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온 힘을 다해 밀어라
199. 온 힘을 다해 밀어라
이스타드 해방 전선을 지휘하기 위해 중간중간 끼어 있는 6전단 파일럿이 악을 썼다.
[버텨! 밀리면 진형이 무너진다!]
트라비를 비롯한 이스타드 해방 전선 방패 부대 파일럿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럼에도 멕 나이트가 뒤로 질질 밀렸다.
[으이야아아아!]
트라비는 비명 같은 기합을 질렀다.
사실 이번 전투를 치르기 전까지는 멕 나이트를 타고 전투를 치르는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다.
멕 나이트에 탄 필센 제국 군인들이 원시의 땅을 멀리 돌아 이스타드 변경에 들어온 뒤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 왔지만, 대부분은 손쉽게 이겼다.
각개격파, 유인 작전, 함정, 우회 포위 공격··· 필센 제국군의 작전대로만 하면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들은 인명 피해를 거의 입지 않으면서 막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동안 획득하거나 부순 아우로라 사냥 팀과 아우로라 연합군의 멕 나이트 수가 무려 500여 대나 되었다.
전쟁은 생각보다 쉬운 것이었다.
이 쉬운 일을 하면서 고가의 멕 나이트를 이렇게나 많이 획득하다니, 억울한 마음조차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트라비는 이곳에서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스타드 변경에서 태어나 함께 뛰어놀며 자라고,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으로 지원하여 멕 나이트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함께 방패를 들고 같이 싸우던 친구들이 굴다크 공작군의 멕 나이트에 당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그럼에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지휘관의 악다구니가 그런 감정에 빠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텅!
뒤에서 지휘관의 멕 나이트가 트라비의 멕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야! 뒈지기 싫으면 옆으로 붙어! 방패 벽에 뚫린 구멍을 메우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트라비는 악을 지르며 옆으로 붙어 쓰러진 동료로 인해 생긴 구멍을 메우고 적의 돌진을 악착같이 저지했다.
대검을 휘두를 공간이 많지 않은 이런 밀착 상황에서 마나 진동 대검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빛나는 적의 마나 진동 대검이 방패를 두드리고 벨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때 적이 다시 강력한 힘으로 방패 벽을 밀기 시작했다.
두 배 더 많은 멕 나이트 수, 훈련이 잘된 베테랑 파일럿들이 미는 힘은 어마어마했다.
[버텨라!]
[버틸 수가 없어요!]
[아! 넘어간다!]
마침내 힘의 균형이 깨지고 방패 벽을 세우고 있던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이 뒤로 일제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들을 밟고 넘어오는 굴다크 공작군의 멕 나이트들!
쓰러진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은 일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앞에 서 있던 동료에 눌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성난 굴다크 공작군 멕 나이트들이 마나 진동 대검을 거꾸로 쥐고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를 찌르려 했다.
트라비는 자신이 타고 있는 멕 나이트의 방패를 밀어 적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무거운 적의 멕 나이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안 돼!]
그때 측면에서 레오파드들이 바람처럼 달려와 쓰러진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을 찌르려던 굴다크 공작군 멕을 베며 지나갔다.
선두에는 레오파드 스피드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헤비 스틸을 완전히 베려 하지 않고 팔다리 관절만 쓱 그으며 지나갔고, 그 옆에 바싹 붙은 레오파드 파워가 레오파드 스피드를 공격하려는 적을 방패로 보호했다.
루산과 시에나가 지나간 자리로 레오파드 스피드들이 뒤따르며 적의 멕 나이트를 베어 나갔다.
레오파드 부대가 시선을 끌며 적의 선두 멕 나이트 부대를 공격한 덕에 뒤로 벌렁 넘어진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트라비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을 구해 준 뒤에도 쉬지 않고 적진을 돌파하는 레오파드 부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자신도 이렇게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적을 베며 적진을 돌파하는 저런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휘관의 고함이 귀청을 때렸기 때문이다.
[일어나! 정렬해! 뒈지고 싶어!]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파일럿들이 죽음의 길목 바로 앞까지 갔다 돌아와 또다시 전열을 정비하는 사이, 굴다크 공작군 선두 방패 부대 역시 대열을 다시 갖추었다.
그리고 적진을 돌파한 레오파드 부대도 반대쪽으로 빠져 나가 새로운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렸다.
***
계속된 전투로 힘겨운 것은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만이 아니었다.
굴다크 공작군 역시 죽을 맛이었다.
방금 전 적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밀어붙여 끝장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자 피로와 허탈감이 급격히 밀려왔다.
굴다크 공작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 온 지휘관이었다.
전투의 강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야 다시 힘을 내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적이 체력을 보충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 싸움을 이어가는 바람에 섣불리 전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적의 중군은 확실히 어설프다. 그리 강하지 않아. 반면 레오파드를 탄 부대는 날카롭다. 저쪽이 정예야!’
굴다크 공작은 어느 쪽이 핵심 전력인지 간파해 냈다.
‘레오파드가 날카롭기는 해도 가벼워서 위력은 떨어져. 그리고 중량 멕 방패 부대가 훨씬 수가 많다. 레오파드 부대가 날파리처럼 주위를 날아다녀도 방패 부대를 무너뜨리면 이 싸움은 끝나는 것이다.’
레오파드를 잡겠다고 쫓아다녀 봐야 워낙 빨라서 잘 잡히지 않는다.
신경 쓰지 말고 외곽을 방비한 채 적의 중군을 섬멸한다면 힘 빠진 날파리들도 이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군 전진! 좌익, 우익 전진! 적의 레오파드 부대는 신경 쓰지 마라!]
공작의 명령에 굴다크 공작군이 다시 강하게 압박을 시작했다.
공작은 병력이 피로 한도를 넘어서기 전에 서둘러 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전투를 치르지 않은 부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1군단 1전단과 2전단은 좌우로 돌아 적의 방패 부대 뒤를 친다!]
[주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면 주군 곁은 누가 지킵니까?]
깜짝 놀란 다후크의 물음에 굴다크 공작이 대답했다.
[나는 2전단과 함께 간다. 방어 대형만 제대로 갖추면 레오파드 부대는 함부로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파일럿들이 더 지치기 전에 끝내지 않으면 안 돼. 질질 끌면 낭패를 볼 수 있다. 포위해서 끝을 본다.]
다후크는 자신의 젊은 주군이 예리한 전투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수에서 압도하고 있었고, 숙련도에서도 우위에 있었지만, 무언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후크 역시 시르나크의 죽음이나 적 레오파드 부대의 빠른 기동 외에도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친위대 격인 1군단 1전단과 2전단이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뒤를 막기 위해 좌우로 크게 돌기 시작했다.
작은 언덕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울젠 남작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포위를 피하기 위해 주력 부대를 뒤로 물렸다가는 일순간에 대열이 무너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을 면하기 어려웠다.
레오파드 기동 부대가 간간이 적진을 뚫고 외곽을 괴롭히고는 있었지만, 전력 차이를 완전히 뒤집을 만한 활약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파드 라이트닝은 헤비 스틸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없는 기체라 외곽에서 마나 진동 투창을 건드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레오파드 파워와 스피드가 계속 달리며 전투에 개입한 덕에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방패 부대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레오파드 파워와 스피드의 파일럿들은 몹시 지친 상태였다.
‘여기까지인가? 후퇴 명령을 내려야 하는가!’
울젠 남작이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후퇴 명령을 내린다 해도 살아서 이스타드 왕국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그동안 6전단과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들은 계속된 행군과 전투로 무척 지친 상태였고 추격을 막아 줄 다른 부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퇴한다면 모두 붙잡힐 것이다.
울젠 남작의 고뇌를 알기라도 한 듯 루산이 마나 통신을 걸어왔다.
[전단장님, 이 평원에서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끝을 봐야 합니다!]
루산의 목소리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이대로 계속 싸웠다가는 전멸을 면하지 못할 것 같소.]
[우리에게는 아직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루산의 말에 울젠 남작은 침통하게 대꾸했다.
[전령이 3군단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알 수 없고, 설령 도착했다 해도 3군단이 전선을 돌파해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소.]
[그야 물론입니다. 3군단이 오면 좋겠지만, 그것에 기댈 수는 없죠.]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우리의 처음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울젠 남작은 루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적의 대장을 치는 것입니다!]
[그건 실패한 것 아니오?]
[한 번 성공하지 못했다고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닙니다. 대장이 움직이지 않고 대장을 호위하는 부대가 철옹성처럼 감싸고 있으면 성공할 수 없죠. 하지만, 지금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주력 부대를 포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음!]
[이스타드 해방 전선이 적의 대장을 호위하는 부대와 강하게 충돌해 난전을 유도한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레오파드들이 블랙 드래곤의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이미 블랙 드래곤 하나를 쓰러뜨린 남자의 말이었다.
울젠 남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았소! 해 봅시다!]
***
필센 제국 북서부 플라네그 지방.
눈 덮인 산지의 작은 평원에서는 강철 거인들의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강철 거인들이 밝고 지나간 곳은 하얀 눈 대신 지저분한 진탕이 펼쳐져 있었고, 진탕 위에 팔다리가 잘린 거인들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 나이트들은 굴다크 공작군에 의해 정면, 양쪽 측면이 둘러싸인 채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굴다크 공작이 직접 이끄는 전단 두 개가 합류해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은 사방이 포위된 채로 강하게 압박을 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짜부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레오파드들이 포위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굴다크 공작군 주위를 맴돌며 마나 진동 투창을 던지고 돌파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굴다크 공작군은 외곽에 방패 벽을 단단히 세우고 안쪽에 있는 주력 병력을 부수는 데 집중했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레오파드 스피드와 레오파드 파워들이 굴다크 공작군의 포위망 외곽을 계속 돌고 있었으나 그 모습은 마치 무시무시한 용에 휘감긴 동료의 마지막 길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바깥은 신경 쓰지 마라! 안에 있는 놈들을 부수면 밖에 있는 놈들도 끝장이다!]
공작이 마나 통신기로 굴다크의 파일럿들을 독려했다.
포위망이 완성된 순간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이스타드 변경의 사냥꾼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이 최악의 순간에도 그들은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 중간중간에 끼어 있던 6전단 파일럿들이 조심스럽게 후방으로 이동한 뒤 바깥을 맴도는 레오파드 전단과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다! 온 힘을 다해 밀어라!]
이스타드 해방 전선 후방의 멕 나이트들이 굴다크 공작이 포함돼 있는 1군단 2전단을 강하게 밀기 시작했다.
맨 앞 줄 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멕 나이트들까지 동시에 밀어서 그 힘은 어마어마했다.
후방을 포위해 공격하던 굴다크 공작군 1군단 2전단이 크게 출렁였다.
그와 동시에 포위망 전체를 빙빙 돌던 레오파드 전단이 1군단 2전단 쪽으로 갑자기 돌격했다.
터덩!
방패로 어깨를 가리고 몸통 박치기를 감행하자 포위망 외곽 방패 벽이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레오파드 스피드들이 빠르게 파고들어 마나 진동 대검을 쑤셔 박았다.
쓰릉!
순간적으로 2전단 대열이 흐트러졌다.
[가자!]
[네, 대장님!]
루산은 시에나의 호위를 받으며 동료들이 만들어 준 틈으로 빠르게 쇄도했다.
육중한 헤비 스틸들 사이로 블랙 드래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