중되어 북방군에는 멕 나이트 충원이 느린 편이었고 수도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북부 전선에 많은 병력이 투입된 상태라 3군단을 구원하기 위해 충분한 병력이 제때 출동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이젠 자작은 그 사실을 알았으나 부하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없어 큰소리를 쳤다.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고 민간인을 보호하며 서서히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멕 나이트들이 막으며 버티는 사이에 병사들은 멕 워커와 함께 새로운 참호를 팠다.
적이 플라네그 역으로 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였다.
땅은 물론 병사들의 마음도 얼어붙어 참호를 파는 작업은 무척 힘이 들었다.
북방군 3군단은 힘겹게, 힘겹게 굴다크 공작군의 공세를 막으며 물러났다.
***
노바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부 전선이 무너진다는 소문이 있어!”
“아우로라 연합군에 패한다는 말이야?”
“그렇다나 봐.”
“그럼 어떡해? 우리나라가 지는 거야?”
북쪽 전선이 위태롭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단순한 유언비어가 아니라 정부 관리, 고위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로부터 나온 소문이라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남쪽 전선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고 사재기가 발생했다.
이 기회에 한몫 크게 보려는 상인들은 식량과 의복, 연료를 매점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사장님, 아라드 왕국으로 보낼 물자를 구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포이어 바겐이 피곤한 얼굴로 보고했다.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의복과 생필품 가격이 올라 처음에 수립한 예산으로는 피닉스 제철에 넘길 물량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바덴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듣고 있었다.
“곡물이야 우리 반달 그룹이 확보하고 있는 물량이 있어서 어느 정도 해소하겠지만, 가격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밀가루 한 포대 가격이 며칠 사이에 열 배 넘게 뛰었습니다. 점점 더 오를 겁니다.”
바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반달 그룹 경영 회의에서 밀가루 가격이 올랐다며 가격을 올리자는 이야기에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고 나온 뒤였다.
“이대로 사재기가 계속되고 매점매석이 이어진다면 정부에서 강력한 단속을 펼칠 겁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기에 밀가루 가격을 올리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하지만, 사장님! 우리가 가격을 올리지 않아도 유통업자들이 우리 제품을 창고에 쌓아놓고 조금씩 고가에 팔 겁니다. 결국 그들 배만 불려 주는 셈이죠.”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가격을 올리지 않을 거예요. 우리 물건을 취급하는 유통업자, 소매상에 분명히 경고하세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거래를 끊겠다고!”
“······!”
“저들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가 직접 유통하면 됩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반달 그룹 식품군이면 충분히 직접 도매업, 소매업을 할 수 있죠. 돈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의 생계를 빼앗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겁니다.”
“음······!”
“반달 그룹의 상품은 절대 가격을 올리지 마세요. 전쟁에서 패해 나라가 망하면 우리 사업도 망한다고 생각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신문에 광고를 싣도록 하세요. 반달 그룹은 전쟁 기간 동안 가격을 올리지 않겠다고. 우리 제품의 소비자 가격을 정해서 알리세요. 그 가격보다 높게 판매하는 상점이 있다면 신고하라고 하세요.”
“네!”
바덴은 필센 제국 백성의 어려움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지 않기로 했다.
단기적인 이득보다 믿음과 신뢰를 얻기로 한 것이다.
다음날 반달 그룹의 캠페인 광고가 모든 신문에 대대적으로 실렸다.
사람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유통업자들은 반달 그룹의 제품을 매점했고, 소매상들도 가격을 높여 팔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반달 식품에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반달 식품은 약속을 지켜 해당 유통업자와 거래를 끊고 소매상에도 한동안 제품 공급을 끊기로 하고, 이를 신문 광고에 실었다.
반달 그룹의 단호한 조치에 유통업자와 소매상들은 차마 반달 그룹의 제품으로 장난을 치지 못했다.
이 일로 반달 그룹은 필센 제국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고, 식품 가격 안정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부와 다른 기업들의 주목을 받는 회사가 되었다.
바덴은 북부 전선 패전의 소문으로 발생한 생필품 사재기와 매점매석 사태를 비판하고 가격을 올리지 않기로 단호하게 결정했지만, 이 상황을 아예 이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상인으로서 필요하고 이익이 되는 일은 기꺼이 해 나갔다.
“이번에는 미리 구입해 놓은 식품 원자재가 있어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원자재 가격을 올려 버리면 우리도 방법이 없습니다. 원자재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반달 그룹이 성장하고 판매량이 늘어날수록 안정적인 식품 원자재 확보는 더욱 중요해진다.
“북쪽 지방이 전체적으로 땅값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하니 이번 기회에 북쪽 지방의 농지와 목초지를 대거 확보할 겁니다.”
“하지만, 사장님. 정말로 전쟁에 패하면 어떡합니까?”
“그때는 그때 생각하기로 하죠.”
“···네.”
바덴은 식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겠다며 필센 제국 북부 토지를 대규모로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상무대신에게 요청했다.
이미 북부에 적지 않은 땅을 구입했지만, 그것은 브레이브 랜드 부지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욱 떨어진 땅값으로 훨씬 넓은 면적의 농경지를 구입하려 한 것이다.
북부의 귀족들은 불안한 북쪽을 피해 황제가 머물고 있고 강력한 군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노바로 완전히 이주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바덴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구입하고 노바 정착을 도와주는 사업을 진행했다.
아무리 땅값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지만, 구입하려는 면적이 넓어 상무대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은행법과 농지법 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덴은 상무대신만 믿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전쟁이 어려워져 필센 제국 북부가 적에 의해 점령된다면 북부에 구입한 농경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안도 마련해 두기로 했다.
“변경 구역 농경지와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도록 할 겁니다.”
“경지 면적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훨씬 넓을 겁니다. 우리 제국의 변경 구역은 1구역부터 8구역까지 있습니다. 변경 본부와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가능한지 변경부에 문의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라드 왕국의 호리아 평원을 확보할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네?”
포이어는 깜짝 놀랐다.
“아라드 왕국에서 가장 넓은 평원입니다. 연이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을 거예요. 재건 비용을 우리가 댄다고 하고 장기 이용이 가능한 방법을 논의해 보세요.”
바덴의 엄청난 스케일에 포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기 임대가 되었든, 장기 공급 계약이 되었든, 그곳에서 나는 농축산물을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라는 거예요.”
“···네, 사장님!”
“어차피 피닉스 제철에 물량을 넘겨야 하지 않나요? 그때 아라드로 슈텐달 남작님과 함께 가서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 호리아 평원 확보 방법을 논의해 보세요.”
“가, 가능할까요?”
“평시라면 안 되겠지만, 모든 게 망가진 이후잖아요. 안 되면 어쩔 수 없더라도 흥정은 해 봐야죠. 그게 상인이에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루산이 시작한 북부 전선 공략 계획은 굴다크 공작을 자극해 북부 전선이 위태로워졌다.
그 소식은 필센 제국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고, 사재기와 매점매석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바덴은 반달 그룹의 이름과 이미지를 필센 제국 전역에 알리고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식품 원자재 공급처를 마련하려 했다.
물론 루산은 자신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호수에 던진 돌멩이가 일으키는 파문에 의해 포이어는 원래 책정했던 예산보다 훨씬 높은 금액으로 아라드 왕국의 재건에 필요한 물자와 생필품을 어렵게 마련해 피닉스 제철의 슈텐달 남작과 함께 아라드 왕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