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홍수의 책임을 나뭇잎에게 물을 수는 없다
203. 홍수의 책임을 나뭇잎에게 물을 수는 없다
“아무래도 전시라 관광 목적으로 이 땅을 찾는 손님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업 목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은 전보다 늘었습니다.”
오랜만에 직접 마부석에 앉은 렌커가 이 땅의 사정과 변경 투어 사업 현황을 들려주었다.
루산은 렌커와 나란히 앉아 많이 바뀐 변경 8구역의 풍경을 구경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반달 호수 지역으로 가는 철로 옆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마차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주민이 크게 늘어 지금은 사실상 관광 안내보다 이주민 수송 사업에 많이 치우쳐 있죠.”
“본부에서 일감을 주는 그 일 말이죠?”
“네, 기사님.”
“그건 이익이 많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일감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변경에 와서 먹고살 만하게 되었으니 변경 본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죠.”
루산은 렌커의 마음씀씀이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돈 많이 버는 일을 해야죠.”
“그래서 생각해 본 사업이 있기는 합니다, 기사님.”
렌커가 시키지도 않은 숙제를 하고 평가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사업이죠?”
“화물 운송 사업을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화물 운송?”
“네.”
“열차가 레이크 시티까지 들어와서 어지간한 화물은 열차로 운반하지 않나요?”
“열차는 배차 시간이 정해져 있고, 또 모든 화물이 열차로 운반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역에서 내린 뒤에도 목적지까지 운반해야 하죠.”
“음.”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렌커가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 8구역에 사람이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사업체도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많아졌죠. 레오파드 생산 기지도 여전히 확장을 계속해 나가고 있고요. 건축 자재, 목재, 각종 원자재, 농축산물, 공장에서 만든 상품들··· 운반해야 할 화물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 여객 마차들이 그때그때 주먹구구식으로 이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형편이죠. 대형 거래, 정기 거래에 취약합니다.”
“공장들도 기존에 쓰던 화물 운반 마차가 있지 않겠어요?”
“있죠. 그런데 공장들이 늘 원료와 상품을 운반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 마차, 마부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손해잖아요. 사용할 때만 우리가 그 일을 해 주는 것이 오히려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는 거죠.”
루산은 렌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화물 운송 사업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허락하지는 않았다.
“사업 계획서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보세요.”
“알겠습니다, 기사님!”
렌커가 기쁜 표정을 감추느라 애쓰며 대답했다.
마차는 어느새 반달 호수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레인보우 시티는 중심 도시는 물론이고 이를 둘러싼 일곱 개의 개척촌도 크게 성장해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크 시티의 변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레이크 시티는 전에 비할 수 없이 넓어지고 공사가 끊이지 않아 루산, 바이크, 시에나가 얼른 자기 집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호숫가 장벽 생산 시설이 장엄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어서 그것을 기준으로 집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집이 가까운 바이크와 시에나가 마차에서 먼저 내렸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휴가다.”
루산은 반년 넘게 고생한 바이크와 시에나에게 휴가를 주었다.
“와! 한 달이나? 너무 긴 거 아니야?”
“길면 어때? 푹 쉬면 좋은 거지.”
“뭘 하고 쉬느냔 말이야.”
“글쎄······.”
“노바나 갔다 올까?”
“너랑 나랑 둘이?”
“같이 휴가를 받은 동료로서 말이야. 싫어?”
“싫다기보다는, 음······.”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자. 이대로 집에 가 봤자 썰렁하니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 전에 일단 좀 씻고. 너무 오랫동안 목욕을 못해서 몸이 근질근질해.”
“알았어. 이따 보자.”
루산은 등 뒤에서 점점 작게 들려오는 바이크와 시에나의 대화에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해 렌커와 작별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에밀리와 찰스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찰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루산을 쳐다보고 깜짝 놀라 얼른 에밀리 뒤에 숨으며 말했다.
“누나, 이상한 아저씨야!”
반년 전보다 훨씬 크고 말이 더욱 또렷해진 찰스를 보고 루산은 그동안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을 실감했다.
루산이 무릎을 낮추고 찰스와 눈높이를 맞춘 뒤에 말했다.
“이상한 아저씨 아니야, 찰스. 클라크 형이랑 이 집에서 같이 살던 아저씨야. 우리 같이 빵도 먹었잖아. 그치?”
찰스가 눈을 껌벅이다 탄성을 질렀다.
“아! 그 아저씨구나! 근데 클라크 형은 왜 안 와요?”
찰스의 관심은 루산이 아니라 클라크에게 돌아갔다.
루산도 갑자기 클라크가 생각났다.
“공부하느라 바쁜가 봐.”
“나도 공부 많이 하는데.”
“무슨 공부를 하니······.”
루산은 무릎걸음으로 찰스와의 거리를 점점 좁히다 천천히 안아서 들어 올렸다.
찰스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루산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응! 누나랑 숫자 공부도 하고, 그림 공부도 하는데.”
“멋지구나! 근데 밥은 먹었어?”
“응! 누나랑 먹었는데.”
“아저씨는 아직 안 먹었어. 혹시 먹을 게 있을까?”
“응! 있어. 아저씨 줄까?”
“주면 고맙지.”
“아라써! 누나, 아저씨 밥 주자!”
“조, 좋아!”
에밀리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서둘러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식사 준비를 했다.
루산은 마당에서 찰스가 누나랑 하던 소꿉놀이를 마저 하다가 식사 준비를 마친 에밀리가 부르자 안으로 들어갔다.
에밀리는 모든 집안일을 잘했지만, 요리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
바이크, 시에나와 달리 루산은 집에 들렀다가 곧바로 레이크 시티 행정청으로 나갔다.
많은 현안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가장 급하게 처리할 일은 포로 문제였다.
루산은 켐니츠와 서로 그간의 사정을 간단히 교환한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스타드 왕국 변경에서 붙잡은 아우로라 출신 사냥꾼들이 계속 들어올 겁니다.”
“얼마나?”
“2천 명 정도?”
“와!”
“멕 나이트 파일럿 200여 명, 멕 워커 파일럿 600여 명, 나머지는 지원 요원들이에요.”
“대체 그 많은 파일럿들을 어떻게 잡은 거야?”
“각자 소속 사냥 팀별로 흩어져 사냥하고 있는 걸 급습했죠.”
말이 쉽지 이스타드 변경의 지리에 빠삭한 토박이 사냥꾼들을 동원하고 레오파드 부대원들이 쉬지 않고 움직여 이뤄 낸 성과였다.
“앞으로 플라네그 역에서 출발한 열차 편으로 계속 들어올 텐데, 이들을 곧바로 아라드 변경으로 보낼 거예요.”
“아라드 변경 개척에 투입한다고?”
“네.”
“멕 나이트 파일럿 200명, 멕 워커 파일럿 600명이 포함된 아우로라 녀석들 2천 명이라니,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멕을 탈취해 난리를 치면 어떡할 거야?”
우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우로라 인과 오카수스 인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2천 명이나 되는 아우로라 출신 사냥꾼을 아라드 변경에 몰아넣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 정도 인력을 버리겠어요? 큰 성과를 얻으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죠.”
루산이 아무 생각 없이 아우로라 출신 사냥꾼들을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에요. 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들이죠. 나는 이들을 노예처럼 부릴 생각이 없어요. 일한 만큼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에요. 변경의 사냥꾼, 용병들처럼 일한 만큼 대가를 주는 거죠. 괴수 잡는 데 출신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게 생각대로 되겠어? 아우로라 놈들이라고.”
“물론 시간이 필요하겠죠. 불신과 두려움을 걷어낼 시간, 믿음이 쌓일 시간이.”
“으음!”
켐니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계획 같았던 것이다.
“당연히 안전장치를 마련할 거예요.”
“어떤 안전장치?”
“원시의 땅 깊숙한 곳에 그들이 지낼 사냥 캠프를 마련할 거예요. 그들은 고립되는 셈이죠.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요. 거기서 멕 나이트를 타고 사냥해서 괴수 부산물을 획득하고, 괴수 혈액을 보존 용기에 저장하는 거예요. 주기적으로 수거 팀이 들어가 괴수 혈액과 각종 부산물을 가져오고 대가를 지불하는 거죠.”
“멕 나이트가 있으면 탈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마나 연료봉을 제한적으로 공급하면 간단히 해결돼요.”
“아!”
연료 공급을 제한하면 탈출할 수가 없다.
마나 연료봉 없는 멕 나이트는 거대한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감시병을 둘 필요도 없고, 오카수스 인과 충돌할 일도 없어요. 주기적으로 식량과 생필품을 싣고 갔다가 괴수 부산물을 가져오는 수거 팀과 접촉하겠지만, 만약 수거 팀을 해친다면 그들은 끝장인 거죠. 원시의 땅에서 굶어 죽거나 괴수한테 잡아먹힐 테니까요.”
켐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단한 방법이야!”
“시간이 흐르면 휴가를 줄 거예요. 우리 8구역 사냥꾼들이 쉬는 날 라돔 시에서 놀고 오는 것처럼 멋대로 놀다 오라고 시간을 주는 거죠.”
그래도 변경에서 달아날 수는 없었다.
변경의 개척 도시나 개척촌에서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길은 정해져 있어서 그 길만 막으면 된다.
“나중에는 아예 풀어줄 생각이에요. 그들은 변경에서 많은 돈을 벌었을 테고, 그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계속해서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남을 거예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아라드 변경에도 새로운 파일럿들이 많이 생겨났겠죠.”
루산은 아우로라 대륙에서 넘어와 이스타드 왕국에서 괴수를 잡다가 붙잡힌 사냥꾼들을 굳이 해칠 생각이 없었다.
노예로 부릴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대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 온 나뭇잎 같은 존재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뭇잎한테 홍수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홍수에 대한 책임은 신과 날씨 그리고 그 피해를 방지할 막강한 힘을 지닌 권력자에게 있는 것이다.
단지 루산은, 홍수에 떠밀려 온 나뭇잎들이나마 최대한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생각이었다.
“아라드 왕국 변경은 거의 개발이 되지 않았어요. 아라드 왕국 바로 옆에 광대한 원시의 땅이 펼쳐져 있죠. 아우로라 사냥꾼들을 투입한 고립 사냥 캠프는 점차 변경 거점 도시로 성장하게 될 거예요.”
루산이 그리는 큰 그림에 켐니츠는 가슴이 떨렸다.
“레이크 시티 서쪽에 임시 수용소를 만들고 포로들이 레이크 시티 역에 도착하자마자 신속히 이동시켰다가 아라드 변경으로 데려가야 해요. 비밀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 당장 조치를 취하겠네.”
켐니츠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레이크 시티의 핵심 요원들을 소집했다.
임시 수용소를 건설할 책임자, 역에서 포로들을 실어 나를 책임자, 그리고 포로들의 생활을 관리할 책임자를 선정하고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자르는 켐니츠의 지시라 요원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맡은 일을 시작했다.
포로들은 부서진 멕 나이트 잔해와 함께 열차를 타고 매일 들어왔지만, 변경 8구역에서 아라드 변경까지 매일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일정 기간 수용소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루산은 오토를 비롯한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에게 포로들의 출신과 능력, 신상에 대해 면담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 내역을 가지고 포로들 가운데 우두머리급을 따로 만나 그들의 앞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스타드 변경에서 붙잡힌 아우로라 출신 괴수 사냥꾼 포로들은 아라드 왕국으로 밀수하는 레오파드, 아라드 변경에 건설하는 각종 생산 시설의 설비 부품을 짊어진 멕 워커들과 함께 조용히 먼 길을 떠났다.
이스타드 변경과 달리 날씨가 매섭게 춥지 않다는 것이 포로들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