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큰 물고기가 싸우면 잔챙이는 흙탕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234. 큰 물고기가 싸우면 잔챙이는 흙탕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네오 우르사 제작에 협조하기로 약속한 뒤에도 루산은 가라로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쟁 상황, 레오파드 생산 단지 가동 현황, 아라드 변경 개척 상황, 노바 동부 공업 지구 사태···, 이런 일들을 마법 연구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듣는 것은 루산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마법 연구소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바라보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수치와 자료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평가는 짧은 은유적 표현으로 마무리한다.
예를 들면 노바 동구 공업 지구 사태로 인해 필센 제국에 얼마만큼의 손해가 발생했는지, 이로 인해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구체적인 수치와 비교 자료를 들어 설명하고는 마음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촌평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결국 이반 황제가 백성들에게 뿌린 욕망의 씨앗이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 비옥한 텃밭에서 싹을 틔우고 무섭게 자라나 땅을 뒤집어엎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공화주의자나 민주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이 나라 정치 체제가 바뀔 것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허허,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황제가 강하면 밭에 자라난 억센 풀들을 모조리 뽑아 가지런하게 정리할 테고, 약하면 잡초가 밭을 뒤덮겠지요. 다만······.”
“······?”
“애초에 안 줬으면 모를까 줬다가 빼앗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요.”
루산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기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근본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가요?”
“누가 중요한 걸 차지하고 있느냐? 그걸 차지하고 있는 자가 강자이고, 약자는 강자의 힘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말이지요.”
“중요한 게 뭐죠?”
“변경이죠. 괴수 부산물입니다.”
“음······!”
“괴수 부산물을 활용하기 전의 세상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가라로슈는 그렇게 전제하고 입을 열었다.
“과거에 마법사들이 모여 괴수에 대항할 수단을 만들었지요. 멕 나이트 말입니다. 그렇게 마법 연구소가 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이죠. 그러다 황제가 변경을 틀어쥐었습니다. 마법사들은 그 아래에서 괴수 부산물이나 취급하고 멕 나이트를 만들어 파는 존재로 전락했지요. 그러나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가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물론 마법사들은 황제에게 덤빌 만한 패기와 의욕을 잃고 간섭 받지 않고 지내는 것에 만족한 지 오래지만 말입니다.”
마법사의 관점이지만, 루산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우로라 연합과의 전쟁도 보십시오. 저쪽은 변경을 빼앗으려고 쳐들어왔습니다. 변경을 손에 넣는 데 실패했으니 얼마 못 가서 흩어지고 망하겠지요. 이쪽은 변경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1 대 4의 전력 차이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쪽은 이쪽보다 네 배나 많은 멕 나이트를 보유했지만, 다 투입할 수가 없어요. 마나 연료를 아껴 써야 되니까요.”
“몇십 년 분량을 비축하고 있다면서요?”
“그렇다 해도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지 정확히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아껴 쓰려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가라로슈라고 정치적인 해석을 못하는 것은 아닐 터, 그럼에도 그는 괴수 부산물과 마나 연료로 간결하게 세상사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 제국이 아우로라 대륙을 모두 제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알 수 없지요. 훨씬 많은 인구와 훨씬 강한 전력을 가지고도 무기력하게 무너진다면 저쪽에는 바보만 사는 것일 텐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라로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간결한 그의 답변에 쾌감을 느끼던 루산은 저도 모르게 최근에 생긴 고민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늘 만나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분야가 다르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관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은 나약한 인간임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의 마음의 벽을 허물고 호감을 얻는, 트리어식 사교술을 오랜만에 펼쳐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라로슈 님, 개인적인 문제를 상의드려도 될까요?”
“저한테 말입니까?”
“네.”
가라로슈가 잠깐 의아해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해 보시지요.”
“네.”
루산은 막상 시작하려니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트리어와 켐니츠는 함께 끝까지 가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루산은 번거롭게 돌아가지 않고 실명을 등장시켰다.
허물없이 진솔한 사람,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실명이 등장하자 가라로슈는 적잖이 놀랐다.
변경 8군단의 1전단장과 레이크 시티 시장 대리 겸 2전단 부전단장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최근에 트리어가 1전단장으로 승진하고 알파, 베타, 감마 전진 기지가 있는 8구역 북쪽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건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기사님.”
비밀도 아니었다.
“그래서 반달 호수에 배를 띄워 북쪽에서 획득한 괴수 부산물을 레이크 시티에 있는 장벽 생산 기지로 빠르게 옮길 수 있게 할 생각이에요. 돌아서 오려면 거리가 멀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요.”
“오! 그 생각도 기사님이 하신 겁니까?”
“네. 철로로 연결하자는 걸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서요.”
“역시!”
가라로슈는 듣기 좋은 탄성으로 루산의 기분을 띄워 주었다.
그러나 거짓으로 감탄한 척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크 시티 장벽 생산 시설 건도 그렇고 괴수 목장 건도 그렇고, 루산의 아이디어는 늘 새롭고 즐거웠던 것이다.
이번 건도 그런 느낌이었다.
넓은 반달 호수에는 거대한 수중 괴수가 산다.
루산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트리어가 8구역 북쪽 개발에 워낙 의욕적으로 뛰어들어서 대수롭지 않게 선착장과 바지선 건조비를 레이크 시티에서 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켐니츠가 왜 그 비용을 레이크 시티에서 대느냐고 따지더라고요. 이익을 보는 쪽에서 내는 게 맞지 않냐고 하면서 말이에요.”
“음······.”
가라로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반달 호수 지역은 개발 이익을 많이 봤으니까 상대적으로 재미를 보지 못한 북쪽 전진 기지 사람들을 위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느냐고 했는데도, 반달 호수 지역 발전에 북쪽 전진 기지 사람들이 기여한 게 없다며 레이크 시티에서 비용을 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큰 도시가 되었으니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가라로슈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것이다.
“기사님께서 레이크 시티 세금 징수권을 가지고 계시지요?”
“네.”
이 역시 비밀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사실 기사님께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겁니다. 해결이 어렵지 않지요. 그럼에도 고민하신다는 것은 트리어, 켐니츠와의 인간적인 유대를 해치고 싶지 않기 때문일 텐데요.”
“···그런 것 같네요.”
“비용을 내가 내느냐 네가 내느냐, 레이크 시티에서 내느냐 본부에서 내느냐, 이런 게 핵심이 아니군요.”
“네?”
“도시 운영의 원칙을 세우느냐 개인적인 도리를 다하느냐, 이런 문제도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바로 기사님 스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요?”
가라로슈의 답변은 루산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각기 다른 세 종의 새끼 동물들이 한곳에서 뛰어놀며 자랐습니다. 자라면서 차이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지만, 서로 친구처럼 지내왔죠. 그런데 그중 한 마리가 사자가 돼 버린 거예요. 주위에서는 빤히 보이는데, 본인들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지내고 있는 것이지요.”
루산은 가라로슈의 비유가 민망했지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늙은 마법사의 말이 예리하게 가슴에 꽂혔다.
“도시 운영 원칙도 세우고, 개인적인 도리도 다하세요.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확실히 이해해야 주변에서도 혼선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
“어떤 동물도 새끼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라로슈의 이야기를 듣고 루산은 현재의 상황의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상황을 이해했다 하여 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은 비유가 아니고 그 역시 사자가 아닌 인간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주변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하는 데는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돌아가는 루산을 배웅하면서 가라로슈가 중얼거렸다.
“과연 사자가 다른 동물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
***
경찰 마차 네 대가 베르가 지구 상가 건물 앞에 섰다. 경찰들이 우르르 내렸다.
“빨리 끝내자고!”
경찰들이 여러 점포로 흩어져 들어갔다.
“경찰입니다. 상가 주인이 클로라 양 맞습니까? 장부 좀 봅시다!”
영장을 제시하는 경찰의 말에 상점 주인들이 깜짝 놀랐다.
그때 경찰 마차 두 대는 베르가 지구 주택가로 들어가 마당이 잘 관리된 집 앞에 멈추었다.
경찰들이 내려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죠?”
덩치 큰 사복 경찰들을 본 하녀가 놀라 물었다.
“경찰입니다. 클로라 양의 집이 맞습니까?”
“네?”
경찰이 문을 당기자 하녀가 손잡이를 꼭 잡고 버티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에요!”
그러고는 안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아가씨! 아가씨! 경찰이 왔대요!”
그러나 덩치 큰 남자의 힘을 버틸 수는 없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경찰들이 구둣발로 거실을 짓밟았다.
30대 초반의 여자가 이층에서 내려와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어디긴 어디야? 울름 남작이 딴살림하는 집이지. 안 그래요, 클로라 양? 여기 수색 영장이오.”
사복 경찰 하나가 비웃음을 날리며 수색 영장을 제시했다.
‘알면서도 왔다고?’
클로라는 낯빛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아가씨!”
하녀가 얼른 클로라를 부축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클로라가 충격에 잠시 졸도했다는 것을 알자 신경을 끄고 모든 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꼭 찾아야 해!”
“네!”
‘못 찾으면 우린 죽은 목숨이야!’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경찰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눈에 불을 켜고 울름 남작 첩의 집을 철저히 수색해 나갔다.
한편, 합동 수사단 본부에서는 아인스 제철에서 데려온 울름 남작의 부하들에 대한 심문이 한창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데 왜 이래? 도장 찍기를 거부하는 공업 은행 랑겐 지점 은행원, 너희가 죽였잖아!”
“아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이게 동부 공업 지구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데?”
“이 새끼들, 이거 안 되겠구먼! 그저 겁만 주려고 했는데 은행원이 달아나다 마차에 치여 죽었잖아! 그 시체 아샤펜 지구 야산에 묻었다며?”
“······!”
“오베론 공단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하려고 주모자급 노동자 일곱 명을 죽이고 강에 버린 것도 너희 아니야?”
“······!”
“개새끼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것 말고도 한두 가지가 아니더만? 너흰 다 뒈졌어!”
“······!”
“알아, 알아! 너흰 시켜서 한 죄밖에 없잖아. 울름 남작이 시킨 거잖아. 모가지 댕강 날아갈래 아니면 몇 년 살다 나올래? 불어.”
그 시각, 그리마는 노바 경찰청장 에르젠 자작의 방에 있었다.
경찰청장의 책상 위에는 그리마가 보고한 두툼한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다.
“야! 수사과장!”
“네!”
그리마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거 잘못되면 너나 나나 다 죽는 거야. 알지?”
“네!”
그리마는 신병처럼 우렁차게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아. 이번 사건은 공작과 황제의 갈등으로 비화될 테니까!’
서류를 건네줄 때 스텐커가 말했다.
“큰 물고기들이 싸우면 잔챙이들은 흙탕물에 가려 보이지 않아. 결국 울름 남작은 날아갈 거야. 자네와 자네 가족에 대한 위협도 사라지는 거지.”
그 서류를 자세히 읽어 본 그리마는 이것으로 최소한 울름 남작은 충분히 날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스텐커에게 협조하기로 한 것이다.
“울름 남작, 체포해!”
“네, 청장님!”
그리마가 힘차게 경례를 하고 몸을 돌려 나왔다.
노바 경찰청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외투에 중절모를 쓴 사복 경찰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진눈깨비를 맞으며 그리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네!”
경찰들이 일제히 자동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