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농업 기지로 삼으려 합니다
236. 농업 기지로 삼으려 합니다
눈과 비, 먼지와 검불을 뚫고 3일 내내 달려오느라 지저분해진 마나 열차가 변경 8구역으로 들어왔다.
예전에는 라돔 시가 종착역이었으나 철로가 델타 기지 옆을 지나 반달 호수 지역 레인보우 시티를 통과해 레이크 시티 역까지 이어진 덕에 레이크 시티가 목적지인 승객들은 다른 이동 수단으로 갈아탈 필요가 없어졌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는 변경 8구역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덴은 예전보다 빨라진 속도가 한편으로는 반가웠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쉬움을 느꼈다.
거대한 붐붐 수레를 타고 낯선 변경의 풍경을 천천히 구경하며 이동하는 즐거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원한다면 라돔 시에서 내려 변경 투어의 붐붐 수레나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이미 새로운 이동 수단이 등장한 세상에서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은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특별한 일 혹은 유별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일상적인 느림이 주는 평화와 감동은 문명의 확산으로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빠르게 달리는 마나 열차는 금세 반달 호수 지역 입구에 도착했다.
레인보우 시티로 진입하기 전에 하늘 높이 자란 원시의 나무들 사이를 신비롭게 통과하고 햇빛에 비쳐 아름답게 반짝이는 반달 호수의 잔물결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덴은 그렇게 레이크 시티에 도착했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변경 8구역에서 사업을 진행할 회사 간부들과 루산이 요청한 기술자들을 데려온 것이다.
미리 편지로 연락을 받은 루산이 시간을 내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세요, 고슬라 사장님.”
그는 혼자가 아니라 레이크 시티 관계자들과 함께 나왔고 바덴 또한 많은 사람들과 왔기 때문에 호칭에 신경을 썼다.
“잘 지내셨나요, 보름스 자작님?”
바덴이 장시간 열차 여행의 피로가 무색할 만큼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디선가 꽃향기가 나나 싶어 고개를 돌려볼 정도였다.
적어도 루산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바덴이 평소와 달리 루산의 호칭에 작위를 넣은 까닭은 이번에 데리고 온 사람들이 혹시나 변경을 무시하거나 지위에 비해 나이가 젊은 루산에게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루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덴을 따라온 사람들뿐 아니라 변경 요원들도 루산의 뒤통수를 따갑게 쳐다보았다.
애초에 변경에서 그의 정확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루산 스스로도 평소에 신분을 내세우지 않았다.
행동거지와 실력이 남다르고 어디선가 귀족 출신에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소문은 들어 보았기에 귀족 출신인가 보다 짐작했을 뿐 자작이라는 작위까지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루산은 바덴의 호칭에 살짝 민망하기는 했지만,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고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을 레이크 시티 회의실로 안내했다.
이동 수단은, 방문자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멕 워커로 했다.
바덴과 그 일행들은 멕 워커가 등에 짊어진 거대한 철제 바구니에 타고 레이크 시티와 반달 호수의 풍경을 구경하며 시청 회의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켐니츠와 레이크 시티 개척 건설 책임자 그리고 1전단장 트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 길 오셔서 피곤하시겠지만, 일단 일 이야기부터 하죠.”
“저희는 괜찮습니다, 자작님. 일하러 온 것이니까요.”
바덴이 루산을 작위로 부르며 깍듯이 대하자 트리어와 켐니츠도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루산이 먼저 크게 그려진 반달 호수 지역 지도를 짚으며 이번 사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반달 호수에 화물선을 띄우는 계획은 북쪽에서 획득한 괴수 부산물을 이곳 레이크 시티에 있는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까지 빠르게 운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반달 호수 북쪽 지역을 본격적으로 개발할 때에도 도움이 되겠죠. 레이크 시티까지는 철로가 놓여 있으니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고 여기서 곧바로 화물선을 타고 북쪽으로 건너가면 되니까요.”
반달 호수 북쪽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어 북쪽 호숫가에 건설할 선착장에서 개발 예정지까지 도달하려면 도로를 뚫어야 하지만, 그것은 트리어가 맡기로 했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기술적인 부분은 이번에 고슬라 사장님과 함께 온 엔지니어들이 담당할 겁니다. 그런데 변경의 특수성으로 인해 반달 호수에 띄울 화물선은 세 가지 요소를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기술자들이 메모 준비를 했다.
“첫째, 화물선은 규모가 커야 합니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괴수 체액 드럼통은 멕 워커만큼이나 큽니다. 사람이 나를 수 없어요. 그런 드럼통을 몇백 개씩 실어 날라야 합니다. 다른 괴수 부산물도 부피가 크기 때문에 강이나 호수에 다니는 어지간한 선박 크기로는 감당할 수 없어요.”
정확히 얼마나 크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변경 실무자들과 기술자들이 논의해 결정할 문제였다.
“둘째, 화물의 무게와 부피가 상당하다 보니 배 위에서 멕 워커로 작업할 필요성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멕 나이트를 운반할 일도 자주 발생할 겁니다. 이쪽에 수리 공장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배 바닥이 매우 단단해야 합니다.”
목재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행이라면 레이크 시티에는 철강재를 생산하는 피닉스 제철의 공장이 들어와 이미 가동하고 있었고, 레오파드 생산 단지에는 철강재를 가공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다.
배의 구조가 복잡하지 않다면 이곳에서 재료 준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셋째, 반달 호수에는 거대 수중 괴수가 살고 있어요. 온순한 녀석도 있고 난폭한 녀석도 있지만, 어쨌든 안전을 위해 선박 테두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물속을 헤엄치던 괴수가 갑자기 배 위로 올라와 사람을 낚아채 들어갈지도 몰라요.”
“······!”
“그러니 테두리를 높일 뿐 아니라 가장자리에 방어를 위한 무기 설치 여부도 검토해야 할 겁니다.”
바덴이 데려온 직원들과 기술자들은 화물선이 갖춰야 할 세 번째 조건을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로 오기 전에 이미 변경 호수에 배를 띄워야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거대한 수중 괴수를 막아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반달 호수에 필요한 화물선을 건조하기 위해 직접 보고 경험해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배는 단순한 형태의 바지선이에요. 크고 튼튼하고 안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반달 호수가 크다지만, 바다만큼 큰 건 아니니까 속도가 조금 느려도 괜찮습니다.”
배가 많을 필요도 없었다.
루산은 체액 드럼통 300개 정도를 실을 수 있는 바지선 한 척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배가 너무 작으면 적재량이 부족해 자주 왕복해야 하고, 그럴 경우 호수에 사는 괴수로부터 공격 받을 가능성도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배가 너무 크거나 쓸데없이 많이 만들면 운항비와 관리비만 늘어난다.
그래서 루산은 8구역 북부 - 반달 호수 북쪽 - 에서 획득하는 괴수 부산물의 양이 생각보다 많거나 북부 개발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져 운반할 인력과 물자가 많아지는 것까지 감안해 체액 드럼통 300개를 운반할 수 있는 화물선 두 척을 만들 생각이었다.
한 척이 고장 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두 척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이었고 기술자들의 판단에 따를 생각이었다.
기술적으로나 레이크 시티에서의 선박 건조 여건을 따져 봤을 때 체액 드럼통 100개 혹은 50개를 운반하는 배밖에 만들 수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화물선이 필요하지만, 나중에는 유람선도 생각하고 있어요.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차차 하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자작님.”
기술자들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루산은 레이크 시티 개척 건설 요원들과 관리 요원들에게 기술자들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선박 기술자들은 운반할 화물의 종류, 화물의 부피와 무게, 선박 건조를 위한 여건을 알아봐야 했다.
선착장 건설 기술자들은 많은 화물을 실어 나르기에 적합한 선착장 입지를 선정하고 선착장 건설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산출해야 했다.
트리어가 이끄는 1전단은 이미 북쪽으로 이동을 마치고 본부에서 지원하는 인력과 장비로 도로 공사에 들어가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기술자들이 나가자 트리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일이 돌아가는군!”
그 모습을 본 켐니츠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루산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중에 뒷말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 비용 문제를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러자 루산이 나작이 대답했다.
“손님이 왔는데, 혹시라도 불편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좋지 않아요. 그 이야기는 우리끼리 따로 하죠.”
켐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라돔 시에서 시간에 맞춰 율리안이 본부 간부들을 데리고 레이크 시티를 직접 찾아왔다.
워낙 거리가 멀어 노바에서 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왕 온 김에 다른 사업도 논의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잡아 두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고슬라 사장님. 유능한 여성 사업가라 들었는데 생각보다 젊으시군요.”
율리안이 바덴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바덴이 우아하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통치자님.”
“자, 앉읍시다.”
회의실 한쪽에는 바덴과 회사 간부들이, 그 맞은편에는 율리안과 변경 8구역 본부 간부들 그리고 트리어가 앉았다.
루산과 켐니츠도 율리안 옆에 앉았다.
율리안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반달 식품에서 우리 8구역에 많은 투자를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슬라 사장님.”
“저희야말로 좋은 사업 조건을 제공해 주신 통치자님과 8구역 관계자들께 감사하죠.”
“우리는 서로 감사한 관계로군요?”
“그럼요!”
“하하, 그건 그렇고 대규모 농업 사업을 논의하길 원하신다고요?”
“네.”
바덴이 신호를 보내자 미리 준비해 온 자료를 비서 소피아가 변경 8구역 사람들에게 한 부씩 나눠 주었다.
자료를 훑어보던 율리안이 말했다.
“이건 우리 8구역 지도 같군요.”
“네, 예전에 왔을 때 개척부 관계자에게 부탁해 구했습니다.”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네.”
바덴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8구역은 단기간에 많은 이주민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다행히 반달 호수 지역을 빠르게 개척해 가파르게 증가한 이주민을 소화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식량 수급 균형이 깨져 외부에서 많은 식량을 들여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게다가 급격한 공업화로 그 많은 이주민이 레이크 시티와 레인보우 시티로 몰려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이 레이크 시티에 가프 마법 연구소 마나 연료·윤활유 생산 시설을 유치하고 레오파드 생산 기지를 건설한 뒤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돼 버렸다.
애초에 이 공업 단지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주민을 모집한 데다 전쟁으로 인해 레오파드 생산 설비가 급증하면서 노동력이 계속해서 레이크 시티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레인보우 시티는 마나 열차가 지나는 길목이라 변경 8구역을 방문한 사업가들이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공장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반달 호수 남쪽의 넓은 지대에서 인구가 주로 두 도시로 몰려 나머지는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반달 호수 지역의 나머지 땅과 8구역에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땅들을 활용해 8구역을 농업 기지로 삼을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바덴이 잠시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율리안이 자신의 물컵을 바덴 쪽으로 밀었다.
바덴이 목례를 하고 얼른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8구역으로서는 외부에서 식량을 들여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 외부 공급이 끊길지 몰라 불안합니다. 그리고 저희 반달 식품도 외부에서 원료를 들여오는 것보다 이곳에서 조달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조달하는 게 비용 면에서나 안정성 면에서 더 낫다고 봅니다. 그래서······.”
바덴의 열띤 설명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바덴은 루산의 부름에 응해 왔으면서도 정작 일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산이나 바덴은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바덴이 사업적으로 미팅을 갖는 자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루산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구상과 계획을 설명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바덴이 멋져 보였다.
그렇게 바덴이 온 첫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