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창문 살짝 내려 봐
216. 창문 살짝 내려 봐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바덴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클라크에게 있었던 일, 상무대신에게 들은 경찰 병력 투입의 목적을 간추려 설명하고 클라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듣던 스텐커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스텐커는 일이 어렵다 쉽다,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고슬라 사장님.”
“네?”
“사장님의 운전기사는 운전을 잘합니까?”
바덴은 스텐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했지만 자기 생각을 말해 주었다.
“잘하는 사람이에요.”
“잘됐군요. 이곳을 출발할 때 뒤를 밟힐 수 있는데, 의심스럽지 않게 떼어 놓으라고 하세요.”
뒤를 밟힌다는 말에 바덴이 놀란 눈을 치켜떴다.
스텐커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오베론 공작의 부하들이 며칠 전부터 우리 사무실을 감시하고 있거든요. 전에 우리 일을 도와준 경찰을 찾아내 협박하고 소재를 파악한 모양입니다.”
“세상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은 우리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감시하는 단계인 것 같으니까요. 아직 우리에 대해 모른다는 뜻입니다.”
“아!”
“그러니 기사님께 돌아가셔서 현재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알려 드리세요. 기사님의 집사 소년은 제가 최선을 다해 찾아 기사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자동차가 많이 늘었다지만, 아직 마차보다 흔하지는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나타난 사람이 공작가의 둘째 아들을 납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탐정의 사무소를 방문하면 감시하는 쪽에서는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바덴은 사무소를 나와 차에 타자마자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
“미행이 붙을 수 있으니 보름스 장원으로 돌아갈 때 떨쳐낼 수 있는 길로 가세요. 우리가 미행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돼요.”
운전기사는 놀랐지만, 그동안 차 안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놀란 티를 내지도 질문하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자동차가 출발하자 공원 옆에 서 있던 차가 따라왔다.
우회전, 좌회전, 넓은 길, 좁은 길도 계속 따라왔다.
운전기사가 말했다.
“미행이 붙은 것 같습니다.”
설마 하던 바덴은 오싹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세월은 세상의 벽에 부딪쳐 의욕이 점점 꺾여 나가던 여자 변호사를 큰 사업가로 만들었다.
게다가 오베론 공작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덴이 담담히 말했다.
“맡기겠어요.”
“네, 사장님.”
운전기사는 자연스럽게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마차 들 사이의 빈틈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다른 차량들을 추월하여 미행 차량과의 거리를 벌리다 그래도 따라붙자 2차선 로터리에서 안쪽 차로로 돌다가 다른 자동차의 앞에 바싹 붙어 바깥 차로로 옮긴 뒤 우회전해 로터리를 빠져나갔다.
미행하던 차량은 다른 차에 막혀 바덴의 차가 빠져 나간 도로로 따라가지 못하고 그 다음 도로에서 겨우 로터리를 벗어났다.
다른 길로 추적을 시도했지만, 이미 바덴의 차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한편, 바덴이 떠나자마자 스텐커는 외출 준비를 했다.
조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집 나간 녀석은 알아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가 그 녀석을 찾으러 돌아다니다 괜히 저 놈들한테 붙잡혀 간다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 아닙니까?”
스텐커가 사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고는 말했다.
“귀족 가문 사기 사건을 생각해 봐. 놈들은 폭력적 방법을 좋아하지 않아. 합법을 가장하여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걸 좋아하지.”
“그렇기는 한데, 이번 건은 사안이 좀······.”
공작이 자신의 아들을 찾고 납치한 세력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훨씬 심각해지는 것이다.
“말했잖아, 미행과 추적은 인내심 싸움이라고. 놈들은 전문가야. 우리가 움직이면 뒤를 밟겠지만, 확실한 것을 얻을 때까지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른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더욱 이 일을 하려는 거지. 가만있으면 뭐가 달라지겠어?”
“네?”
“거친 풍랑 속으로 끌고 다녀 보는 거야. 놈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운이 좋으면 놈들이 탄 배가 우리를 따라오다 험한 파도에 먼저 뒤집힐지도 모르지.”
스텐커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는 곧바로 차를 타고 출발했다.
바덴이 사무소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동차 한 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우리 뒤에 붙었습니다.”
“음.”
스텐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가.”
“네.”
자동차는 노바 시내를 한참 동안 달려 바움 대학에 도착했다.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바움 대학의 불순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경찰의 작전이 조금 전에 시작되어 대학 출입문이 모두 봉쇄되고 체포된 학생을 실어 나르기 위한 죄수 호송 마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오려는 경찰을 막기 위해 학생들이 한차례 저항하여 교문 주위에는 돌과 몽둥이, 피켓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지만, 이미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교를 떠났고 경찰의 수가 워낙 많아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경찰은 수배 중이거나 요주의 목록에 적혀 있는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샅샅이 훑는 중이었다.
일부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 끌려와 죄수 호송 마차에 실렸다.
스텐커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려 호송 마차들이 늘어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경갑을 착용한 경찰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뭐요?”
“괜히 고초를 겪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시오.”
스텐커는 품에서 경찰 패를 꺼내 쓱 보여 주고 다시 집어넣었다. 긴말이 필요 없었다.
“본청 정보과에서 나왔네.”
누가 봐도 베테랑 형사의 모습이었다.
그가 분위기와 정황으로 압도하자 젊은 무장 경찰들이 얼른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러십니까!”
“음. 체포된 아이들 중에 우리가 찾는 녀석이 있는지 확인 좀 해 보겠네. 급한 일이야.”
“알겠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시면 얼른 찾아오겠습니다.”
“내가 들어가서 직접 확인할 거야. 안내만 하게.”
“아! 네!”
스텐커는 무장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호송 마차로 들어갔다.
체포 당시 얻어맞았는지 대부분 피멍이 들어 있는 대학생 10여 명이 밧줄에 묶인 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스텐커의 조사 방법은 별다를 게 없었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했다.
알아낼 때까지 일일이 물어보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소년이 있다. 클라크라고 하는데, 소재를 아는 녀석이 있으면 풀어 주지.”
“······?”
붙잡혀 있던 대학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대학생은 아닌데 바움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집회에 나가 돌 좀 던졌던 모양이야. 아는 사람 없나?”
“아!”
한 학생이 아는 체를 했다.
“왜? 알아?”
“그게···, 누군지는 압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소년.”
“그래?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아, 아뇨! 그냥 유명해서 압니다.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데 매일 도서관에 나와서 공부하고 혼자 밥 먹고 그런다고······.”
“흐음!”
스텐커는 실망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했지만, 처음부터 잘 풀린 경우는 없었다.
“그것 말고 누구랑 어울리는지,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런 것 말이야. 아는 사람 없어?”
학생들이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러다 한 학생이 사정했다.
“아저씨, 아니 선생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정부에 반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하다가 잡혀 왔어요!”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저도요! 한 번도 집회에 나가 본 적도 없는데 잡혀 왔어요! 제발 풀어 주세요!”
“할머니가 깜짝 놀랄 거예요. 심장이 안 좋으시거든요.”
스텐커는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경찰서에 가서 사실대로 말하면 별일 없을 거야.”
그는 첫 번째 호송 마차에서 내려 무장 경찰의 안내를 받아 두 번째 마차에 올라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시간이 흐르고, 붙잡힌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자 먼저 채운 마차가 공간을 비우기 위해 가까운 경찰서로 떠났다.
스텐커는 마음이 급해졌다.
경찰서로 들어가면 가짜 경찰 패만으로 움직이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둘러 나머지 호송 마차를 돌며 탐문을 계속했다.
안내를 해 주던 무장 경찰도 점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차 곁으로 다가와 스텐커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다 밖으로 나온 그를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날이 저물기 직전, 체포된 학생 한 명으로부터 의미 있는 진술을 듣게 되었다.
“그 아이가 행동하는 청년 그룹 학생들과 함께 어제 학교를 빠져나가는 걸 봤어요.”
“어디로 갔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때부터는 소재 파악이 좀 더 쉬웠다.
다른 호송 마차에서 다른 학생으로부터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행동하는 청년 그룹은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한다며 떠났어요.”
“어디로 갔는데?”
“동부 공업 지구로 갔을 거예요.”
스텐커는 서둘러 차로 돌아왔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조수가 얼른 물었다.
“알아내셨습니까?”
“일단 사무소로 돌아간다.”
“네.”
자동차가 출발했다.
그러자 미행하던 자동차 역시 다시 그 뒤를 따라갔다.
스텐커와 그의 조수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내버려두었다.
스텐커가 조수에게 말했다.
“동부 공업 지구로 간 것 같다.”
“왜요?”
“왜긴 왜야, 함께 투쟁한다고 갔지. 들어 보니 클라크가 어울린 학생들이 가장 강성이라고 하더군.”
“이런! 동부 공업 지구는 전쟁 분위기라던데······.”
“그러게 말이야. 후유~!”
스텐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동부 공업 지구에서 가장 강성인 노조가 지금도 제철 노조인가?”
“제철 노조, 하역 노조가 제일 셌는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알아봐.”
“네.”
그들이 탄 자동차는 가로등이 속속 밝혀지는 퇴근길 막힌 도로를 달려 사무소에 도착했다.
스텐커가 조수 한 명에게 나직이 지시했다.
“보름스 장원으로 가서 기사님께 말씀을 드려. 집사 소년이 동부 공업 지구에 있는 것 같다고. 미행당하지 않게 조심해.”
“알겠습니다.”
“만약 기사님이 오신다고 하면 내가 종종 들르는 주점 알지?”
“네.”
“그 앞에 여관이 있어. 내가 내 이름 대고 방을 잡을 테니까 거기서 만나면 된다고 말씀드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조수가 떠나자 스텐커가 남은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연기를 좀 할 필요가 있겠어.”
“무슨 연기요?”
***
날이 저물고 밤이 점점 깊어갔지만, 탐정 사무소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울름 남작의 부하들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노바 겨울의 차가운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곳을 감시했다.
“바움 대학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온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냥 본업에 충실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이야?”
“오늘 낮에 의뢰인이 찾아왔잖아. 자동 마차를 타고 온 여자 말이야.”
“놓쳤다며?”
“흔한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
“어쨌든 잘 나가는 사업가 집안에서 자식을 바움 대학에 보냈는데, 거기서 친구를 잘못 만나 집회 같은 데 나가게 되고 그러다 잡혔나 보지. 풀려나게 해 달라고 의뢰하러 오지 않았겠어? 아니면 찾아서 집에 무사히 데려와 달라고 했거나 말이야.”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 비슷한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럴싸하네.”
“그럼! 척 보면 척이지.”
지루한 감시 일을 할 때 동료와의 대화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거야? 잡아서 족치면 되지.”
“알잖아, 우리 보스 성격. 확실한 게 아니면 움직이지 않아. 공작님께 누가 될 만한 일은 절대 안 한다는 주의.”
“알지. 그래도 겨울에 이 짓을 하는 건 조금 힘이 드네. 나도 늙었나 봐.”
“하하, 약한 소리 하기는. 집에 가서 애들 보고 싶어서 그래?”
“너도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아 봐. 안 그런가.”
“쉿! 저기, 놈들이 나온다.”
탐정 사무소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들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인적 없는 보도를 걸어 울름 남작의 부하들이 타고 있는 자동차 쪽으로 다가왔다.
울름 남작의 부하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단검을 뽑아 손에 쥔 채 탐정 사무소에서 나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자신들이 타고 있는 자동차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뭔가 자기들끼리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창문 살짝 내려 봐.”
소리 나지 않게 차창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바깥의 소리가 좀 더 잘 들어왔다.
“···위에서는 안가를 옮기라는 데,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동부 공업 지구가 경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단 말이야.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거기서 나오는 건 더 어려워. 검문, 검색이 장난이 아니라니까!”
“하긴 귀빈을 데리고 나오다 경찰 검문에 걸렸는데, 내가 누구의 아들이다! 하고 소리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테니까.”
“아니, 위에서는 왜 이번 작전 대상에 동부 공업 지구가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를 안 해 준 거야? 미리 해 줘야 사전에 옮기지.”
“자기들도 몰랐대. 워낙 갑자기 일어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는 거야.”
“젠장! 뭐, 별수 있나?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경찰 작전이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
탐정 사무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점점 멀어졌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들은 울름 남작의 부하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는 가서 남작님께 보고해! 나는 놈들을 뒤쫓을 테니까.”
“알았어!”
탐정 사무소의 자동차가 전조등을 켜고 이동하자 잠시 후 근처에 있던 자동차 두 대가 시동을 켜고 그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세 대가 떠난 뒤, 또 다른 자동차 한 대가 보고를 위해 다른 길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