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이제 그만 가요
240. 이제 그만 가요
루산은 바덴을 만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행운이라고 말했지만, 바덴에게도 루산을 만난 것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노바 대학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서 2등을 했지만, 아무도 사건을 맡기지 않는 여자 변호사.
발품을 팔아 각종 사고나 범죄 현장을 찾아가고 신문에 난 부고, 공무소에 들어오는 사망 신고를 확인해 당사자나 유가족을 만나 열심히 설득해서 일을 따내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면 다시 이런 일을 반복하던 삶을 살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를 겪은 가난한 의뢰인들의 슬픔과 분노, 악다구니와 비난 속에서 차가운 빵조각을 입에 물고 한 건, 한 건 사건을 해결해 나가던 시절.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람을 만나도 귀족, 사업가, 상무대신를 만나고,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다니며, 많은 직원들을 동원해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행해 나간다.
사회적 명성은 그때와 비교할 수가 없었고 자부심과 자신감, 성취감과 만족감도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바로 루산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 어느 고용주가 루산처럼 인사, 확장, 신규 사업 등에 대해 아무런 제약과 간섭 없이 포괄적 자율권을 주고 경영을 맡길 것인가?
자금이 필요하다면 군말 없이 거액의 자금을 구해 와 척척 내줄 수 있는 보스가 어디 있을 것인가?
루산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최초의 사업인 자작나무숲 별장이 성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덴은 루산을 자신의 삶을 바꿔 준 은인을 넘어 이익 공동체, 함께 살지 않을 뿐 필생의 동반자로 이해했다.
여자로 태어난 운명의 질곡을 벗어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행운의 존재였다.
삶이 또다시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루산이 유일했다.
그러니 루산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에 루산이 노바 역에서 과거의 약혼자를 만나 충동적으로 바덴에게 키스한 일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안겨 주었지만, 그럼에도 루산을 향한 사랑이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더 크게 자라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바덴의 부모는 총명한 딸을 보통의 여자애들과 달리 대학까지 보낼 정도로 특별히 키웠다.
수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을 때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이 귀족과 결혼하여 평민이라는 이유로 겪을 불행, 모종의 이유로 남들 앞에 당당히 나서서 결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부모님은 이 결혼을 반대할 것이다.
지금도 그녀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작은 빵집을 하면서도 바덴에게 힘들면 그만두라고, 내가 먹여 살리겠다고 말하고는 했다.
바덴은 부모님이 이 결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네가 뭐가 모자라서 아무도 모르게 도둑 결혼을 한다는 말이냐!
아버지의 비통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원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하지도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알게 된다면 부모님은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덴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루산이 설사 다른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다른 삶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레오파드 기동 시험을 위해 노바에 온 루산을 면회하여 차 안에서 함께 밥을 먹고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초병에게 걸린 일, 대학로 노천카페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일은 사업으로 지친 그녀를 촉촉하게 해 주는 달콤한 추억이었다.
데이트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이런 일도 가슴 벅차게 소중한데, 결혼이라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의 인생이 가시밭길이 된다 해도 운명의 동반자와 함께 간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바덴이 눈물을 슥 훔치고는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결혼하면 우리 어디서 살아요?”
“어?”
초조하게 바덴의 답변을 기다리던 루산이 눈을 깜박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했으니 레이크 시티에 있는 당신의 숙소나 노바에 있는 우리 집, 사무실 근처, 장원 별장, 보름스 가문의 장원이나 저택에서는 못 사는 거 아니에요?”
“그, 그건, 그렇죠.”
“게다가 거리가 멀고 서로 일이 바쁘니 자주 못 보는 건 지금과 다를 바 없겠네요?”
“그래도 지금보다는 좀 더 자주 만나지 않을까요?”
“일 년에 한 번보다 많이 만난다면 일 년에 두세 번?”
“그것까지는 아직······.”
당황한 루산이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바덴이 짐짓 화난 체하며 루산을 흘겨보다가 이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님을 깨닫고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루산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과감하게 두 팔을 루산의 목에 감고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그런 건 차차 생각하기로 해요.”
놀란 루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럼······?”
“네!”
바덴의 짧은 대답 뒤에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말이 없었다.
바덴의 숨결이 다가오자 루산이 저도 모르게 바덴을 끌어당긴 것이다.
“헙!”
바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이 환하게 트인 곳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거의 없는 변경의 야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릴 때부터 구축된 마음의 방어막을 허물어뜨렸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가던 그때, 심심해하던 탐탐들이 짧은 앞발로 가슴을 두드렸다.
탐탐-
탐탐-
그 소리에 야생에서 퍼뜩 깨어난 바덴이 루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기사님! 이제 그만 가요.”
두 남녀가 붉어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부끄러움과 행복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루산이 바덴을 천천히 당겨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바덴은 루산의 든든한 가슴에 기대어 그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행복했다.
탐탐-
탐탐-
그녀는 탐탐들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루산이 이야기한 시골 청년과 동네 처녀가 과연 야산에 올라가 엉큼한 짓을 전혀 하지 않고 내려갔을까 하는 궁금증도 순간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바덴은 금세 지워 버렸다.
지금도 충분히, 넘칠 만큼 행복하니까.
루산이 청혼하고 바덴이 승낙한 날, 두 사람은 블랑카가 봤다면 이게 아니라며 원고를 찢어 버렸을 만큼 건전한 애정 행각을 벌이다 챙겨 온 간편식 레오파드를 먹고 야산에서 내려왔다.
***
바덴이 기술자들을 데려온 뒤로 반달 호수에 배를 띄우는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실어 나를 화물의 종류와 양, 유지비, 관리비, 안전 등을 다각도로 검토해 본 결과, 일단 바지선은 크기가 다르게 세 척을 건조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기술자 대표가 루산에게 보고했다.
“세 척이라고요?”
“네. 주요 화물인 괴수 체액 드럼이 언제나 일정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맞아요.”
괴수를 많이 잡으면 많이 확보하고, 적게 잡으면 적게 확보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변경에서 살다 보면 그 추세가 어느 정도 예상되기는 하지만, 예측이 언제나 맞는 것도 아니었다.
“체액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마나 농도가 떨어진다 하니 화물선을 다 채울 물량을 확보할 때까지 창고에 보관하는 것보다 그때그때 공장까지 나르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화물선에 소량의 짐을 싣는 것은 효율이 떨어지죠. 그래서 바지선을 크기가 다른 세 척으로 하는 게 낫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반달 호수 북쪽 개척이 시작되면 이주민과 개척에 필요한 물자를 실어 나르게 될 거라고 하셨는데, 그 물량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반달 호수 지역 개척을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달 호수 지역 개척은 단기간에 엄청난 이주민이 들어온, 변경 개척사에 유례가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라드 전쟁, 북부 전선에서의 패배로 많은 피란민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라드 왕국에서도, 북부 전선에서도 적을 몰아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대규모의 피란민이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 외에도 적극적으로 개척민을 유치한다는 계획에 따라 바덴이 노바에서 모집해서 보내 온 이주민들이 적지 않았는데, 루산은 앞으로도 그들을 북쪽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레이크 시티가 급속히 공업화가 진행되어 지금도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인 데다 바덴의 농업 기지 계획이 본격화된다면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변경 본부에서 정한 방침에 따르겠지만, 그 방침을 정할 때까지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피력할 생각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반달 호수 북부는 사냥 캠프를 추가하는 정도이지 많은 이주민이 거주하는 개척 도시로 발전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트리어가 어떤 의욕을 품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이는 냉정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괴수 체액 드럼통 200개, 100개, 50개를 실을 수 있는 바지선을 건조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300개가 최대가 아니고 말입니까?”
“200개를 최대로 하는 게 낫습니다. 300개를 실을 수 있는 배를 만들면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될 겁니다. 운이 좋아 사냥을 많이 해서 실어 나를 물량이 많다면 자주 왕복하면 되지요.”
기술자들은 그동안 괴수 부산물 생산 현황을 면밀하게 검토해 루산보다 더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루산은 전문가들의 판단을 존중했다.
“그렇게 하세요.”
“아 참! 그리고 자작님께서······.”
루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유람선도 나중에 생각하고 있다고 하셔서 당장 관광용은 아니지만, 호수를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는 배도 두 척 건조해 볼까 합니다.”
“관찰하고 연구하는 용도?”
“네. 강이나 바다나 호수나 배가 다니는 곳은 수심 측정이 기본입니다.”
“아!”
전혀 생각지 않은 이야기였다.
루산은 전문가들을 초빙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허락했다.
“역시 안전은 고려해야겠지요?”
“물론입니다, 자작님. 그래서 배는 그리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지선보다 훨씬 빠른 배가 될 것입니다. 살짝 개조만 하면 유람선으로 쓸 수도 있고, 급한 일이 있을 때 남쪽과 북쪽을 빠르게 오가는 연락선으로 쓸 수도 있고 말입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루산은 선박 기술자들의 보고에 따라 총 다섯 척의 배를 건조하기로 했다.
적재량이 다른 바지선 세 척.
연구용과 연락용 쾌속선 두 척.
“선착장은 남쪽 레이크 시티와 북쪽 창고, 두 곳에 일단 건설하되 나중에 필요하면 더 건설할 수 있도록 몇 군데 포인트를 잡아 두었습니다.”
선착장 건설 전문가들도 보고했다.
그런데 선착장은 육상에 짓는 건물과 달랐다.
배의 바닥이 닿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깊이를 유지하는 곳에 지어야 하기 때문에 수중에 건설해야 했다.
계절마다 수량이 달라도 배를 대고 화물을 하역하는 데 지장이 없어야 했다.
게다가 멕 나이트나 멕 워커가 걸어 다녀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이 제시한 선착장 건설비가 상당했다.
물론 지금의 레이크 시티 세수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 보라며 켐니츠가 다시 한번 루산을 다그칠 정도는 되었다.
“검토도 끝났고 건조 비용 예산까지 나왔으니 트리어를 만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어?”
켐니츠의 말에 루산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만나 보죠.”
루산은 오랜만에 우르사를 타고 반달 호수를 크게 돌아 변경 8구역 북쪽으로 갔다.
바이크와 시에나가 각각 레오파드 라이트닝과 레오파드 파워를 타고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