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이런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213. 이런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옷깃을 꽁꽁 여민 사람들이 잔뜩 움츠린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노바의 겨울이 추운 탓도 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갑을 착용한 무장 경찰들이 법원 사거리 인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 마크를 가슴과 방패에 도색한 멕 나이트들도 간간이 보여 위압감을 더했다.
바덴은 자동차 뒷자리에서 그 광경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쪽뿐 아니라 노바 시내 주요 길목, 관청과 대학, 광장에 좍 깔려 있습니다. 노바에 경찰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였어요.”
조수석에 앉은 비서 소피아가 고개를 돌려 바덴에게 말했다.
소피아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두려움과 긴장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별일 없을 거예요.”
바덴이 소피아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리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설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별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덴을 태운 자동차는 상무대신을 만나기 위해 법원 사거리를 지나 대학로 노천카페 거리로 갔다.
소피아의 말대로 대학로에도 무장한 경찰들이 인도를 점거하고 있어 분위기가 살벌했다.
노천카페 거리는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라 손님이 별로 없었는데 대학로에 드리운 암울한 기운으로 인해 아예 오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덴은 자주 가던 카페 앞에 내려 야외 테이블이 아니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몇 개에 손님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테이블에 아는 사람이 보였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나도 방금 왔어요. 앉으세요.”
세련된 신사복을 입은 상무대신 벤야민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바덴은 얼른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는 했나요?”
“상무대신님은 하셨어요?”
“안 했어요. 그럼 간단한 걸로 주문해서 먹으면서 얘기할까요?”
“네.”
바덴이 종업원을 불러 주문했다.
“따뜻한 닭고기 수프, 꿀을 찍어 먹는 빵, 버섯 샐러드, 소고기 스테이크, 이렇게 주세요.”
“너무 많지 않아요?”
“이 정도를 먹어도 금방 배가 꺼질 만큼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몰라서요.”
바덴이 싱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가져온 서류 봉투를 상무대신 앞에 내려놓았다.
“전에 말씀드린 아라드 왕국 철도 부설 건입니다. 아무래도 광석을 들여오려면 열차로 운반하는 것이 최선이니까요.”
벤야민이 봉투에서 문서를 꺼내 신중하게 살펴보며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여러 문제가 걸릴 텐데······.”
“그렇죠. 군사적, 외교적 문제가 있고 또 경제적 타당성이나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 겁니다. 철도 건설의 비용과 기술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군사적, 외교적 부분도 별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정부에서 문제를 삼는다면 잘 좀 부탁드립니다.”
“흐음······.”
벤야민이 찬찬히 서류를 검토했다.
아라드 왕국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을 몰아냈다지만, 다시 침공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럴 경우 철도 건설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 될 뿐 아니라 적의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데 오히려 도움을 주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라드 왕국 측에서 필센 제국과 철도로 연결되는 것을 반길지도 의문이었다.
전쟁을 겪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아라드 왕국의 백성들이 필센 제국으로 넘어가려 할 것이고, 당장 재건 비용이 필요한 아라드 왕국이 푼돈에 자원을 필센 제국으로 넘기게 되어 반감을 사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바덴이 그런 부분에 대한 대응 방안을 작성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철도는 우리 병력을 아라드 왕국으로 빠르게 수송해 방어선을 제때 형성하는 데도 유리합니다. 그리고 아라드 왕국 재건 물자를 보내는 데도 필요하죠. 아라드 왕국에서는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일단 우리 정부에서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확실히 해 주시면 저쪽과 협상하기가 편해질 겁니다.”
“무슨 얘기인지 알았어요. 그런데 산지가 많은 아라드 왕국에 철도를 깔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막대한 공사비를 홀로 감당할 수 있겠어요?”
바덴이 엷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미래를 위한 투자죠.”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벤야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아라드 왕국 재건은 우리 정부로서도 신경을 쓰는 문제인데, 철도가 있다면 여러 모로 좋겠지요. 정부 일을 대신하는 셈이니 반대는 크지 않을 겁니다. 설사 반대가 있다 해도 내가 설득해 나가죠.”
“고맙습니다, 상무대신님.”
그때 종업원이 식사를 내왔다.
두 사람은 먹으면서 대화를 계속해 나갔다.
“정부에서 곧 물가 안정 대책을 발표하게 될 겁니다.”
“물가 안정 대책이오?”
“네. 매점매석 행위를 엄벌하고 식품과 생필품 공급을 장려하는 내용을 담게 될 겁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훨씬 강화할 거예요. 전쟁 초반에 비해 물가 오름세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잘 잡히지 않고 있어요. 이익 추구 욕망을 억누르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렇죠.”
“욕망을 억누를 만큼의 강한 처벌을 시행할 겁니다. 적발되면 인생이 끝장나는 거죠.”
“그래도 근본적으로 공급이 크게 확대되지 않는다면 효과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맞아요. 그래서 공급 확대를 위해 식품, 생필품 공급 업체들에 세제 혜택을 주기로 했습니다. 정부 고시 가격에 공급하는 조건으로 최대 50퍼센트까지 세금을 깎아 주는 거죠.”
“정부 고시 가격이 어떻게 책정될지에 따라 신청 업체가 얼마나 될지 결정되겠군요?”
“그렇기는 하지만, 고슬라 사장님은 신청하는 게 좋을 겁니다. 멀리 보시는 분이잖아요. 정부와 백성들이 고슬라 그룹을 좋게 보게 될 겁니다.”
바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무대신은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식품을 취급하는 반달 그룹은 전시의 불안감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는 대신 되도록 저렴하게 상품을 공급해 시장에서 좋은 이미지를 획득하여 점유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익률은 다른 업종에서 높이면 된다.
변경 구역 투자 감면 혜택과 정부 고시 가격 동참 감세 혜택을 합치면 잘하면 반달 그룹은 면세에 가까운 혜택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부 정책에 적극 동참하겠습니다.”
벤야민은 말귀를 알아먹는 바덴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데 경찰들은 어찌된 건가요? 요새 전시 임금 동결법을 반대하는 집회가 잦은 것과 관련 있어 보이는데······.”
벤야민이 금세 침통한 얼굴로 바뀌더니 새삼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친지들 중에 대학생이 있으면 당분간 학교를 나가지 말라고 하세요.”
“네?”
“고슬라 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의 노동자들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절대 집회에 참석하면 안 돼요.”
“그야 뭐, 알겠습니다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바덴이 눈으로 물었다.
벤야민이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아니면 내일 발표가 있을 겁니다. 우리 제국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아우로라 연합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불온 조직을 일제 검거한다는 내용이죠.”
바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우로라 연합의 사주! 정말인가요?”
벤야민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어요? 백성들에게 그렇게 공표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네?”
“전시에 정부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들, 항의하는 사람들은 아우로라 연합의 사주를 받고 적을 이롭게 하는 자들이라고 낙인을 찍는 겁니다.”
전시 임금 동결법에 반대하는 노동자, 학생들은 적을 이롭게 한 죄를 뒤집어쓰고 싹 잡혀간다.
그렇게 되면 불만이 있고 고통을 받아도 정부에 항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전쟁 수행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일 수 있지만, 너무나 강제적이고 편의적이었다.
벤야민은 각료 회의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 내무대신을 따라가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허! 그럼 이런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이 전쟁에서 패하면 우리 제국은 망하는 것이오. 승리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지. 친지들 중에 대학생이 있으면 당분간 학교를 나가지 말라고 하세요. 괜히 고초를 치르게 될 수도 있으니······.”
대전쟁의 승리를 빌미로 황제가 벌이는 대대적인 공포 정치의 시작인 것이다.
벤야민이 바덴에게 말했다.
“특히 노바의 대학들과 동부 공업 지구에 많은 경찰 병력이 들어갈 겁니다. 혹시 동부 공업 지구에 고슬라 사장의 공장이 있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무얼 어떻게 조심하라는 말씀인가요?”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 운동 세력을 박살낼 모양이에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노동자들도 자기들이 목표라는 것을 모르겠어요? 결국은 동결된 임금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죽은 듯이 일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아시겠지만, 노동자들은 거칠어요. 순순히 물러나지 않죠. 경찰은 그에 대비하고 있어요.”
그에 대비하고 있다는 말이 바덴을 두렵게 했다.
“강력한 물가 안정 대책은 내가 밀어붙인 겁니다. 임금을 동결하려면 물가 먼저 잡아야죠. 부디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 고슬라 사장님.”
벤야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것뿐이라는 데 절망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벤야민 스트라스.
장사꾼 가문 출신의 신진 관료이며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상당한 정치인이자 오베론 공작을 끌어내린다는 같은 목적을 갖고 서로 이용하는 협력자 정도로 이해해 온 바덴은 그의 고뇌와 정치가로서의 신념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클라크!’
루산으로부터 고용 관계를 끝낸다는 통보를 듣고 충격에 빠져 있던 클라크는 호텔을 나선 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바덴은 벤야민과의 만남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차를 탔다.
“집으로 가 줘요.”
“네, 사장님.”
자동차는 대학로를 가득 메운 경찰들 사이를 지나 한참 동안 대로를 달린 후 다시 경찰들이 인도를 장악하고 있는 법원 사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그녀의 아버지가 빵을 만들다 말고 물었다.
“혹시 우리 집사님 왔어요?”
“안 왔는데? 그렇잖아도 클라크가 안 들어와 걱정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바덴은 서둘러 다시 차를 타고 떠났다.
‘어디로 가야 하지?’
바움 대학 학생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혹시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움 대학 도서관으로 가 줘요!”
“네, 사장님!”
그러나 바움 대학은 경찰에 빙 둘러싸여 있었고 자동차 또한 검문을 거쳐야 했다.
“무슨 일입니까?”
“도서관에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운전기사가 살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경찰이 차 내부를 살짝 훑어보고는 통과시켰다.
자동차를 타고 있다는 것은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라 굳이 복잡하게 얽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는 한산했다.
경찰에 둘러싸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학문을 계속할 만큼 둔한 사람들과 건물로 들어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향후 대책을 열띠게 논의하는 운동 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귀가했기 때문이었다.
바움 대학 도서관 앞에 차가 멈추자 바덴은 다람쥐처럼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이 와중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몇몇이 도서관 안에서 달리는 바덴을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역시 클라크는 보이지 않았다.
“아!”
바덴은 도서관을 나와 학교를 둘러보았다.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차를 탔다.
“보름스 장원에 있는 브레이브 랜드로 가요!”
“네, 사장님!”
자동차는 다시 형식적인 검문을 거친 뒤 바움 대학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바람처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