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우리가 살아야 너희가 산다
195. 우리가 살아야 너희가 산다
[습격이다! 적의 멕 나이트 다수!]
- 애애애애애앵!
숙영지를 지키던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부터 긴급 통신을 수신한 군단 본부에서 즉시 멕 나이트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350대나 되는 적의 멕 나이트에 맞서는 굴다크 공작군 2군단의 기체는 몇 대 되지 않았다.
2군단의 2전단과 3전단은 최전선에 투입된 상태였고, 교대로 숙영지로 들어온 1전단의 멕 나이트들은 야전 정비소에서 장갑판을 교체하거나 정비를 받는 중이었다.
필센 제국 북방군 3군단의 참호를 돌파하며 전투를 치르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굴다크 공작군 파일럿들은 곤히 휴식을 취하다 비상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를 듣고 자신의 멕 나이트가 정비를 받고 있는 야전 정비소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 전에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이 숙영지를 짓밟으며 야전 정비소를 향해 질주했다.
쿵쿵쿵쿵-
굴다크 공작군의 헤비 스틸 몇 대가 곳곳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에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다리 하나씩만 잘라라!]
야전 정비소와 주기장에 머물러 있던 굴다크 공작군의 멕 나이트 수십 대는 마나 진동 대검에 다리 하나가 잘려 쓰러졌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에 가장 좋은 것은 온전한 적의 멕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멕 나이트 열쇠를 수색해 찾아낼 여유도 없었고 설사 온전한 멕을 찾아내더라도 당장 탑승하거나 감시할 병력이 없었기에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멕 나이트 다리를 하나 자른 것이다.
루산은 전투 지휘를 6전단에 맡기고 숙영지 외곽에서 새로운 적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위협적인 적은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작전 수립에는 개입하더라도 현장의 전투 지휘는 6전단이 맡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전단은 정면에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육중한 헤비 스틸을 배치해 도도한 강물처럼 밀어붙이고 측면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레오파드들을 학의 날개처럼 펼쳐 숙영지를 포위해 이곳에 있던 멕 나이트가 한 대도 달아나지 못하게 포위한 채 섬멸했다.
감시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포로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놀란 병사들이 송사리 떼처럼 달아났지만, 내버려 두었다.
[상황 종료! 레오파드 라이트닝들은 통신이 닿도록 정찰 감시망을 구축하고 나머지 부대는 신속히 정렬하여 다음 목표를 향해 이동한다!]
울젠 남작이 지시를 내리자 6전단 파일럿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들도 서둘러 대열을 정비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 부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굴다크 공작군의 후방 병력을 차근차근 짓밟으며 최전선을 향해 남하했다.
***
후방에서 대규모 적 기동 부대가 출현해 아군 숙영지를 공격하며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에 굴다크 공작군 사령부는 발칵 뒤집혔다.
“400대가 넘는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멕 나이트가 우리 뒤를 칠 수가 있는가?”
부하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굴다크 공작이 호통을 쳤다.
“호들갑 떨지 마라!”
그의 부하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공작을 쳐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굴다크 공작이 휘하의 장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적이 변경으로 잠입해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놈들을 막으라고 4군단을 보냈지. 운이 좋아 4군단을 뚫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지만, 생각해 보면 적의 상황이 그리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부하들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4군단을 돌파하고도 400대나 되는 적의 멕 나이트 - 굴다크 공작군은 예상치 못한 후방 공격에 적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가 여기까지 왔다면 적의 군세가 강하면 강했지 약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참모장!”
굴다크 공작이 참모장 슈토프 백작을 불렀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장군들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라는 뜻이었다.
“네!”
슈토프 백작 역시 아군의 후미가 공격받았다는 이야기를 방금 들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굴다크 공작으로부터 어떤 언질도 듣지 못했지만, 주군이 부하들을 안심시키려 한다는 의도는 금세 알아챘다.
호명된 순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 상황과 주군의 뜻을 파악했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슈토프 백작이 장군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한 장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잘됐다는 겁니까?”
“애초에 필센의 북방군은 우리 군에 줄곧 밀려 왔습니다. 이스타드 왕국을 지키지 못했고 필센 북서부 국경선이 뚫렸지요. 그런 저들이 우리 4군단을 돌파할 만큼의 대규모 병력을 우회시켜 우리 군의 배후를 공격하게 했다면 우리 앞을 막고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될까요? 한 줌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음!”
“필센 제국군은 그야말로 없는 병력을 쥐어짜 사활을 걸고 우회 공격 작전을 펼친 겁니다. 저들이 참호와 함정을 파는 까닭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멕 나이트 전력이 충분하지 않으니 교전을 피해 참호와 함정만 파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 해도 참호와 함정을 지나 전선을 돌파하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 정면에는 참호와 함정으로 된 방어선이 가로막고 있고 후방에서 400여 대나 되는 멕 나이트가 막고 있으니 포위된 것이 아닙니까?”
슈토프 백작이 말했다.
“포위 공격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정확한 타이밍에 공격하지 못하면 오히려 병력이 분산되어 각개격파를 초래하지요. 지금이 딱 그렇습니다.”
참모장의 말에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위되었다는 두려움을 떨치고 생각해 보면 적의 병력이 남과 북으로 분리된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산악 지형이라 적의 남쪽 병력과 북쪽 병력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아군이 포위된 것이 아니라 적의 병력이 갈라진 것!
“남쪽에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는 필센 북방군 3군단은 북쪽에서 자기들 별동대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습니다. 서로 연락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남쪽 전선에 마나포 부대와 기동 부대 일부를 남겨 북방군 3군단이 북상하는 것을 막고, 나머지 멕 나이트를 총동원하여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의 별동대를 먼저 물리치면 됩니다. 그런 뒤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쪽 전선을 돌파하는 겁니다!”
슈토프 백작의 말은 사령부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사실 그의 계획은 부족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명성을 얻은 굴다크 공작군의 장군들에게 혼란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침착과 용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굳건한 의지였기 때문이다.
굴다크 공작은 자신의 의중을 십분 헤아려 분위기를 반전시킨 참모장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낸 뒤 사자 같은 눈빛을 뿌리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적의 별동대는 그 수가 많다 하나 지원 부대 없이 강행군하여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마나포 부대와 2군단 1전단은 여기 남아 적을 견제하라! 나머지 멕 나이트는 모두 북쪽으로 이동해 적의 별동대를 섬멸하고 돌아와 배후 걱정 없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해 필센 제국을 짓밟을 것이다!”
굴다크 공작군 지휘관들의 가슴이 전쟁의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시르나크 경!”
“네, 주군!”
“선봉에 서라!”
“알겠습니다!”
굴다크 공작 휘하의 에이스 파일럿 시르나크가 멕 나이트 공작군 진영에 단 세 대만 있는 블랙 드래곤 중 한 대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바람이 불어 쌓인 눈이 휘날리는 가운데 굴다크 공작군의 멕 나이트 700대가 그 뒤를 따라갔다.
***
“우리가 떠날 당시의 방어선에서 많이 후퇴해 있군.”
6전단장 울젠 남작이 망원경으로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고, 수염에는 허연 얼음 알갱이들이 맺혀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루산 역시 정리하지 못한 수염에 얼음 알갱이를 붙인 채 망원경을 들어 남쪽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눈보라가 휘몰아쳐 시계가 넓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희끗희끗한 것들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굴다크 공작군의 멕 나이트가 틀림없었다.
그동안 후방 부대들을 공격하며 여기까지 왔다지만, 최전선의 전력은 건재한 상황.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승산이 거의 없었다.
북방군 3군단 6전단과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은 이미 플라네그 지방에 들어와 있었다.
산지라지만 산맥을 이미 통과했기 때문에 주변의 봉우리들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파일럿들의 피로도가 무척 높은 상태였다.
6전단 파일럿들은 플라네그 지방을 떠나 원시의 땅을 거쳐 이스타드 변경에 도착한 뒤 수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무려 반년 만에 자신들이 주둔한 지역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브 파일럿도 없고 정찰병, 경비병, 정비병 같은 지원 병력도 없이 강행군을 해 왔고,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눈 쌓인 산길을 지나며 계속 전투를 벌여 긴장감이 최고조에 도달해 있었다.
이스타드 변경 사냥꾼들에게 뛰어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로가 더 쌓이기 전에 결전을 치르지 않는다면 싸워 보기도 전에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할지도 몰랐다.
다가오는 적과 지금 맞설 수밖에 없었다.
패배하면 필센 제국 국경이 완전히 뚫릴 수 있지만, 승리하면 북부 전선에서 승기를 가져와 아우로라 연합군을 몰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다가오는 적의 규모가 우리 멕 나이트 수의 두 배는 족히 되겠군요.”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루산이 말했다.
“실질 전투력은 네 배 이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오.”
울젠 남작이 대꾸했다.
루산도 그 의견에 동의했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들을 전력에서 완전히 제외할 필요는 없었다.
전력으로 생각하고 작전을 짜지 않으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정도 규모의 병력을 최전선에서 빼서 우리를 칠 생각을 했다는 것은 적 지휘부가 매우 과감하다는 것이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울젠 남작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구상이 있었음에도 루산의 의견을 물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루산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지쳐서 그렇게 할 수가 없죠.”
“음!”
울젠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더 내리면 후퇴는 아예 불가능할 겁니다. 저 앞 평원에서 결판을 봐야겠죠.”
평원이라지만, 산지 사이에 자리한 작은 평지였다.
“가능하겠소?”
“육중한 방패 부대를 중앙에 세우고 가벼운 레오파드로 측면을 돌아야죠.”
“그래서 적이 너무 많지 않소?”
“3군단에 전령을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야죠. 앞뒤로 동시에 쳐야 합니다.”
“맞는 말이나 저 많은 적을 뚫고 전령을 보낼 수 있을지······.”
“그래도 보내야죠. 앞뒤에서 동시에 치지 않으면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하 중에 레오파드 라이트닝을 오랫동안 타 온 녀석이 있습니다. 가능할 겁니다.”
울젠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전령이 적을 돌파해 남쪽에 있는 3군단에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루산이 덧붙여 말했다.
“현 상황에서 우리가 이길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무엇이오?”
“적의 대장을 치는 거죠.”
“음!”
사실 울젠 남작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 적의 대장 굴다크 공작은 남다른 기체를 타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
적의 진영에 세 대밖에 없는 특별 기체.
물론 쉽지 않겠지만, 레오파드의 빠른 발을 이용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다.
“저도 이번에는 레오파드 스피드를 타고 싶습니다.”
“음? 대장을 잡는 일에 직접 뛰어들겠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소.”
울젠 남작은 루산의 레오파드 전투 경험과 머리를 믿는 것이지 멕 나이트 전투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활약을 직접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오파드 스피드 계열의 멕 나이트는 저보다 잘 타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으음······.”
아라드 왕국에서의 전공은 익히 들었기 때문에 울젠 남작은 허락하기로 했다.
“알겠소. 그렇게 하시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고개를 내려갔다.
루산은 바이크를 불러 지시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너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북방군 3군단에 우리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곧바로 모든 멕을 동원해 달려오라고 전해.”
“적을 뚫고요?”
“뚫든 우회하든 알아서 해.”
루산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바이크는 이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바이크가 비장하게 말하자 루산은 피식 웃었다.
“안 어울리니까 표정 풀어.”
“네? 헤헤헤!”
바이크가 금방 실실거렸다.
그러다 이내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대장님!”
“왜?”
“성공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뭔데?”
“이스타드 파일럿들 중에 가프 용병단에 가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있으면 받아 주세요.”
루산은 의아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지 뭐.”
“헤헤! 고맙습니다!”
“됐어. 출발하기나 해.”
“네, 대장님!”
바이크가 레오파드 라이트닝에 올라탔다.
레오파드 스피드에 탑승한 루산은 레오파드 파워에 탄 시에나를 불렀다.
[내 곁에 바싹 붙어 움직여. 뒤처지지 말고.]
[네, 대장님!]
그때 울젠 남작이 명령을 내렸다.
[전군, 전진하라!]
마침내 정렬을 마친 6전단과 이스타드 해방 전선 멕 나이트 350여 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육중한 헤비 스틸들이 단단한 강철 방패를 들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희끗희끗한 눈보라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지만, 트라비를 비롯한 이스타드 변경의 사냥꾼들은 주저하지 않고 걸어갔다.
두려움이 몸과 마음을 휘감았음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두려움과 함께 거대한 전쟁에 동참한다는 희열과 필센 제국의 숙련된 파일럿들의 고함이 그들의 몸을 계속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줄 맞춰!]
[방패 붙여! 겁먹지 마! 싸움은 우리가 한다!]
[너희가 버텨야 우리가 살고, 우리가 살아야 너희가 산다!]
[왼발, 왼발, 왼발, 왼발-!]
쿵쿵쿵쿵-!
헤비 스틸들이 방패를 들고 줄을 맞춰 나아갔다.
산지에 있는 작은 평원에서 북부 전선의 운명을 가를 커다란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