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존재만으로 공포에 떨게 하라
221. 존재만으로 공포에 떨게 하라
필센 소년 캠프의 삼각 대형과 브레이브 랜드의 역삼각 대형 간의 충돌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필센 소년 캠프 측 삼각 대형이 브레이브 랜드의 역삼각 대형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꼭짓점에 눌린 브레이브 랜드의 역삼각 대형은 자연스럽게 V자 모양으로 변해 필센 소년 캠프의 삼각형을 포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포위한 것이 아니라 뚫리기 직전이었다.
레오파드 트레이너 15대의 힘을 온전히 선두 꼭짓점에 집중시킨 삼각 대형과 15대의 힘이 변으로 분산되는 역삼각 대형의 충돌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브레이브 랜드 측 레오파드 트레이너들은 필센 소년 캠프 측 삼각 대형 빗변에 힘을 쏟아야 해서 정면으로 밀기만 하면 되는 필센 소년 캠프 측에 비해 미는 힘에 허실이 발생했다.
브레이브 랜드의 레오파드 트레이너들이, 밀고 들어오는 필센 소년 캠프의 삼각 진형에 좌우 측면으로 벌어지며 뒤로 쭉쭉 밀렸다.
“아!”
참관인들 가운데 브레이브 랜드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 시합을 보고 이번 경쟁전은 이변이 벌어지나 싶었는데, 역시 필센 소년 캠프는 강하군요!”
“필센 소년 캠프가 강하다기보다 브레이브 랜드 쪽이 너무 안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형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무게와 출력이 동일한 기종을 똑같은 수로 동원하는 시합인데 좌우에서 포위하는 형태라니, 삼각 진형의 돌파를 막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지요.”
한 장군의 말에 다른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 수준이 동일하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의지나 열정과 무관하게 수학적, 물리적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훈련 수준조차 필센 소년 캠프가 더 높아 지금까지 매번 이겨 오지 않았는가!
첫 번째 종목에서 패배하여 충격을 받았던 슐라우 남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고슬라 사장. 수준 차이가 확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하하, 그럼 끝나고 이야기하죠.”
바덴은 내심 초조했지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애를 쓰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경기장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몇 발짝만 더 밀리면 필센 소년 캠프 선두 기체를 상대하는 브레이브 랜드의 기체는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고 양쪽으로 완벽히 갈린 기체들은 각개 격파를 당할 상황이었다.
군대, 작전, 멕 나이트에 대해 잘 모르는 여자가 봐도 그래 보였다.
그런데 그때 브레이브 랜드 쪽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 철벽 준비!
역삼각형 맨 뒤에 서 있던 하인즈가 외부 확성기로 크게 구령을 외쳤다.
- 얍!
브레이브 랜드의 소년 파일럿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외부 확성기로 증폭된 소리라 관람석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마주 선 필센 소년 캠프 파일럿들은 상대방이 대단한 작전을 펼치는 줄 알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 철벽 개시!
- 얍!
V자를 이룬 브레이브 랜드의 레오파드 트레이너들이 두 팔로 붙잡고 있는 방패에 어깨를 기대고 왼발을 뒤로 쭉 뻗으며 상체를 상대 쪽으로 더 기울였다.
발바닥을 바닥에 박고 몸체가 지면과 약 45도가 될 정도로 기울여 악착같이 상대의 돌진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뭔가 대단한 작전이 펼쳐지리라 예상하고 긴장하던 필센 소년 캠프 파일럿들은 코웃음을 쳤다.
- 엥? 이게 뭐야?
순간적으로 전진 속도가 조금 느려지기는 했으나 기체의 중량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엔진 출력이 증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몸을 심하게 기울인 탓에 뒷줄의 기체가 앞에 있는 동료 기체의 등을 받치기 어려워 적의 전진을 막는 데 방해만 되었다.
브레이브 랜드 기체들이 다시 쭉쭉 밀리기 시작했다.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장군들도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준비한 것이 겨우 이 정도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놀람으로 바뀌었다.
브레이브 랜드 진형 맨 뒤에 서 있던 기체가 아군 방패 벽 뒤에 숨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재빨리 왼쪽으로 돌아 필센 소년 캠프 진형 뒤를 점한 것이다.
“뭘 하려는 거지?”
철벽이라는 작전은 사실 속임수였다.
돌파하는 쪽은 상대가 몸체를 앞으로 급격히 기울여 버팀으로써 방어를 위해 온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별것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롯이 상대의 방어 전술의 변화에 신경을 쓰다 긴장이 풀리며 다시 상대를 밀어붙이는 데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이 에이스 파일럿이 뒤로 돌아간다.
떠나기 전 루산이 말했다.
“필센 소년 캠프 쪽은 집단 진형으로 밀어붙여 끝내려 할 것이다. 그게 그쪽의 장점을 살리는 길이니까. 우리도 방어술 훈련을 했다지만, 똑같이 방패 진형으로 맞서 싸우면 이기기 어렵다.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
“그럼 방어 훈련을 괜히 한 건가요?”
“아니지. 순간적으로 돌진을 저지하고 주의를 끌 수 있다. 적을 속이는 것이지.”
“······?”
“그 사이 에이스가 적의 등 뒤로 돌아 해치운다.”
“······!”
“그동안 회전 종목은 진형 대 진형으로 맞부딪치는 방식으로 전개돼 왔다. 사실 그게 회전의 핵심이기도 하지. 우리는 우리의 장점을 살려 이러한 방식에 변화를 준다.”
소년들이 눈을 빛냈다.
“마나 진동 대검이 없어도 등을 보이고 있는 적의 기체를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평민 소년들은 불가능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검을 수련해 온 너희들은 가능하다.”
하인즈는 필센 소년 캠프의 삼각 진형 맨 뒤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필센 소년 캠프의 기체들은 동료의 등에 방패를 대고 보조를 맞춰 힘껏 미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검은 베고 찌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방패를 버린 하인즈는 등을 보이고 있는 적 기체의 목에 대검을 걸어 두 손으로 - 오른손은 대검의 손잡이, 왼손은 칼날을 잡아 - 힘차게 뒤로 당겼다.
- 어?
영문을 모른 채 갑자기 기체가 뒤로 당겨진 필센 소년 캠프의 파일럿은 헛바람을 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쓰러지면 전투 불가 판정!
하인즈는 다음 기체들도 대검을 이용하여 때로는 목을 걸고, 때로는 팔을 걸어 적 기체를 쓰러뜨렸다.
워낙 엉겁결에 당한 데다 하인즈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 필센 소년 캠프의 소년 파일럿들은 그의 소드 레슬링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맨 뒤에서 앞줄의 기체를 밀고 있는 기체 다섯을 차례로 떼어내 쓰러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맨 뒷줄의 기체 다섯 대가 쓰러지자 필센 소년 캠프의 삼각 진형은 돌파력을 잃고 정말로 브레이브 랜드의 V자 진형에 포위되었다.
그때부터는 하인즈와 귀족 소년들의 일방적인 시간이었다.
필센 소년 캠프의 레오파드 트레이너들이 격렬히 저항했지만 마나 진동 기능이 없는 대검으로 하인즈는 평민 소년들이 탑승한 기체를 잘도 쓰러뜨렸고, 그동안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귀족 소년들은 뭉쳐 있는 적의 기체를 하나씩 강제로 뜯어내 바닥에 패대기쳤다.
속이 후련했다.
승리의 기쁨은 대단했다.
발끝에서 올라온 짜릿한 기운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 이겼다!
- 와아아아!
브레이브 랜드 소년들이 기쁨의 환호를 올렸다.
그동안 계속된 패배로 주눅 들어 있던 귀족 소년들이 처음으로 평민 소년들에게 승리를 거둔 날이었다.
관람석도 난리가 났다.
귀족 소년들의 부모들뿐 아니라 참관한 군 관계자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허! 이런 작전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앞으로 경쟁전의 양상이 더 복잡하게 변하겠어요.”
진형 전술뿐 아니라 개인의 기량을 고려한 전술,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심리전, 밀어낼 것인가 쓰러뜨릴 것인가에 대한 고려······.
레오파드 트레이너를 타고 맞붙는 집단 회전 종목이 더욱 흥미롭게 전개될 것 같았다.
“기대가 됩니다!”
슐라우 남작만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잠깐의 휴식 시간 이후, 이번 경쟁전의 승패와 무관하게 마지막 종목인 깃발 쟁탈전이 벌어졌다.
평민 소년들은 한 종목이라도 승리를 거두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회전 종목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서 펼쳐지는 깃발 쟁탈전에서 종횡무진 날뛰는 에이스 파일럿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
“너는 에이스야! 에이스는 사자다. 존재만으로 공포에 떨게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하인즈 케넨은 루산을 말대로 사자가 되어 깃발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누볐다.
일대일은 말할 것도 없고 순간적으로 다섯 대에 둘러싸여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두셋을 쓰러뜨리고 이탈했다.
평민 소년들은 마음은 달려들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몸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깃발 쟁탈전도 브레이브 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 와아아아아!
브레이브 랜드 소년 파일럿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가운데, 한동안 말없이 손을 떨던 슐라우 남작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고슬라 사장, 축하합니다. 드디어 브레이브 랜드가 첫 승리를 가져가는군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바덴이 최대한 기쁨을 억누르고 대답했지만, 저절로 피어나는 미소를 감출 수는 없었다.
슐라우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조금 전에 한 약속은······.”
“무슨 약속 말씀이세요? 아! 승리하는 쪽이 상대를 흡수한다는 것 말인가요? 당연히 장난이죠.”
“하하! 그, 그렇죠?”
“그럼요! 그저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나눈 이야기로 저는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크흠!”
“다만 남작님.”
바덴이 미소를 잃지 않는 가운데 슐라우 남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브레이브 랜드와 필센 소년 캠프가 앞으로도 서로 교류하며 상대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보완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소년들에게도, 필센 제국에도 더 이로울 것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슐라우 남작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눈꺼풀이 떨리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
루산 일행은 동부 공업 지구 남쪽에서 밀고 올라간 경찰 병력을 따라 - 정확히 말하면 진압 부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지구대 경찰 병력과 함께 - 공장들을 죽 훑으며 이동했다.
간간이 체포된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스텐커는 클라크의 소재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클라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를 확정했다.
“다른 쪽에서 진입한 경찰 병력에 체포되지 않았다면 아인스 제철에 집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사님.”
“아인스 제철?”
“네. 공업 지구 동쪽 강변에 자리한 제철소입니다.”
루산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오래되고 규모가 큰 제철소였다.
“제철 노조의 본거지이기도 하죠. 공장 건물이 크고 담장 또한 높아서 입구가 뚫리면 거기서 마지막까지 농성하기로 했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루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데 그쪽으로 가면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습니까?”
“가려면 경찰 병력에 완전히 포위되기 전인 지금 가야죠.”
“아직 포위가 안 됐어요?”
“네, 기사님. 남쪽 병력이 가장 먼저 입구를 뚫었고 서쪽과 북쪽은 남쪽보다 늦게 뚫었답니다. 주변 지역을 소탕하며 밀고 들어갈 거라 아인스 제철을 완전히 에워싸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겁니다.”
“그럼 가죠.”
“네, 기사님.”
스텐커는 아인스 제철 안으로 들어가 클라크를 만난다 해도 데리고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 클라크를 찾는 동안 포위되기라도 하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텐커는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처럼 경찰 신분을 이용하고 과거 동료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했다.
스텐커는 루산 일행을 이끌고 경찰대를 벗어나 자신이 아는 길로 아인스 제철을 향해 차를 몰았다.
크고 작은 공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곳은 버려진 도시인 양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그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스텐커의 조수가 말했다.
“저놈들, 지금도 따라오는군요.”
뒤쪽에서 울름 남작의 부하들이 탄 자동차가 계속해서 따라왔다.
그들도 도로 위에 다른 차량이 아예 없어 미행 사실을 들킨 것을 알았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텐커는 저들을 처리할 방법이 새롭게 떠올랐다.
“신경 쓰지 말고 아인스 제철로 가기 전에 골목으로 들어가.”
“네.”
골목으로 들어간 일행은 울름 남작의 부하들이 오기 전에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기름때에 찌들고 빛이 바랜 것이 영락없는 노동자의 작업복이었다.
“차는 여기 세워 두고 이제 달려서 들어갈 겁니다.”
“알았어요.”
그들은 골목에서 다시 빠져나와 아인스 제철을 향해 뛰었다.
잠시 루산 일행을 놓친 울름 남작의 부하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따라왔다.
아인스 제철의 입구는 무거운 철강 제품들을 잔뜩 쌓아 방어벽을 쳐 놓았고 급조한 무기를 든 멕 워커들이 서성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 주로 서쪽과 북쪽에서 - 몰려온 노동자들이 무거운 얼굴로 아인스 제철 입구 방어벽 사이의 좁은 틈을 통과해 최후의 성채로 들어가고 있었다.
눈이 내리려는지 하늘이 잔뜩 찌푸린 가운데 오래된 제철 공장은 눈이 쌓이기 전에 이미 극심한 두려움과 마지막에 부딪친 처절한 저항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