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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206화 (206/450)

206. 직위가 사람을 품지 못한다

206. 직위가 사람을 품지 못한다

방 안에 감돌던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루산이었다.

“얼른 일어나세요, 단장님. 아직 이러고 계실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 말에 단장은 매서운 듯 굳은 얼굴이 풀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놈아, 이러고 있을 나이가 몇 살인데? 나도 먹을 만큼 먹었다.”

“호른 영감이 더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닌가요?”

“끙!”

단장이 민망함에 앓는 소리를 냈다.

호른이 자신보다 두 살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젊은 날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진이 다 빠진 게지. 영악하게 자기 이익이나 챙기며 편하게 살아온 그 늙은이와 비교가 되겠어?”

변경 8구역의 단장 알렌 뮌스터는 농담으로 한 이런 말에도 지지 않으려는 깐깐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루산이 쓴웃음을 짓자 단장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나는 네가 버틸 줄 몰랐다.”

“네?”

“변경에 와서 버틸 줄 몰랐다고.”

“아······, 네.”

“변경에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을 잘 받은 뛰어난 기사들도 종종 들어온다. 군대에서 죄를 짓고 흘러들어 오는 경우가 특히 많지만, 그것 말고도 여러 사정으로 변경에 오고는 하지. 그런데 그런 자들 중에 이곳 생활을 버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루산은 묵묵히 단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괴수와의 싸움에서 져서 그러겠나? 자존심이 무너지는 걸 견디지 못하는 거야.”

루산은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여러 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괴수의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며 살아간다.

주변 사람들은 죄다 비열하고 영악한 인간들뿐이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돈, 여자, 험담뿐이다.

밝고 깨끗하고 고아한 세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특히나 세파에 찌들지 않은 어린 귀족 청년에게는 더욱 가혹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하고 주위에 사람이 꼬이더구나.”

루산은 살짝 억울했다.

자신에게 닥친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폄하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1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해서 살아남았고 동료들과 친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수십 년을 살아온 노인에게는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열한 놈들은 자기보다 능력 있고 신분 높은 사람을 미워하고 고꾸라뜨리려 하지만, 그 사람이 쉽게 쓰러지지 않는 강자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태세를 바꿔 알랑방귀를 뀌게 마련이지.”

알렌이 힘겹게 밭은기침을 하더니 손으로 물을 가리켰다.

루산은 얼른 알렌 뮌스터의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히고 물을 갖다 줬다.

알렌은 겨우 새 오줌만큼 물을 마신 뒤 루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구나.”

“네?”

“변경 8구역의 어떤 직위도 너를 품지 못한다.”

“······!”

루산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단장은 개의치 않고 감정 없는 사람처럼 일정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가 없었다면 변경 8구역의 눈부신 발전도 없었다. 네가 없었다면 가프 마법 연구소도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8구역의 모든 사람들이 네 입을 주시하고 너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이제 기동 전단장도, 나도, 통치자께서도 너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

“하지만, 이 또한 알아야 할 것이야. 변경 8구역이 아니었다면 너는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는 네가 변경 8구역의 부장이면서 전대장이며 개척 단장이기에 기꺼이 함께 일한 것이지 루산 보름스라는 한 개인과 일한 것이 아니다. 8구역의 그늘이 아니었다면 네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너는 그저 괴수와 씨름하는 일개 변경 파일럿에 불과했을 것이야.”

맞는 말이었다.

변경 8구역의 추천으로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 칼리슈와 만났고, 이후 신형 멕 나이트 레오파드 테스트를 맡게 되었다.

변경 8구역과 가프 마법 연구소를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은 8구역 본부였고, 그 덕에 자신의 역할과 가치가 점점 커져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8구역이 너의 공식적 지위와, 비공식적 권한을 거둬들인다면 너는 한 사람의 파일럿에 불과하다.”

루산은 단장의 말이 불쾌했다.

자신은 8구역에 해를 끼친 것이 없고 오히려 이 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는데, 마치 대단한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지위와 권한을 거두느니 마느니 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장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그동안 누구도 드러내 놓고 하지 못한 껄끄러운 이야기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루산은 알렌의 이야기를 더욱 경청했다.

“그러나 통치자께서 너를 자르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분은 너를 좋아하신다. 그리고 너는 잘못을 저지르기는커녕 오히려 큰 공을 세워 8구역을 발전시켰다. 개척민 모집 계획을 실행한 이후, 레이크 시티에 많은 사업체들과 이주민들이 들어와 우리 8구역이 몇 배나 커졌다. 그런 너를,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는 이유만으로 자를 만한 분이 아니야, 통치자님은.”

루산의 귀에는 마치 통치자님은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단장의 표정과 말버릇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런 의견을 낸다면 반대했겠지.”

“네?”

단장의 말이 예상 가능한 방향에서 벗어나자 루산은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었다.

“지금 너를 내치는 것은 나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다. 공을 세운 요원을 이유 없이 자르면 나머지 구성원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조직이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차겠지. 40여 년을 쌓아올린 8구역의 조직 체계가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너를 둘 수도 없다. 변경 8구역의 어떤 직위도 너를 품지 못하는 이 사태를 내버려두는 것도 8구역의 체계를 흔드는 일이니까.”

변경 8구역의 어떤 직위도 너를 품지 못한다.

단장이 벌써 두 번이나 꺼내는 이 말은 무서운 말이었다.

율리안은 아무렇지 않다지만 8구역의 다른 요원들이 불안감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통치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통치자의 유능, 무능을 판단하고 갈등 완화, 격화를 가늠할 것이다.

결국 통치자의 위엄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루산은 단장의 다음 말이 어서 나오길 바라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힘들게 앉아 있는 단장을 바라보았다.

“단장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도 없는 일이니 인사 개편을 단행할 것이다.”

그 순간 루산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나에게 단장 자리를?’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질투나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단장이 되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원정 사냥을 떠나거나 전투에 뛰어드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변경 8구역의 단장에 기동 전단장을 앉힐 것이다.”

루산은 안도했다.

기동 전단장 알스펠트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25년 동안 전선 파일럿으로 근무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8구역으로 들어온 인물로 성격은 비교적 온화하여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멕 나이트 운용에 대해 잘 알았고 파일럿에 대한 장악력이 확실했다.

무엇보다 루산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기동 전단장에는 2전대장 트리어 지겐을 앉힐 것이다.”

“아!”

루산이 입을 벌리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2전대장 트리어 지겐.

델타 기지에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그는 최연소 캡틴, 최연소 전대장 - 물론 그 기록은 루산에 의해 금세 깨지기는 했다 - 에 이어 최연소 전단장이 된 것이다.

전단장이 되면 현역 파일럿으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아 과연 트리어가 반길지 의문이 들기는 해도 기분이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루산은 트리어의 승진 소식에 기쁘면서도 든든함을 느꼈다.

“공석이 되는 2전대장에는 타우버를 앉힌다.”

타우버는 예전부터 전대장으로 물망에 오르던 파일럿이었다.

트리어가 승진하여 자리가 생기자 이제야 전대장에 오른 것이다.

루산은 그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능력이 특별하거나 눈에 확 띄는 사람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두루두루 원만한 사람으로 충분히 할 만한 인사라고 생각했다.

단장이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3전대장에는 하겐을 임명한다.”

“네?”

루산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현재 3전대장은 자신이었고, 하겐은 델타 기지 소속 파일럿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렌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3전대는 기존의 3전대를 제외하고 새로 편성할 것이다.”

“······?”

“그리고 8구역이 성장한 만큼 기동 전단 하나를 신설할 것이다. 기존의 기동 전단은 1전단, 신설하는 기동 전단은 2전단. 2전단장에는 루산 보름스를 임명할 것이다.”

“······!”

루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국군과 변경 군단은 편제가 다르고 규모에서 큰 차이가 난다지만, 다름 아닌 전단장이었다.

이 나이에 전단장에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전대가 특수하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많이 수행해 왔기 때문에 기존의 변경 군단에 포함시키기 어려워 새로운 전단을 만들기로 했다.”

밀수, 전쟁에 참여한 변경 파일럿을 기존의 편제에 포함시키면 아무래도 비밀이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아예 분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가프 마법 연구소를 상대하는 데에도 일개 전대장이 나서는 것은 격이 맞지 않아 직위를 올려 주기로 한 것이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는 루산의 직위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8구역 본부로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전단은 네가 자율적으로 편성한 뒤 보고하라.”

“······.”

“알았느냐?”

“아, 네!”

알렌은 군단 편제와 인사만 손을 본 것이 아니었다.

“레이크 시티 개발에 네 자금이 많이 들어갔다고 알고 있다.”

“···네.”

사실이기는 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개척 장려금만으로는 개척 도시를 건설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변경 본부에서도 지원해 주기는 하지만, 전진 기지 대장이나 개척단장이 사비를 투입하고 나중에 세금 징수권으로 회수했다.

그런데 개척민 모집 정책을 시행한 뒤로 증가하던 이주민의 수가 전쟁 이후 급속히 증가하면서 레이크 시티 개척 비용이 막대하게 들어가게 되었고, 루산은 이 자금을 피닉스 제철의 슈텐달 남작에게 빌려 충당하다 지금은 바덴이 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금 수입 또한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확장 중이라 들어가는 돈이 더 많았다.

“너를 레이크 시티의 시장으로 임명할 것이다. 임기는 20년. 20년 동안 세금 징수권을 갖는다. 임기는 임명장을 받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고 레이크 시티가 본부 직할로 들어온 뒤에도 도시 지분 5퍼센트를 줄 것이다. 이 지분은 레이크 시티가 제국 영토로 편입되거나 네가 죄를 짓지 않는 한 자식에게 상속될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내용이었다.

개척촌 건설에 대한 세금 징수권은 길어야 10년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20년이라니!

그것도 개척을 시작한 날부터가 아니라 이미 상당한 개척이 이루어져 지금도 많은 세금을 걷고 있는 지금부터 20년이었다.

여전히 확장 중인 레이크 시티의 특성을 고려했다지만, 이것은 보상 차원을 넘어서 특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상속 가능한 지분을 준다는 것은 영원이 레이크 시티와 운명을 묶어 놓겠다는 뜻이었다.

단장 알렌 뮌스터는 루산의 능력과 공적을 아예 인정함으로써 마음을 사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려 한 것이다.

“신사업부 부장직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아라드 변경에 대한 권한도,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명시하지는 않지만, 네가 맡게 될 것이야.”

“···네.”

“변경 8구역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의 변경 구역에서 이만한 직위와 권한을 누리는 사람은 없었다.”

“······.”

“율리안 님은 너를 좋아하신다. 마음이 여리고 따뜻하신 분이지. 그분을 보필하여 8구역을 더욱 발전시켜 주기를 바란다.”

“······.”

“왜 대답이 없느냐?”

“저 역시 율리안 님을 좋아합니다. 이런 것과 무관하게 말입니다.”

“그······.”

알렌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달싹일 때 루산이 먼저 말했다.

“저는 변경 8구역으로 들어온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땅은 인생의 막다른 곳이 아니라 전환점이 되어 주었죠.”

“으음······.”

“제게 보여주신 믿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알렌 뮌스터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손짓으로 루산을 내보냈다.

루산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장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안을 위험에 빠뜨리는 짓은 하지 마라!

감히 권한을 남용하거나 윗사람을 만만히 여기는 짓은 하지 마라!

이제 와서 이런 말은 무의미했다.

앞으로는 율리안이 직접 헤쳐 나갈 일이었다.

알렌 역시 루산을 좋아했다.

일 잘하는 부하를 싫어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루산이 부디 율리안을 잘 보필하기를 빌 뿐이었다.

신사업부 부장

제2 기동 전단장

레이크 시티 시장

거기에 비공식이지만 아라드 변경 군사 책임자, 가프 용병단 단장까지.

필센 제국의 변경 역사상 가장 많은 권한을 지닌 최연소 파일럿이 탄생했다.

율리안이 밖으로 나온 루산을 보고 눈을 찡긋했다.

루산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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