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두 사람, 무슨 관계죠?
229. 두 사람, 무슨 관계죠?
윗사람의 발길이 뜸하면 아랫사람이 게을러지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
루산의 매형 노이어는 처남이 워낙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사실상 장원을 돌보지 못하리라 생각해 아랫사람들이 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재산을 몰래 빼돌리지 못하도록 가끔 운영 상황을 살펴봐 주기 위해 보름스 장원을 찾았다.
그에게는 권한이 있었다.
보름스 가문이 망할 당시 남은 빚을 노이어의 헤링겐 가문이 떠안아 주었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이 빚쟁이들에게 더는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루산은 그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보름스 장원의 경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감사 권한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이어는 자신의 권한을 챙기기 위해 장원을 돌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처남이 애를 써서 되찾은 장원이 관리 소홀로 망가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름스 장원은 찾아올 때마다 놀랍게 변신해 있었다.
공사가 그치지 않더니 도로는 매끄럽게 포장돼 마차나 자동차가 다니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시골이면 으레 온갖 잡초로 뒤덮이게 마련인 도로 옆도 깔끔하게 제초 작업이 돼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나 오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이것만 봐도 장원 책임자가 관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보름스 장원은 그림 속에서나 등장할 만한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시골은 이렇지 않다는 것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면 정돈돼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역시 가문의 장원을 관리하면서 알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놀랐다.
그런데 겉모습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내실은 더욱 어마어마했다.
사기를 당해 남의 손에 넘어간 뒤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던 유제품 공장은 노후 설비를 모두 교체하고 규모를 점점 늘리고 있었다.
젖소를 키우는 목장도 사육 두수가 크게 늘어 여러 곳으로 확장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보름스 장원 인근 지역 - 농지법이 실행되기 이전의 보름스 장원을 포함한 노바 남쪽 농촌 지역 - 농부들에게 지원금을 주어 젖소를 기르게 하고 원유를 모두 받아 주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장부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돼 있었는데, 그 일 처리가 매우 체계적이고 깔끔하여 도저히 시골 장원을 운영하는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그 역시 헤링겐 가문의 여러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었기에 장부들만 보고도 보름스 장원이 얼마나 대단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브라운 씨, 유제품 설비를 얼마나 더 늘릴 생각입니까?”
실질적으로는 목장 책임자이지만, 명목상으로는 보름스 장원의 총지배인으로 알려진 하크 브라운은 노이어와 안면이 있었다.
루산의 누나는 보름스 가문의 장원이 사기로 넘어가기 전에 헤링겐 가문의 장남 노이어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이어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원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늘릴 계획입니다.”
“하! 그렇습니까? 사실상 제한은 없군요?”
“경관을 해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흐음···, 젖소 사육 두수도 계속 늘리고 있군요? 젖소 사육 농가도 늘어나고 말입니다.”
“현재 노바에 공급되는 우유와 치즈가 계속 늘어나고 있거든요. 전쟁 이후에도 가격을 높이지 않았더니 판매량이 쭉쭉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크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덴은 보름스 장원에서 나는 우유와 치즈를 반달 식품에 포함시키지 않고 독자적인 브랜드로 남겨 놓았다.
이것은 사업적인 판단이라기보다 직감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가 루산의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것이었다.
반면, 보름스 장원은 자신과 루산의 것이 아닌 가문의 것이었다.
그래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루산도 그것을 더 좋아할 것 같았다. 물론 신경도 쓰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어쨌든 사업적으로는 줄리아가 책임자로 있는 용감한 나라 디자인 팀의 도움을 받아 친숙하고 세련된 포장과 홍보를 하고, 판로 확장과 공급에서는 반달 식품 유통 라인의 도움을 받도록 하면서도 우유, 치즈, 버터, 연유 등 유제품 라인은 보름스라는 상표를 쓰도록 했다.
보름스 우유, 보름스 치즈, 보름스 버터 등이 노바에 공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 다른 식품들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는 와중에도 이 제품들은 바덴의 방침에 따라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름스 유제품들은 노바에서 점유율이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노바에서 판매하는 보름스 유제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량은 전부 반달 식품으로 공급하고 있는데, 반달 식품 공장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더 많은 물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육 두수를 계속 늘리고 설비를 증설하고 있는 것이죠.”
보름스 가문의 유제품은 보름스 상표를 달고 노바로 직접 판매되는 것을 제외하면 전량이 반달 식품 공장으로 들어갔다.
반달 그룹 식품군이 점점 늘어나면서 식품 재료로 더 많은 유제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보름스 장원은 규모가 상당하죠. 아무리 외곽이라지만 수도에서 이 정도 규모의 장원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 넓은 장원을 이처럼 공들여 관리하고 목장을 늘리고 유제품 공장 설비를 확대하는 데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었을 텐데, 이걸 모두 처남이 댔다는 겁니까?”
가문을 살리겠다며 변경으로 간 처남이 매일매일 괴수를 사냥해 번 돈으로 이 엄청난 투자금을 마련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장부를 보니까 반달 그룹과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해 보이는군요. 상품 광고부터 유통까지 보름스 유제품을 함께 취급하고, 보름스 유제품을 제외한 전량이 반달 식품의 원료로 들어가고 있어요. 유리한 조건에 독점 공급 계약이라도 맺은 겁니까? 아니면 투자금 지원을 명목으로 코를 꿰인 겁니까?”
노이어가 하크에게 물었다.
사업을 하는 그가 볼 때에 반달 식품과 보름스 장원의 관계는 밀접해도 너무 밀접했다.
보름스 장원으로서는 생산하는 제품을 여러 곳에 판매하는 것이 이익이다. 수요자가 많을 때 더 유리한 조건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름스 상표를 달고 나가는 제품을 제외한 막대한 물량이 전부 반달 식품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식품 회사들과 접촉하거나 판로를 확장하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여러 모로 의심스러웠다.
처남은 머나먼 변경에서 빚을 갚겠다고 여전히 험한 일을 하고 있는데, 되찾은 보름스 가문의 장원이 애먼 회사 손에 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그런 게 아닙니다.”
하크 브라운이 펄쩍 뛰었다.
“그렇다면 뭡니까, 브라운 씨?”
노이어의 다그침에도 하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산이 보름스 장원을 되찾은 뒤 자신을 찾아와 책임자로 앉혔을 때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목장 책임자이지만, 겉으로는 장원 전체의 관리인으로 하겠다고.
그 이유는 보름스 가문에 대한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적에게 실질적인 책임자의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루산이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았지만, 하크는 루산의 말에 기꺼이 따르기로 했다.
보름스 가문이 또다시 망가지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여자인 바덴이 이 큰 장원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우려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어떤 관리인이 보름스 장원을 이토록 대단한 유제품 생산 회사로 바꾸어 놓고, 장원과 인근 농부들을 전보다 부유하게 만들고, 거대한 장원을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크는 바덴의 능력에 탄복했고, 기꺼이 루산의 말을 지켜 겉으로는 총책임자이지만 실제로는 바덴의 뜻에 따라 장원을 관리하는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왔던 것이다.
하크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자 노이어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할 수 없이 하크는 바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브라운 사장님. 제가 헤링겐 사장님을 만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덴은 루산의 매형인 노이어 헤링겐을 찾아갔다.
노이어는 루산을 태우기 위해 그의 외숙 집으로 찾아온 바덴을 본 적이 있었지만, 워낙 오래되고 잠깐 보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반달 그룹과 보름스 장원의 실제 책임자로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이렇게 젊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동안 많은 귀족들과 대단한 사업가들을 상대해 왔기에 바덴은 누구를 만나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루산의 가족 앞에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바덴이 차분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바덴 고슬라입니다. 루산 보름스 자작님의 재산 관리인이자 그분의 위임을 받아 모든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루산 보름스 기사님께서는 가문의 재산을 강탈한 자가 아직까지 건재하고 언제든 다시 가문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가족들도 위험에 빠질 거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힘을 감추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쉽지 않으시겠지만, 양해를 부탁드려요.”
“보름스 가문의 재산을 강탈한 자가 아직도 건재하다고요? 누군지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대체 누굽니까?”
“그건 자작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 전에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해 궁금하신 점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바덴은 노이어에게 루산과 만남, 사업을 시작하게 된 연유, 지금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말해 주었다.
“아! 어쩐지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 했더니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사장님이셨군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워낙 화제가 되었던 사업체였기에 사업가인 노이어도 들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사업 규모가 너무 커 놀랐기 때문이었다.
바덴이 사업 확장 과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었던 것도 노이어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다.
분명한 것은 대략적으로 들은 내용만으로도 현재 바덴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였고, 그 사업체의 실질적인 주인은 처남이라는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름스 장원이 이처럼 대단하게 바뀐 까닭은 이해를 했어요. 고슬라 사장님이 운영을 해 온 것이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변경에 사는 처남과는 주로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일 년에 한 번도 채 안 된다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하나에서 지금처럼 거대한 사업체들을 수십 개나 보유하게 된 것은 결국 고슬라 사장님의 능력과 노력 때문이군요. 사업적으로 볼 때 처남이 한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안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지가······.”
“내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노이어가 바덴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재산 관리인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자신의 판단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사업체를 인수하는 대리인이 있어요? 고슬라 사장님은 자신의 판단으로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지 처남의 대리인 같지가 않아요. 그럼에도 재산 관리인, 위임 받은 대리 경영인이라고 소개를 했죠. 이건 법적 관계나 통상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관계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바덴은 노바 대학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노이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 무슨 관계죠?”
노이어의 질문에 바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왔으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는 답변들만 뇌리를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