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심장이 뛰는 한 계속 달려라
197. 심장이 뛰는 한 계속 달려라
[시르나크 경이 당하다니······!]
시르나크가 탑승한 블랙 드래곤이 쓰러지는 모습을, 멀리 떨어진 본진 언덕 위에서 지켜본 굴다크 공작은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분노했다.
개전 이후 얼마나 많은 적의 멕 나이트를 베어 왔던가!
블랙 드래곤이 나타나면 적들은 벌벌 떨었다.
그런 블랙 드래곤이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충격에 빠졌던 굴다크 공작은 이내 분노했다.
그 역시 에이스 파일럿이면서 블랙 드래곤의 주인이었다.
[내가 저 멕 나이트를 부술 것이다!]
굴다크 공작의 블랙 드래곤이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블랙 드래곤이 앞을 막았다.
굴다크 공작군의 또 다른 에이스 파일럿 다후크가 탑승한 블랙 드래곤이었다.
[고정하십시오! 사령관의 발걸음은 가벼워서는 안 됩니다!]
[흐음!]
[적들 사이에 뛰어난 파일럿이 몇 명이 있든 간에 어차피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공연히 변수를 만들지 이 싸움을 어렵게 만들지 마십시오!]
냉정하고 따끔한 진언에 굴다크 공작은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분노를 완전히 삭이지는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다후크 경, 그대가 저자의 목을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주군!]
다후크가 차분하게 대답하고 본진의 병력을 지휘했다.
[2전단은 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고 공작님을 호위하라! 그것으로 우리의 승리는 확고해진다.]
[알겠습니다, 다후크 경!]
[1전단은 당황하지 말고 서서히 물러나 나에게 합류하라!]
시르나크의 지휘를 받아 다가오는 레오파드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나간 1전단 멕 나이트들이 다후크의 명령을 듣고 분을 삼키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루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뒷걸음질을 치는 1전단 멕 나이트들을 향해 돌진했다.
목표는 헤비 스틸 두 대 사이!
- 죽어라!
헤비 스틸의 파일럿들이 자신의 영웅을 해치운 적을 향해 분노의 일격을 가했다.
루산은 왼쪽 헤비 스틸의 공격을 시에나에게 맡기고 오롯이 오른쪽 헤비 스틸에만 집중했다.
투캉!
시에나가 탑승한 레오파드 파워가 방패를 기울여 왼쪽 헤비 스틸의 대검 공격을 막는 사이, 루산의 레오파드 스피드는 두 손으로 꽉 쥔 대검으로 오른쪽 헤비 스틸의 팔뚝을 베고 지나갔다.
촤릉!
장갑판으로 감싼 팔뚝이 대검을 쥔 채 떨어지고 반짝이는 금속 단면이 나타났지만, 루산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미 헤비 스틸 두 대 사이를 뚫고 계속해서 달렸기 때문이다.
팔이 잘린 헤비 스틸과 그 옆에 있던 다른 굴다크 공작군의 기체는 뒤따라온 레오파드들에 둘러싸여 집중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루산과 시에나는 계속해서 헤비 스틸들을 돌파했다.
시에나는 막고, 루산은 베었다.
굳이 적의 기체를 완전히 부술 필요는 없었다.
팔 하나만 잘려도 전투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기체를 상대할 생각도 없었다.
상대할 적은 많았고 시간은 아군의 편이 아니었다.
루산은 시르나크를 따라 나온 1군단 1전단 멕 나이트들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고 뒤따라오는 레오파드들에 맡기며 빠르게 적의 본진이 있는 언덕으로 다가갔다.
언덕 위에 블랙 드래곤 한 대, 언덕 아래 정면에 또 다른 블랙 드래곤 한 대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덕 아래의 블랙 드래곤 뒤로는 육중한 헤비 스틸들이 언덕 위의 블랙 드래곤을 감싼 채 방패벽을 세워 철옹성을 쌓고 있었다.
곤충 한 마리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루산은 언덕 아래의 블랙 드래곤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츠쿵츠쿵츠쿵츠쿵-
그러나 그러나 블랙 드래곤은 마주 달려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세를 낮추고 두꺼운 방패를 가슴 앞으로 들어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공격할 곳이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공격할 곳이 없으면 만들어야 했다.
루산이 탑승한 레오파드 스피드는 블랙 드래곤의 좌우를 빠르게 움직이며 대검을 휘둘렀다.
쾅!
그러나 중량 차이로 인해 위력이 크지 않았고 블랙 드래곤은 마나 진동 대검이 강철 방패를 뚫지 못하도록 교과서처럼 방패를 기울여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다후크는 시르나크가 당하는 것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에 철저히 방어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당했을 때 아군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빈틈은 공격하기 위해 몸을 크게 움직일 때 생기는 것!
뛰어난 기체를 탄 에이스 파일럿이 작정하고 방어를 하면 뚫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되었으면 언덕을 둘러싸고 있는 멕 나이트들이 달려 나올 만도 한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레오파드 전대로 굴다크 공작을 잡는다는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루산이 외부 확성기를 열었다.
- 계속 막기만 할 텐가?
그러자 다후크가 외부 확성기로 대답했다.
- 굳이 상대해 줄 가치가 있을까?
- 흥! 겁이 난다는 말을 이상하게 하는구나!
그러나 루산의 도발에도 다후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 잠시 후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루산은 깨달았다.
도발로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굴다크 공작군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뒤에서는 시르나크를 따라 나갔던 1전단 멕 나이트들이 레오파드 전대와 싸우고 있었다.
멀찍이서 레오파드 라이트닝들이 마나 진동 투창을 던지고 레오파드 스피드들이 빠르게 움직여 공격해 봤지만, 마나 진동 투창은 위력이 없었고 어느 정도 감을 잡은 1군단 1전단 파일럿들은 더는 당하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루산과 시에나를 포위하기 위해 반원형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대장님!]
시에나가 초조한 목소리로 루산을 불렀다.
[알았다.]
루산의 레오파드 스피드는 블랙 드래곤으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몸을 돌려 북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가오던 1전단 헤비 스틸들이 루산과 시에나의 레오파드를 잡기 위해 포위망을 좁혔다.
루산은 시에나에게 방어를 맡긴 채 헤비 스틸들을 돌파해 혼전을 벌이고 있는 레오파드들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 블랙 드래곤 프린스를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음!]
볼프강이 신음을 흘렸다.
그 역시 루산을 따라 적의 지뷔부로 달려갈 작정이었지만, 적의 멕 나이트에 막혀 여기서 싸우고 있었다.
작은 언덕에서 벌어진 일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자신이나 더 많은 레오파드들이 달려갔어도 결국 실패했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수가 많고 훈련이 잘된 적과 싸울 때 적의 대장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획의 일부에 불과했다.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하면 그다음 계획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두 이탈하라!]
헤비 스틸과 맞붙어 싸우고 있던 레오파드 스피드들이 일제히 몸을 뺐다.
당연히 순순히 보내줄 리 없었다.
헤비 스틸들이 몸을 돌리는 레오파드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레오파드 라이트닝들이 마나 진동 투창을 던져 동료가 몸을 뺄 수 있게 도왔다.
루산과 6전단 파일럿들은 왔을 때보다 빠르게 북쪽으로 다시 달아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본진의 지휘부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적은 우회하여 목숨을 걸고 본진을 노렸다.
어쩌다 굴다크 공작군의 에이스 파일럿 시르나크를 쓰러뜨리고 헤비 스틸 몇 대를 부쉈지만, 상대 역시 레오파드 몇 대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승패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이다.
[다후크 경, 놈들을 추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일단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주군의 안위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다후크는 시르나크를 쓰러뜨리고 동료들을 해쳤을 뿐 아니라 감히 사령관을 공격하려 한 적들을 추격하고자 하는 부하들을 제지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저 이리저리 마구 움직여 봤을 뿐인가?’
다후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굴다크 공작군과 전투를 치르기 전 마지막 작전 회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루산이 말했다.
“우리는 전혀 유리하지 않습니다.”
“음!”
지휘관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레오파드의 기동성을 살리는 겁니다.”
“특정 장소에서 멕 나이트 수백 대 이상이 동원되는 회전이 벌어지면 그 기동성이라는 것이 큰 의미는 없소.”
볼프강이 말했다.
루산은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와 힘으로 찍어 누르면 속도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무기는 이것뿐입니다. 이것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못하죠.”
지휘관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루산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행히 레오파드의 속도는 일반 멕 나이트의 두 배가 넘습니다. 충분히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계속 말씀해 보시오.”
울젠 남작이 루산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회전이 벌어지면 레오파드 부대는 좌우로 돌아 적의 본진 지휘부를 칠 겁니다. 굴다크 공작을 잡는다면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우회하여 적의 본진에 도착한다 해도 공작을 쓰러뜨리기는 어려울 것이오.”
“맞습니다. 성공하면 좋겠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죠. 대장을 함부로 방치하는 군대는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우리의 기습이 그들을 떨게 한다면 그들은 대장의 보호에 더욱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상당수의 병력이 대장을 지키기 위해 뒤쪽으로 빠지게 되겠죠. 그때 레오파드 전대가 재빨리 돌아와 우리 방패 부대를 공격하고 있는 적의 후미를 치는 겁니다.”
“음!”
6전단 지휘관들이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순간적인 병력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의미가 있는 병력은 절대적인 병력 숫자가 아니라 전투에서 맞붙는 순간의 병력이었다.
빠르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무찌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
레오파드가 아무리 빠른 기체라 해도 그것을 조종하는 파일럿은 계속해서 그 속도로 움직일 수 없다.
파일럿은 사람이고, 사람은 지친다.
격렬한 전투를 치르게 되면 더욱 빨리 지친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우리의 심장과 싸워야 할 겁니다.”
“심장과 싸운다? 음!”
폐가 터질 때까지,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달려 순간적인 병력 우위를 확보해 적을 무찌른다!
그것이 평지 회전에서 레오파드를 활용하는 전술의 요체였다.
[달려라! 심장이 뛰는 한 계속 달려라!]
츠쿵츠쿵츠쿵-!
레오파드 100여 대가 전력을 다해 달렸다.
굴다크 공작이 머물러 있는 적의 본진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지고 저 앞에 이스타드 해방 전선과 드잡이를 하고 있는 굴다크 공작군 방진이 보였다.
[버텨!]
[제길! 이미 허물어지고 있는 걸 어떻게 버티란 말이야!]
이스타드 변경 사냥꾼들은 적의 압도적인 힘에 밀리고 있었다.
한번 무너지면 순식간에 허물어질,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때 레오파드들이 굴다크 공작군 뒤를 뚫고 들어왔다.
선두에는 루산의 레오파드 스피드와 시에나의 레오파드 파워!
레오파드 파워가 왼쪽에 있는 적을 밀치고 틈을 벌리면 레오파드 스피드는 등을 보이고 있는 오른쪽 적의 다리를 베어 버렸다.
추컹!
쓰릉!
그 뒤로 레오파드 스피드 50여 대가 따라 들어오고 레오파드 라이트닝들은 후방에서 마나 진동 투창을 던져 적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레오파드 부대는 적의 방진을 쩍쩍 가르며 순식간에 돌파했다.
- 아군이 도착했다!
- 이겼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더욱 힘을 내 적을 막았다.
[이번에는 적의 우익을 공격한다!]
중앙을 돌파한 레오파드 전단은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아 적의 우익과 싸우고 있던 레오파드 파워 부대를 구원했다.
적의 우익 부대 멕 나이트가 맹렬히 공격해 왔지만, 레오파드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 뒤에도 레오파드 부대는 오른쪽, 왼쪽, 쉬지 않고 달려 공격해 나갔다.
여전히 숫자에서는 굴다크 공작군이 더 많았지만, 본진에서는 섣불리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굴다크 공작군의 중군 방진을 계속해서 두드리며 혼란을 가중시키던 중에 또 다른 치명적인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지금이다! 적 사이로 침투하라!]
울젠 남작이 명령을 내리자 서로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방패 부대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지며 혼란에 빠진 적과 뒤엉켰다.
그때 6전단 파일럿들이 타고 있던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이 굴다크 공작군 방진으로 들어갔다.
현재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는 모두 아우로라 대륙의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상태가 좋은 것은 얼마 전에 굴다크 공작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었다.
동일한 문장, 동일한 도색, 동일한 표시.
얼른 보아서는 식별이 되지 않았다.
레오파드 전단이 굴다크 공작군 중군을 헤집으며 전열을 흐트러뜨리는 사이, 6전단 파일럿들이 타고 있던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은 적 사이에 끼어들어 주의가 흐트러진 적의 등을 찔렀다.
쓰릉!
등에서 조종실을 찔린 파일럿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 광경을 본 굴다크 공작군 파일럿이 비명을 질렀다.
[적이 침투했다! 똑같은 멕 나이트를 탔다고 모두 아군이 아니다! 조심하라!]
혼란이 극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