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아버지, 뭐가 문젭니까?
235. 아버지, 뭐가 문젭니까?
진눈깨비를 뚫고 나타난 여러 대의 자동차와 마차들이 정부 청사 근처에 있는 한 건물 앞에 멈추었다.
자동차에서는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마차에서는 제복 경찰들이 내렸다.
경비를 서던 울름 남작의 부하들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최근에 동부 공업 지구 사태와 관련돼 경찰에 붙들린 동료들이 영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울름 남작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여 전 직원들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무척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지내고 있었는데 경찰이 한두 명도 아니고 떼로 나타나 정문과 후문을 막고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니 어지간히 무신경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큰일이 났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경찰이야! 막고 있을 테니 남작님께 알려!”
“알았어!”
한 사람이 안쪽으로 달려가고 나머지가 출입문을 몸으로 막았다.
“경찰이다! 울름 남작에 대한 체포 영장을 집행하겠다! 경찰의 영장 집행을 방해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는 재상 각하를 모시는 울름 남작님의 사무실이야! 감히 누굴 체포한다는 거야!”
“공무 집행을 방해하겠다는 거야? 다 체포해!”
“이거 막무가내로 뭐 하는 짓이야! 경찰이면 다야! 모두 옷 벗을 각오 단단히 해!”
“이 새끼들, 다 잡아!”
출입문을 막고 버티는 울름 남작의 부하들과 뚫으려는 경찰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몸싸움이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울름 남작이 부하들과 함께 내려와 호통을 쳤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인가!”
그의 부하들이 남작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감싸며 물러나자 사복 경찰들도 출입문을 통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마가 사복 경찰들을 지나 울름 남작 앞에 섰다.
울름 남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났으나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뭔가?”
위협적인 그의 음성에 그리마는 살짝 몸이 떨렸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그리마가 영장에 적혀 있는 죄목을 읽어 나갔다.
“울름 남작, 당신을 열두 건의 살인 사건, 네 건의 협박 사건, 탈세, 그리고······.”
건물 로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그리마에게 쏠렸다.
울름 남작은 코웃음을 치며 이 경찰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리마의 마지막 한마디에는 그의 얼굴도 일그러지고 말았다.
“반란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뭐? 반란? 어디서 개수작이야?”
“그거야 조사를 받아 보면 알게 될 테고.”
“세상 많이 좋아졌군. 경찰 나부랭이들이 감히 귀족인 나를 체포하겠다고? 오베론 공작님을 모시는 나를?”
울름 남작이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그리마는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반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황제조차 법 앞에 평등하다고 했다. 남작이 황제보다 높은 줄은 몰랐군.”
“······!”
“황제 폐하의 명으로 죄인을 잡아들이는 경찰과 그 가족을 협박했으면 응당 죗값을 받아야지.”
그리마는 일반론을 이야기한 것인지 이번 일을 지시한 사람이 황제라는 것인지 일부러 헷갈리게 말했다.
“순순히 체포에 응할 것인지 아니면 저항하다 개처럼 두드려 맞고 비참하게 끌려갈 것인지 결정하시오.”
그리마를 노려보는 울름 남작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이놈이!”
그러나 그는 결국 품위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재상 각하께 즉시 이 일을 보고하도록!”
울름 남작이 고개를 돌려 지시하자 그의 부하 하나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리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놈들 모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될 텐데, 누구한테 하는 말이오?”
“뭐라고?”
“사람을 협박하고 죽이고 묻고 하던 놈들 아닌가? 모두 체포해!”
사복 경찰들이 달려들고 밖에서 출입문을 막고 있던 제복 경찰들도 곤봉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와 출입문을 지키고 섰다.
이미 울름 남작이 체포에 동의한 모양새를 취했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도 저항하기가 꺼려졌다.
경찰의 수가 많은 것도 저항 의지를 꺾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무기를 들고 경찰과 싸울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현행범이 되는 것이고, 울름 남작과 오베론 공작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너희 같은 말단 경찰부터 경찰청장까지 모두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거야!”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는 지켜보면 할 일이지.”
그리마가 손을 들어 앞으로 휘두르자 뒤에 있던 경찰들이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 울름 남작과 그의 부하들을 체포했다.
울름 남작이 건물 밖으로 끌려가 마차에 실려 멀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리마는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아무리 헌법에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명시돼 있다지만 귀족, 그것도 재상의 가신인 남작을 체포하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자신을 찾아와 가족을 언급하며 협박한 자에게 복수했다는 쾌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만약 울름 남작이 다시 풀려난다면 보복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풀려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옭아매야 했다.
“수색해!”
“알겠습니다!”
그리마의 지시에 경찰들이 울름 남작 사무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 시각, 노바에 있는 울름 남작의 저택에도 경찰들이 몰려가 압수 수색을 벌이고 있었다.
***
경찰이 울름 남작의 부하들까지 모두 체포했기에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없어서 오베론 공작은 그 소식을 하루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울름 남작의 저택에 있는 고용인들이 압수 수색이 끝난 후에 놀라 오베론 공작의 저택을 찾아간 것이다.
분노한 오베론 공작은 당장 내무대신을 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무대신은 공작이 왜 호통을 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동부 공업 지구 사태로 전임 내무대신이 경질되고 새롭게 내무대신이 되었기 때문에 업무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 가신인 울름 남작과 그 부하들을 체포하고 압수 수색을 하다니,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런 일을 벌여도 되는 것이오!”
“세상에!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알아보겠습니다!”
“허! 당장 알아보시오!”
신임 내무대신은 곧바로 노바 경찰청장을 만나러 갔다.
직위로 보면 호출하는 것이 맞지만, 마음이 급해 직접 찾아간 것이다.
직속상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노바 경찰청장은 잠시 당황했지만, 어차피 겪을 일이었고 자신도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이걸 보시죠.”
노바 경찰청장 에르젠 자작은 그리마의 보고서를 건넸다.
일부는 스텐커가 직접 조사한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루트 오베론이 2년 가까이 반복해 진술한 내용 가운데 울름 남작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내무대신은 보고서를 훑어보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납치, 협박, 살인 사건.
울름 남작이 오베론 가문을 위해 자행한 범죄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볼 때 이것들로 울름 남작을 엮기에는 부족했다.
분명 죄질이 나쁜 범죄들이었지만, 오베론 공작과 맞서 싸울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건드리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뒤로 넘길수록 내무대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2년 전 반란 사건은 그때로부터 무려 15년 전에 준비해 온 것으로 그 실행은 루트가 맡았지만,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루트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울름 남작과 그 부하들이 나선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반란에 가담시킬 구 귀족파의 남은 가족들을 포섭하는 일, 반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족 가문들의 재산을 빼앗은 일을 해 나갈 때 계획대로 풀리지 않으면 울름 남작이 부하들을 시켜 방해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제거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뿐 아니라 루트 오베론은 아우로라 연합의 첩자들과도 실제로 접촉하고 있었다.
구 귀족파 잔당을 반란 사건으로 엮을 때 필요하기도 했고, 실제로 자신의 아버지가 권좌에 욕심을 부려 정말로 반란을 주도하기라도 한다면 아우로라 연합과 필요한 일들을 해 나갈 수도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에도 울름 남작이 아우로라 연합의 간첩들을 관리해 왔다.
오베론 공작가에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루트 오베론은 그런 일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그 자신이 문제 해결을 부탁했고 아우로라 연합의 간첩들과 교류해 왔기 때문이었다.
스텐커는 루트 오베론을 쏙 빼고 울름 남작만 부각시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부 공업 지구 사태의 배후에 아우로라 연합이 있다고 보고, 작전 실패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모자나 실행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 노바 경찰청장과 내무대신으로서는 이 보고서가 자신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거···, 확실한 겁니까?”
내무대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솔직히 반란 사건에 오베론 공작이 관련돼 있다는 이야기는 옛날부터 돌던 것 아니겠습니까? 루트 오베론이 괜히 잠적한 게 아니지요.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걸로는······.”
“이미 전방위로 압수 수색 들어간 상태입니다. 조만간 결론이 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막아주십시오.”
내무대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엮여도 너무 강한 상대와 엮였다.
동부 공업 지구 사태를 파고 있는데 오베론 공작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그러나 동부 공업 지구 사태 - 제국의 수도에서 멕 나이트 전투가 벌어져 사실상 수도 방위가 뚫린 충격적인 사태 - 는 제국의 존망과 관련돼 있고 황제의 진노가 하늘을 찔렀다.
오베론 공작의 보복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침내 내무대신이 결단을 내렸다.
“한 부 더 작성하세요. 폐하께 보고할 테니까.”
“네!”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청장님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무마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에르젠 자작은 없는 증거라도 만들어 낼 기세로 대답했다.
노바 경찰청 건물을 나온 내무대신은 무거운 표정으로 정부 청사로 돌아와 오베론 공작을 찾아갔다.
“재상 각하.”
“그래, 울름 남작은 풀어 주었소?”
오베론 공작이 성난 눈으로, 그러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장은 어렵겠습니다.”
“뭐라!”
오베론 공작이 내무대신을 노려보다 말했다.
“대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잊은 것 아니오?”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허면?”
‘나는 필센 제국의 대신이지 재상 각하의 가신이 아니니까요.’
오베론 공작의 성난 눈초리에 내무대신은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동부 공업 지구 사태로 경찰이 무척 날카롭습니다. 경찰이 시작한 일을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내무대신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며칠 지난 뒤에 좋게 어르고 달래서 해결해 보겠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무능해서 죄송합니다, 재상 각하!”
납죽 엎드리는 내무대신을 보고 오베론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
경찰이 울름 남작을 체포했다는 소식은 경찰과 정부 내에 순식간에 퍼졌다.
“울름 남작이 누군데?”
“오베론 공작의 심복이라던데?”
“그런 사람을 경찰이 체포했다고?”
“그렇다나 봐.”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뭐가?”
“황제 폐하와 재상 각하의 관계 말이야.”
울름 남작의 이름을 모르던 하급 경찰과 말단 관리들조차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예전에 돌던 오베론 공작에 대한 소문이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황제와 재상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많아졌다.
소문의 확산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한 것 같았다.
어쨌든 이쯤 되자 오베론 공작은 마음이 급해졌다.
가신들뿐 아니라 자신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대신들과 고관들을 총동원해 경찰에 압력을 가하고 이 일이 크게 비화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소문을 일으키는 자를 색출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자기 목이 달려 있는 경찰 수뇌부는 위협과 회유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소문을 진화시키거나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내는 일은 이런 유의 일을 해 오던 울름 남작과 그의 부하들이 모두 체포된 바람에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울름 남작이 어떤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지 소문으로 그리고 경찰 쪽 인맥을 통해 이미 알게 된 오베론 공작은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늘 의지하던 큰아들은 아우로라 대륙으로 원정을 떠나 있었고, 더럽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 오던 울름 남작은 감금당해 있었다.
여전히 주위에 능력 있는 가신들이 많이 있었지만, 밝은 곳에서 일해 온 사람들이라 답답한 소리만 해 댔다.
바로 그때 비쩍 곯은 몸을 회복하느라 요양하고 있던 둘째 아들 루트가 말을 걸어왔다.
“아버지, 뭐가 문젭니까?”
무려 15년 동안 자신을 대신해 반란 공작을 이끌어 오고 결국 성공시킨 둘째 아들이 아닌가!
오베론 공작은 비쩍 마른 둘째 아들이 이렇게 의지가 될 수가 없었다.
“그게 말이다······.”
큰아들도 없고 심복도 없는 사이, 루트가 오베론 공작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