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그래도 같이 가요
217. 그래도 같이 가요
짧은 겨울 해가 저물자 레오파드 트레이너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산골짜기 수련장은 어둠과 적막에 휩싸였다.
저녁 식사 후에도 늙은 교관들의 교육이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실내 교육이라 하루 종일 재잘대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루산은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와 호숫가를 거닐었다.
차가운 바람과 차가운 달로 인해 외로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내 힘으로 망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돈을 벌어 장원과 저택을 되찾는 것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삼고 변경으로 가서 괴수들을 무수히 때려잡았다.
아직 원수를 갚지는 못했지만, 가문의 원수인 오베론 공작을 상대로 담판을 지어 어렵사리 되찾은 이 땅을 거닐고 있으니 뿌듯함을 느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산은 일말의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이 땅이 보름스 가문의 땅이라지만,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려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친근한 기억도 없었다.
오히려 거친 변경 8구역이 더 편안했다.
크고 광막하고 무섭고 사나운 변경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다름 아닌 클라크였다.
온순하면서도 진중하고, 우직하면서도 똑똑한 개척촌 6남매 집의 첫째.
루산이 탄 마차를 따라잡으려고 사업 계획서를 들고 달려오다 넘어진 바덴을 위해 실수인 척 가방을 마차 밖으로 던지는 영악함은 선한 마음씨에서 나온, 참으로 기특한 것이었다.
만약 클라크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루산은 바덴과의 인연을 이어 가지 못했을 테고, 여전히 바덴은 일감을 얻기 위해 버둥대는 별 볼 일 없는 여자 변호사로, 루산은 그저 괴수를 잘 잡는 일개 변경 파일럿으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바에서 산 쿠키도 고향의 동생들 생각에 차마 먹지 못하고, 코부스 역에서 산 빵도 에밀리, 찰스와 나눠 먹을 생각에 기뻐하고, 루산이 원정 사냥을 나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에는 어김없이 야학에 나가서 글을 가르치는 소년.
루산이 변경 8구역을 편안한 고향처럼 느끼는 이유는 바로 선하고 따뜻한 클라크가 늘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클라크가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경찰대를 향해 돌을 던졌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실망감과 배신감에 분노하여 고용 계약을 종료한다고 통보하기는 했지만, 바덴의 말마따나 어린애 같은 짓이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후유! 어쩌면 클라크가 돌을 던질 정도로 이 나라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지.’
루산에게 황제는, 제국 기사 아카데미 시절까지는 충성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가문을 망하게 한 오베론 공작의 행위를 알면서도 내버려둔, 주범 아니면 방조범이었다.
그저 원망하고 넘어갈 대상인지 복수의 대상인지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황제가 개인적인 원한과 얽혀 있어 생각해 보는 정도였지 그 황제를 중심으로 한 이 나라의 정치나 사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야겠어.’
클라크와 좀 더 성숙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생각해 보면 클라크가 참가한 집회에서 철폐를 주장했다는 전시 임금 동결법은 자신과 무관한 사안이 아니었다.
바덴이 운영하고 있는 많은 사업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법률이니 필연적으로 자신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바덴이 알아서 처리해 왔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보고를 이해하려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는 갖춰야 할 것 같았다.
‘오베론 공작이 전쟁 기간 동안 막대한 이익을 얻기 위해 전시 임금 동결법을 만들었단 말이지?’
불쾌하게도 이 법률에 대해서는 오베론 공작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 바덴이 운영하는 사업에도 이익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오베론 공작과 같은 편에 서고 그 맞은편에 노동자들이 서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루산은 최초로 선명하게 인식해 보았다.
그것은 상당히 이질적이고 껄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클라크가 자신이 알던 선한 변경 소년이 아닌 것처럼, 자신과 오베론 공작 맞은편에서 대치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자신이 인식하고 있던 선량하고 수동적인 백성들이 아니었다.
‘공화나 민주 따위의 말에 대한 내 거부감과 냉정한 평가가 결코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변경에서 괴수들과 씨름하는 동안, 아니면 내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그 전부터 세상은 꾸준히 변해온 것이 아닐까?’
평민 출신 소년들로 이루어진 필센 소년 캠프가 귀족 소년들만 단원으로 받는 브레이브 랜드를 계속해서 이겨 왔다는 사실과 노동자들이 대로를 메우고 경찰대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사건은 어쩌면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민들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반 황제가 귀족들의 힘을 빼앗기 위해 평민들에게 재산과 권리를 나눠 준 것이지만, 그로 인해 성장한 평민들이 이제 더 큰 재산과 권리를 위해 황제를 들이받는 것인가?’
겨울밤 캄캄한 달이 비치는 호숫가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루산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문득 그런 생각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 뒤로 더 복잡한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려 할 때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대장님! 여기 계셨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시에나의 목소리였다.
그 옆의 실루엣은 바이크였다.
그런데 그 뒤로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무슨 일이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루산은 시에나와 바이크가 데려온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전에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는, 스텐커의 조수였다.
“기사님!”
“아! 어떻게 됐습니까?”
루산이 물었다.
스텐커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 그가 클라크를 찾아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바덴으로부터 이미 들었던 것이다.
스텐커의 조수는 바이크와 시에나의 눈치를 보다 루산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클라크는 아마도 동부 공업 지구로 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울리던 그룹의 학생들이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투쟁한다며 그쪽으로 갔다는 것까지 알아냈습니다.”
“동부 공업 지구?”
“네. 강성 노조들이 동부 공업 지구를 근거로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동부 공업 지구는 지금 경찰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입니다.”
루산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꽤 강압적인 소탕 작전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우로라 연합의 사주를 받고 있는 불온 조직을 쓸어버린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것이라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찾기는 어렵겠군요?”
“그렇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찾아낼 것입니다.”
스텐커를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에 루산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스텐커의 조수에게 물었다.
“감시당하는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조수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고 말했다.
“그 둘째 아들을 동부 공업 지구 안에 데리고 있다는 식으로 놈들에게 흘릴 것입니다.”
“음?”
“우리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건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에 경찰 손을 빌려 치우겠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찰 포위망을 뚫고 동부 공업 지구 안으로 들어갈 때 놈들이 쫓아오면 경찰과 부딪치게 만드는 거죠.”
“아!”
“그 사이 우리는 자취를 감추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동부 공업 지구 인근에 여관을 잡아 놓겠다고 합니다. 기사님께서 궁금하시면 그곳에서 만나 보고드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루산은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가죠.”
루산은 동부 공업 지구로 가 보기로 했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직접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곤란한가요?”
“아, 아닙니다!”
루산이 스텐커의 조수와 함께 이동하려 할 때 바이크가 말했다.
“대장님, 같이 가요!”
“어딘 줄 알고 같이 가?”
이번에는 시에나가 나섰다.
“클라크 찾으러 가는 거 아닌가요?”
“같이 가요. 어차피 여기서는 할 일도 없으니까요.”
“할 일 없으면 쉬어. 내일도 애들 훈련시켜야지.”
그러나 두 사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루산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면 심각한 일에 휘말릴 수 있어.”
그러자 바이크가 피식 웃으며 작게 말했다.
“이미 대장님과 함께 저 산 너머에 있는 멕 나이트 공장에서 수십 대나 빼돌린 몸입니다. 새삼스럽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거야.”
그 말에 잠시 주춤하던 바이크가 짐짓 비장하게 말했다.
“그래도 같이 가요. 대장님 혼자 어려움을 겪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제가 어려움에 처했다면 대장님은 기꺼이 도와주셨을 거잖아요.”
“아닌데?”
“네?”
“······.”
“······.”
당황하는 바이크를 보고 루산이 피식 웃었다.
클라크와 고용 관계를 종료한다고 선언한 이후 줄곧 그늘져 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떠오른 웃음이었다.
“그래, 같이 가자!”
그제야 바이크의 표정이 환해졌다.
루산이 앞장서서 걷고 바이크가 그 뒤를 따라갔다.
시에나가 바이크 옆에 붙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찍으며 놀렸다.
“너, 울 것 같더라?”
“장난 하냐? 내가 왜 울어?”
“나야 모르지.”
“체!”
바이크가 못마땅하여 걷는 속도를 높였다.
“야! 같이 가! 무섭다고!”
시에나가 겁먹은 아기 염소처럼 종종걸음으로 바이크를 따라갔다.
그런 바이크, 시에나와 함께 루산은 스텐커의 조수가 타고 온 자동차를 타고 보름스 장원을 벗어났다.
차가운 달빛과 차가운 바람은 그대로였지만, 루산은 보름스 장원의 밤 풍경이 좀 더 포근해진 것 같았다.
***
부하로부터 보고를 들은 울름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부 공업 지구?”
“네, 남작님!”
“그게 전부야? 둘째 공자가 동부 공업 지구에 갇혀 있다는 것 말고, 놈들의 정체 같은 건?”
“우리를 노출시키지 않고 단서를 잡으려고 한 거라······. 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
“동부 공업 지구에 많은 경찰 병력이 투입되어 대대적인 소탕이 벌어지니까 안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지시가 방금 떨어져 불만이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위에서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안가, 위?”
“네. 그리고 위에서도 워낙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늦게야 알았다고······.”
“흐음!”
울름 남작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역시 정부 조직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오베론 공작의 둘째 아들을 감금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루트 오베론의 움직임을 파악해 이미 배가 출발한 뒤 바다 위에서 경찰을 움직여 비밀리에 체포한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상을 철저히 감시하고 실행에 옮기는 능력이 무시무시했다.
루트 오베론을 붙잡아 두고 오베론 공작가의 약점을 캐내서 이익을 보려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황제?”
“네?”
“아니다.”
울름 남작은 그 정도로 간 큰 짓을 할 사람은 역시 황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 직속의 어느 조직이 움직인 것이 틀림없다!’
그의 충성심은 오롯이 오베론 공작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주눅 들지 않았다.
누구든 오베론 공작을 찌르려 한다면 기꺼이 그 의도를 알아내 분쇄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었다.
“인원을 총동원해 동부 공업 지구로 간다! 공자님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게 불가능해지면 놈들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오베론 공작의 심복 울름 남작이 부하들을 데리고 직접 동부 공업 지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