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지
212.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지
강당에 수련생들과 교관들이 모여 있었다.
브레이브 랜드의 책임자가 그들 앞에서 루산 일행을 소개했다.
“이번 경쟁전에 대비해 특별 교관을 초빙했습니다. 작년에 남쪽 아라드 전쟁과 북쪽 이스타드 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가프 용병단의 단장님과 레오파드 파일럿 두 분입니다.”
초장에 수련생들을 휘어잡기 위해 최근에 참전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로 미리 합의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진짜야?”
“설마?”
맨날 20년도 더 된 과거 대전쟁 이야기를 옛날이야기처럼 읊조리는 할아버지 교관들만 보던 소년들에게 젊은 참전 용사의 등장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저 누나도 파일럿이야?”
“아닐걸?”
“가프 용병단 단장과 레오파드 파일럿 두 명이라고 했으니 저 여자도 파일럿이라는 거잖아!”
“그렇네.”
시에나는 자신을 쳐다보고 웅성거리는 아이들에게 찡긋 윙크를 날렸다.
8구역에서 이미 소년소녀들의 우상이기 때문에 이런 시선에 익숙했던 것이다.
“와!”
오히려 소년들의 볼이 빨개졌다.
시에나가 여성 파일럿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목을 끌기는 했어도 가장 시선을 집중시킨 것은 바이크였다.
살짝 삐딱하게 서서 턱을 치켜들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태도, 머리에 두르고 있는 피 묻은 붕대!
방금 싸움터에서 돌아온 진짜 용병이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일 것 같았다.
소년들은 가슴이 마구 뛰고 피가 절절 끓었다.
“와 씨! 장난 아니다!”
“분위기 작살이네!”
바이크는 소년들이 보내는 동경의 눈빛을 마냥 즐겼다.
그때 몸에 착 맞는 겨울 정장 - 어제 바덴이 사 준 옷 - 을 입어 젊고 세련된 귀족 사업가처럼 보이는 루산이 말했다.
“경쟁전에서 전패를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왜 그런지 알겠군.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이를 악물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놀러 나온 것처럼 와! 오! 이러고들 있으니 이길 수가 있겠어?”
갑작스러운 루산의 질책에 강당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용병 나부랭이에게 훈계를 들었으니 귀족 자제들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던 것이다.
사실 브레이브 랜드는 엄격한 군사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세운 기관이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이 사실상 휴업하게 되자 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전시 애국심과 영웅 심리를 이용해 귀족 자제들을 수련하는 장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레오파드 트레이너 제작 도입, 장난감 놀이 판매, 전쟁 참전 용사 교관의 교육이 가미된 브레이브 랜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 통에도 귀족 자제들을 모아 훈련용 멕 나이트에 태우고 전쟁담을 들려주는 놀이 시설을 운영해 큰돈을 벌기 위해 세운 것이 바로 브레이브 랜드였다.
우수한 평민 소년들을 뽑아 어릴 때부터 철저한 군사 교육과 황제에 대한 충성 교육을 실시해 황제의 친위대로 삼으려는 필센 소년 캠프와는 목적부터 달랐기에 수련생들의 태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경쟁전이 도입되고부터는 패배 후 자존심이 상해 긴장감이 좀 더 높아지기는 했지만, 브레이브 랜드는 기본적으로 군사적 요소를 많이 가미한 휴양 놀이 시설이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이번 경쟁전에서 패하면 브레이브 랜드의 효용성을 문제 삼아 필센 소년 캠프와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신경을 크게 쓰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도를 문제 삼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경쟁전에서 져도 상관없나? 이기고 싶지 않아?”
루산의 도발에 상급생 하나가 반발했다.
“지고 기분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당연히 이기면 좋죠.”
“당연한 거 아닌가?”
“왜 저래?”
한 사람이 물꼬를 트자 다른 학생들도 반발하거나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첫 번째 학생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필센 캠프 애들은 우리하고 다르다고요. 좋은 성적을 거두면 제국군 파일럿을 선발할 때 우대해 준다는 약속을 받았어요. 걔들한테 제국군 파일럿이면 엄청난 거라서 목숨 걸고 하는 애들이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제국군 파일럿이 되는 게 어렵지도 않고, 요새는 굳이 기를 쓰고 파일럿이 되기를 희망하는 애들도 많지 않아요. 뭘 알고나 말하라고요.”
상급생 소년이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의지의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바덴과 브레이브 랜드 책임자에게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귀족으로 태어나 기사가 되고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반 황제의 사회 개혁 이후 평민이 자기 재산을 취득하고 멕 나이트 파일럿도 될 수 있게 바뀌면서 군인이 되는 것에 대한 귀족들의 태도가 점점 변해 갔다.
굳이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길 필요가 없어졌다.
멕 나이트 파일럿이 평민도 할 수 있는 일이 되면서 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귀족이 무력을 독점하여 재산과 권리를 누리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성으로 여전히 어린 자식에게 검술 교육을 시키기는 했지만, 자식들은 굳이 목숨을 걸고 전선으로 갈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기를 더 많은 돈을 벌기를 바랐다.
사회 개혁 이후 세상은 꾸준히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기사를 꿈꿔 온 루산은 이러한 세태가 그리 반갑지 않았다.
기사가 되고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명예는 반드시 다른 가치와 연결될 필요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로 명예로운 일인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철저한 이익의 관점에서 이 브레이브 랜드를 지켜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이 귀족 소년들에게 명예심을 심어 주어야 했다.
자신의 현실적 이익과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명예심을 위해서.
“이름이 뭐지?”
루산이 삐딱한 상급생 소년에게 물었다.
“···하인즈 케넨입니다.”
소년이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케넨 자작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하인즈 케넨, 그건 비겁한 말이지.”
소년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비겁.
아니나 다를까 하인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패배에는 다른 이유가 없어. 약하니까 진 거다.”
루산을 노려보는 소년들의 적의가 뭉클뭉클 피어 올랐다.
루산은 그 적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며 말했다.
“너희는 약한 거야. 그래서 필센 소년 캠프 아이들에게 진 거야. 여기에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있지?”
“······.”
“그까짓 경쟁전, 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은 여기서 나가. 브레이브 랜드에 비겁한 녀석들은 필요 없으니까. 필센 제국에 겁쟁이는 필요 없다. 귀족이라는 호칭이 부끄러운 거야.”
소년들이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남는 녀석들에게는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소년들이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루산은 브레이브 랜드 수련생들에게 계급을 부여하고 계급장을 주었다.
계급장의 모양은 레오파드.
계급은 블루, 레드, 골드, 화이트, 블랙.
계급의 기준은 어린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했다.
먼저 달리기 던지기와 같은 기초 체력 검증을 통해 블루, 레드, 골드를 나누었다.
그리고 골드부터는 검술, 작전 수행 능력, 각종 훈련 성과에 따라 화이트, 블랙으로 승급한다.
어차피 블루, 레드는 레오파드 트레이너에 탑승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
골드부터는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크고 체력이 좋아 레오파드 트레이너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복종한다. 그렇다고 상급자가 부당한 명령을 내려도 참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계급을 빌미로 부당한 명령을 내리거나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에는 브레이브 랜드에서 쫓겨날 것이다.”
수련생들은 레오파드 모양의 계급장을 가슴과 어깨에 달고 루산의 말을 경청했다.
레오파드 모양의 계급장은 용감한 나라 장난감 공장에 특별히 주문해 공들여 만든 것으로 세련되고 빛이 나 아이들이 좋아했다.
루산은 교관들에게도 신경을 썼다.
세 명이서 모든 수련생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외부에서 갑자기 찾아온 용병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번 경쟁전에서 승리할 경우 교관들에게는 각각 순금 레오파드 계급장과 함께 250골드의 포상금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노년의 은퇴 파일럿들은 바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어차피 늘 지던 경쟁전, 이번에 외부에서 현직 용병을 불러왔다지만 별반 다를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자신들을 뒤로 돌렸으니 얼마나 대단한 용병인지 두고 보리라!’
뿔이 난 상태로 지켜보던 교관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풀어졌다.
이렇게 교육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갔다.
경쟁전 종목은 집단 장애물 달리기, 회전, 깃발 쟁탈전.
루산이 전술 훈련과 작전 수행 교육을 맡았고, 시에나가 멕 나이트 방어술 훈련을 담당했다.
그리고 바이크는 멕 나이트 기본 조종 훈련과 달리기 훈련을 책임졌다.
“왜 제가 이걸 맡은 겁니까? 멕 나이트 전투 훈련을 담당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이크가 루산에게 뻔뻔하게 항의했다.
“정말 몰라서 물어?”
“네.”
“너처럼 멕 나이트 조종을 못 하는 파일럿은 처음 봤다. 기본적인 움직임도 서툴렀지.”
“아니, 왜 또 옛날 얘기를 하고 그러세요? 민망하게······.”
“그런데 지금은 잘 타잖아. 레오파드 라이트닝을 타고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이 달린 사람이 누구야? 바로 바이크 너잖아. 설원에서 적진을 돌파해 원군을 끌고 온 사람이 누구야? 바로 너지.”
루산의 칭찬에 바이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전선을 돌파하기는 했죠, 헤헤.”
“빠르게 잘 달리도록 가르쳐 봐.”
“네, 대장님!”
바이크가 목청 높여 대답했다.
***
정부 청사 각료 회의실.
방금 궁에서 돌아온 오베론 공작이 피곤한 얼굴로 대신들을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진노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신들의 표정도 무거웠다.
“북부 전선에서 한 번 승리를 거두었다고 이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세요? 남쪽 전선과 북쪽 전선에서 거둔 승리 소식에 다들 마음이 풀어진 모양인데, 이 전쟁은 아직 2년도 채 지나지 않았어요. 과거 대전쟁을 생각하면 아직도 20년은 더 걸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그럼에도 노바의 소요 사태가 계속되고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어디 말 좀 해 보세요!”
상무대신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아무래도 전시 임금 동결법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임금을 강제로 동결할 만큼 우리 제국의 경제 사정이 나쁘지 않은데, 전쟁을 이유로 임금 인상을 억제하니 그렇지 않아도 물가가 오른 마당에 백성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일단 물가 상승세는 어느 정도 잡았으니 전시 임금 동결법도 손을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동결이 아니라 제한으로 말입니다.”
그 말에 오베론 공작인 인상을 팍 썼다.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겁니까? 이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슨하게 대처할 일이 아니라니까요! 지금도 전선에 댈 전쟁 물자를 쉼 없이 생산해야 하는데, 임금을 달라는 대로 퍼 주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달라는 대로 퍼 주는 게 아니라······.”
“지금은 모두가 고통을 감내할 때입니다.”
상무대신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전시 임금 동결법. 당신이 배후에서 조종해 만든 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전쟁이 더욱 확대되면서 전쟁 물자 소요는 점점 더 늘어났다.
그 덕에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들은 정부라는 안정적인 거래처를 상대로 막대한 부를 쌓고 있었다.
오베론 공단에서 생산하는 물량은 노바 동부 공업 지구 생산량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어마어마했고, 오베론 공단은 오베론 가문의 소유였다.
게다가 오베론 공작 가문은 오베론 공단 외에도 많은 사업체에 투자하고 있었다.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지만, 과거 대전쟁 기간과 비슷하다고 보면 임금을 동결함으로써 얻는 오베론 공작의 이익은 천문학적인 것이었다.
‘전시에 임금 상승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물가 상승을 억제할 대책을 마련한 뒤에 시행되어야 했다.
상무대신이 마음속으로 오베론 공작의 탐욕을 비난하고 있을 때 공작이 내무대신을 보고 물었다.
“이번 소요 사태의 배후는 파악했소?”
“네, 재상 각하.”
내무대신이 무겁게 대답했다.
“아우로라 연합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불온한 조직들을 모두 파악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 소탕하겠습니다.”
그동안 각료 회의에서 나온 적이 없는 이야기라 다른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오베론 공작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소탕하시오.”
“네, 각하!”
상무대신 벤야민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갑자기 몸에 한기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