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네가 우리의 에이스다
214. 네가 우리의 에이스다
노바 시내가 긴장감으로 뒤덮인 것과 달리 노바 남쪽 외곽에 있는 보름스 가문의 장원은 산과 들이 며칠 전에 내린 눈으로 뒤덮여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2년 전, 바덴은 증가하는 유제품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보름스 장원에 있는 유제품 공장 설비를 크게 확충하고, 인근 농부들에게 원유를 모두 사 주기로 약속하며 젖소를 기르도록 보조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런데 눈이 쌓이면 원유를 공장까지 실어 나를 수 없기 때문에 농부들과 장원의 일꾼들은 인근 농가에서 매일 신선한 우유를 보름스 장원의 공장까지 실어 나를 수 있도록 눈을 치웠다.
산과 들이 눈에 덮여 있는 가운데 굽이굽이 신작로를 따라 원유 통을 실은 마차들이 오가는 풍경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유를 실어 나르는 마차들이 다니는 서쪽 길이 아닌 북쪽 길로 쭉 올라가면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보름스 장원의 북쪽 경계가 나오는데, 그 아래 너른 골짜기에 첫 번째 브레이브 랜드가 들어서 있었다.
워낙 외진 곳에 있어서 함성을 지르거나 멕 나이트들이 서로 충돌해도 보름스 장원 다른 곳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곳에서 레오파드 트레이너 20여 대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른 곳의 눈이 새하얀 것과 달리 이곳의 눈은 거대한 레오파드 트레이너들이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바람에 흙과 섞여 지저분한 곤죽이 되어 있었다.
레오파드 트레이너들이 뛰어다니고 있는 훈련장 가장자리 높은 지대에는 나이가 어린 소년들이 상급생의 훈련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 그렇게 뛰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닭대가리도 너희보다 잘 알아듣겠다! 걸음마 못 뗐어? 엄마 젖 더 먹고 올래?
얼마 전에 새로 온 교관들 가운데 가장 험상궂은 교관의 목소리가 이곳까지 쩌렁쩌렁 들렸다.
머리에 감은 붕대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기존의 교관들과 달리 품위 없이 상소리를 툭툭 내뱉는 그는 무서우면서도 재미있어 하급생 소년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 신속한 이동의 핵심은, 음, 그러니까, 바로 불안정한 자세에 있는 거야. 무슨 말이냐면, 발바닥 전체를 바닥에 대고 있으면 안정적인 느낌이 들기는 하겠지만, 한 발 한 발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발끝으로 서 있다고 생각해 봐. 불안정하잖아. 그래서 어느 방향이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거거든. 이해했어?
- 네!
- 정말 이해한 거 맞아?
- 아니오!
- 좋아! 발끝으로 걷는다는 느낌으로 두 바퀴 돌아!
20여 대의 레오파드 트레이너가 눈이 지저분하게 짓밟혀 곤죽이 된 골짜기 훈련장을 크게 돌기 시작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야단이었다.
- 발끝으로 걷는 느낌! 그 느낌을 기억해! 이봐, 23번! 뭐 하냐? 걸음마도 못 뗐어? 정말로 발끝으로 걷는 게 아니라 그 느낌만 살리란 말이야! 어차피 트레이너 무게 때문에 땅이 푹 꺼져서 발끝으로 설 수는 없다고!
바이크는 수련생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쉬지 않고 소리쳤다.
그리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지만, 나름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라 6년 동안 교육받은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고, 변경 8군단 파일럿이 된 뒤 루산, 모리츠, 파비안에게 특별 훈련을 받고 깨달은 것, 변경과 전장에서 스스로 체득한 것을 이번 기회에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노바의 귀족 가문 자제들에게 소리치고 다그치는 맛도 쏠쏠했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그동안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내용을 깨닫기도 했다.
바이크에게는 여러모로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바이크의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는 시에나가 교육을 맡았다.
시에나는 나이 많은 상급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누나라고 불러도 되요?”
“나를 쓰러뜨린다면 마음대로 불러, 애송아. 보호구 착용하고 무기 들어.”
“다쳐도 몰라요!”
“흥!”
시에나는 자신을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고 수작을 걸어오는 소년을 방패 하나로 간단히 제압해 버렸다.
“와!”
지켜보던 소년들이 감탄했다.
“너희들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거야?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너희들의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 모두 보호구 착용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나를 공격해.”
“우리 전부 다요?”
“응.”
“그래도 그건 좀······.”
“날 쓰러뜨리는 녀석은 승급시킨다. 바로 화이트 계급장을 달아 주지.”
시에나의 도발에 상급생 소년들이 금방 보호구를 착용하고 훈련용 방패와 대검을 들었다.
이윽고 눈이 녹아 진창으로 변한 땅에서 1 대 수십 명의 대결이 펼쳐졌다.
소년이라지만 시에나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수련을 했기 때문에 힘과 기술이 있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덤벼드는 소년들의 공격을 막고 흘리고, 앞뒤좌우로 살짝 움직여 상대의 균형을 흐트러뜨려 넘어뜨렸다.
그러면서 완전히 포위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났다.
상급생들은 지저분한 눈밭에 계속 쓰러지면서 다시 일어나 덤볐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즐거웠다.
그동안 교관들은 과거 대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몸으로 부딪쳐 상대해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곤죽 같은 눈밭에서 함께 어울리는 이 시간이 즐거웠다.
결국 소년들은 시에나를 쓰러뜨리지 못한 채 숨을 헐떡거렸다.
오랫동안 전선에서 활약해 온 늙은 교관들마저 시에나의 철벽같은 방어에 놀랐으니 소년들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소년들은 이렇게 싸움을 잘하고 털털하고 젊고 예쁜 누나를 본 적이 없었다.
코밑에 이제 막 솜털이 나기 시작한 상급생들은 시에나의 매력에 순식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앞으로 까불지 말고 교관님이라고 불러!”
“네, 누나! 아니, 교관님!”
소년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균형이야. 어느 방향에서 적이 부딪쳐 와도 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해.”
시에나는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오른발을 뒤로 뻗어 버티고 왼팔로 든 방패를 왼발 위에 세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왼발을 축으로 삼아 빙글빙글 돌았다.
“이게 흐트러지면 결국 쓰러져 죽는 거야.”
“교관님은 방어를 하면서도 우리를 쓰러뜨리던데, 그것도 가르쳐 주시나요?”
“그런 건 나중에 익혀도 돼. 경쟁전까지 시간이 얼마 없잖아. 그리고 굳이 상대를 쓰러뜨리려 애를 쓰지 않아도 돼. 내가 자세를 유지하고 쓰러지지만 않으면 상대가 먼저 지칠 테고, 아군이 지친 상대를 쓰러뜨릴 테니까.”
“네!”
“그럼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와. 감기라도 걸리면 전력에 큰 손실이 나는 거니까. 이제 레오파드 트레이너에 타고 방어 훈련을 계속한다.”
“네, 교관님!”
시에나는 소년들에게 몸으로 직접 겪어 보게 한 뒤에 레오파드 트레이너를 타고 훈련을 계속했다.
- 너희는 아주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 셈이야. 좀처럼 다치지 않지. 그러나 상대 역시 마찬가지이고, 감각이 맨몸일 때보다 예민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큰 위험에 처할 수가 있어. 부딪치고 찔려도 아프지 않으니까.
소년들은 시에나의 말을 경청했다.
자신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직접 증명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해 들었다.
- 그래서 멕을 타고 있을 때 내 몸이 얼마나 큰지 내 팔과 다리가 어디까지 뻗는지, 확장된 내 몸의 크기와 동작 가능 범위를 알아야 해.
시에나는 소년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듣고 경쟁전 종목을 들은 뒤 줄곧 고민하다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훈련 방식을 고안해 냈다.
방어술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만 할 수는 없었다.
방어에도 도움이 되지만 멕 나이트 조종술 전반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훈련이었다.
브레이브 랜드가 들어서 있는 골짜기 옆에는 예전에 루산이 봐렌 철골에서 훔친 멕 나이트를 물속에 숨겨 두었던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 옆에 오래된 숲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 훈련을 위해 나무들을 듬성듬성 간격을 유지하도록 남기고 몽땅 솎아내 버렸다.
멕 나이트가 정면으로 걸었을 때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수 있는 간격, 옆걸음을 해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간격, 나무 사이가 넓었다가 갑자기 좁아지는 구역 등 다양한 간격으로 멕 나이트 훈련장을 만든 것이다.
시에나의 의견을 들은 루산이 즉석에서 수용해서 만든 것으로, 보름스 장원의 주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에나는 멕 나이트에 탑승한 수련생들을 데려와 이곳을 통과하도록 했다.
- 숲 반대편까지 통과하는 거야. 나무에 닿으면 안 돼. 부러지면 실격. 통과 시간을 매일 단축시킬 거야.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중간중간 세워 놓은 깃발을 회수해 통과하도록 할 거야.
- 아!
수련생들도 시에나의 의도를 깨달았다.
멕 나이트의 크기를 인식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최선인지 즉시 판단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훈련장인 것이다.
- 앞으로 모든 훈련에 앞서 이곳을 통과하게 될 거야. 교관님들이 너희의 움직임을 일일이 체크해 점수를 매겨 승진에 반영시킬 거야. 자, 그럼 해 봐.
- 네!
소년들이 레오파드 트레이너를 타고 나무들이 기둥처럼 서 있는 숲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평가한다는 말에 나무에 닿지 않도록 너무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소년, 자신의 뛰어남을 보이려 과감하게 움직이다 나무를 부러뜨린 소년···, 소년들은 이 훈련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새롭고 재미있었다.
아직까지는.
***
루산은 전술 훈련과 작전 수행 교육을 담당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매순간 소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처지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 바이크와 시에나가 소년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실력을 점검해 가고 있다는 것도 파악했으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소년들이었다.
오전 일과를 끝낸 소년들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먼저 강당에 모였다.
루산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작전이다. 많은 훈련과 보급도 결국 작전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지. 나는 너희의 장점을 살려 승리 가능성을 높이는 작전을 준비했다.”
수련생들과 기존의 교관들 모두 눈을 반짝이며 루산을 응시했다.
“앞으로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비밀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전 수행 능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전까지 훈련 시간을 늘릴 것이다.”
소년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기존의 경쟁전에서는 브레이브 랜드나 필센 소년 캠프 양측 모두 진형과 역할 위주의 작전을 펼쳐 왔다. 주어진 역할을 어느 쪽이 더 충실히 수행했느냐, 팀워크와 명령 수행 능력이 어느 쪽이 더 뛰어났느냐로 결판이 났지. 사실상 기초 훈련과 집중력, 의지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 것이다.”
늙은 교관들과 수련생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의지가 약해 졌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루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어쨌든 이러한 작전은 모든 전투 요원의 실력이 동등하다는 전제 위에서 실행한 것이다. 양쪽 다 똑같은 레오파드 트레이너에 탑승하고 있고 파일럿의 연령도 비슷하니까 그렇게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지. 그리고 오늘날 전쟁에서는 전투 요원들의 능력 차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전쟁마다 구체적 조건에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물량이 앞서는 쪽이 대부분 승리하니까. 그러나······.”
루산이 잠시 숨을 고른 뒤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게 아니라 15 대 15라는 소규모 교전을 치르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상대보다 실력이 뛰어난 전투 요원이 있다. 똑같은 멕 나이트에 탑승해도 적을 압도하는 에이스 파일럿이 있듯이 우리 브레이브 랜드에는 필센 소년 캠프에 없는 에이스가 있다. 이번에 우리는 에이스를 활용하는 작전으로 필센 소년 캠프를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다.”
에이스!
압도적 승리!
가슴을 뒤흔드는 말에 소년들의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때 루산이 소년들 가운데 한 사람을 바라보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인즈 케넨.”
“네? 네!”
첫날 삐딱한 태도로 루산을 대하던 소년이 갑작스러운 호명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네가 우리의 에이스다.”
“······!”
다른 소년들의 눈에 부러움과 질투심이, 하인즈의 눈에 당황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피어올랐다.
“알겠습니다!”
하인즈를 에이스로 지목한 루산은 곧이어 에이스를 활용한 전술을 칠판에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했다.
“자, 그럼 밖에서 이 전술을 훈련한다.”
“네!”
소년들과 교관들이 강당 밖으로 나가고 루산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급하게 달려오더니 루산 앞에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산과 자동차에 쏠렸다.
이윽고 문이 덜컥 열리고 바덴이 튀어나왔다.
“기사님!”
“무슨 일입니까?”
루산이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덴에게 물었다.
그러나 바덴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