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돌아가서 쉬게
247. 돌아가서 쉬게
“렌커 씨는 사업 복을 타고났나 봐요.”
시바렌 운송 현판식에 참석한 바이크가 나름 축하 인사를 건넸다.
듣기에 따라서는 빈정거리는 것으로 들리는 무례한 태도였지만, 좋은 날이고 바이크의 언행이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렌커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것도 모르고 바이크가 가벼운 입을 계속 놀렸다.
“마침 북부 개발이 시작되고, 농업 기지 사업도 대규모로 일어나고, 반달 호수에 배까지 화물선까지 뜨게 생겼으니 이거야 원 돈을 쓸어 담는 거잖아! 안 그래?”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듣기 싫은 말이 있는 법.
이런 대규모 사업들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전쟁으로 인해 변경 투어가 주춤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다 변경 8구역의 눈부신 발전을 보고 전망을 예측해 뛰어든 사업인데, 자신의 노력이 폄하되는 것 같아 슬슬 불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 참았다.
변경 투어를 진행하면서도 점잖은 손님들만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도 참았는데 이번이라고 못 참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열혈 소녀 - 여전히 단발머리를 하고 다녀 어려 보이기는 했다 - 가 응징의 손을 빠르게 뻗어 바이크의 입을 집게처럼 꽉 집었다.
바이크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야! 고작 7퍼센트 지분을 가진 투자자야! 우리 사장님한테 정중히 대하지 못해? 그렇게 이죽거리면 들어오던 복도 달아나겠다. 앞으로 꼬박꼬박 사장님이라고 불러. 우리 돈을 불려 주실 귀한 분이니까. 그리고 사업 관련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마.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라도 다른 사람이 듣고 혹해서 뛰어들 수 있잖아. 알았어?”
“우우우!”
바이크는 마녀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워낙 강하게 집어서 뺄 수가 없었다.
바이크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렌커는 기분이 확 풀려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지분 13퍼센트 투자자가 이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이 두 사람이 그동안 모은 전 재산을 투자했음에도 지분율이 낮은 까닭은 바덴의 조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해 보려고요.”
“렌커 사장님, 경험을 쌓으면서 점점 규모를 키워 가겠다는 의도는 알겠지만,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8구역은 운송 사업을 하기에 최적의 시기예요. 경쟁자도 없어요. 사소한 실수를 하더라도 돈을 벌 수 있는 시기인 거예요. 사장님이 사업 경험이 없는 분도 아니고, 운송업에 대한 공부도 그 정도면 충분해요. 크게 시작하세요.”
“음······.”
“기회가 올 때 잡는 게 사업가예요. 코끼리 자동차 30대로 시작하세요. 생각 같아서는 붐붐 자동차까지 가지고 시작하라고 하고 싶은데 아직 출시가 안 된 게 안타깝네요.”
“······!”
코끼리 자동차는 붐붐 자동차가 군에 납품하고 있는 는 화물차를 말하는 것이고, 붐붐 자동차는 바겐 부자가 경영하는 자동차 회사의 이름이면서 현재 개발 중인 대형 화물차의 이름이라는 것을 렌커는 노바 견학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바렌 운송은 코끼리 화물차 30대로 시작하게 되었다.
변경 상황을 고려하여 포장이 안 된 땅을 이동하기 위해 붐붐 수레 5대, 좁은 길을 통과하기 위해 소형 화물 마차 10대, 멕 워커도 2대 운용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자금이 처음 예상을 훨씬 벗어나 루산의 투자를 많이 받게 된 것이다.
렌커의 투자금은 시에나와 비슷했지만, 바덴이 루산에게 훨씬 높여주도록 조언했다.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도 회사 경영의 가치를 지분으로 인정해 주세요.”
“바덴,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가요?”
루산이 빙긋 웃으며 질문하자 바덴 역시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경우가 다르죠. 일단 사업 규모부터 다르잖아요. 그리고 저는 지금도 충분히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바덴의 급여와 성과 보상금은 루산의 기본급과 직책 수당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루산은 바덴에게 지분을 나눠 줄 생각이 있었으나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킬 수 없기에 아직은 공식화할 수가 없었다.
바덴의 도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반달 호수에 띄우게 될 바지선에 화물을 실은 차량을 그대로 몰고 올라탈 수 있도록 설계에 반영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바렌 운송>이 탄생했다.
시에나 13퍼센트
바이크 7퍼센트
렌커 31퍼센트
루산 49퍼센트
루산이 투자한 사실은 비밀이었다.
그래서 시에나, 바이크, 렌커 세 사람만 최근 노바에서 유행한다는 사진기 - 이 또한 바덴이 직접 노바에 연락해 들여온 것이다 - 로 사진을 남겼다.
코끼리 화물차 30대
붐붐 수레 5대
화물 마차 10대
멕 워커 2대
시바렌 운송이라는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이 차량과 기계 들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그 앞에서 세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회사 현판 앞에서도 10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경직된 표정으로 서 있는 바이크,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시에나, 눈을 깜박이지 말라는 사진사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렌커.
세 사람의 젊은 시절 모습이 레이크 시티에 있는 시바렌 운송 본사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
“아버지, 황제와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저쪽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철저히 설계했다면 맞서 싸우는 건 저쪽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입니다. 차라리 꼬리를 자르고 이번에는 숙이고 넘어가시지요.”
루트의 조언을 받아들인 오베론 공작은 황제와의 독대를 요청했다.
싸움은 이쪽이 주도해야지 저쪽의 의도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더욱이 싸움의 상대가 황제라면 더더욱 신중해야 했다.
오베론 공작은 황제를 곤란하게 할 만한 비밀을 알고 있었고, 필센 제국군 전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노바 동부 공업 지구의 가동이 중단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 물자 생산 기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병력과 물자를 아우로라 대륙으로 수송하는 함선의 6분의 1을 보유했다.
마음만 먹으면 황제를 뒤흔들고 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황제와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황제의 눈두덩이를 멍들게 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은 확실히 쓰러지리라는 것을.
들이받는다면 오히려 이반 황제가 젊었을 때, 개혁 헌법을 수립하여 귀족들의 분노와 반발심이 하늘 높이 치솟았을 때가 적기였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구 귀족파가 모두 쓰러지고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평민들의 지위가 매우 높아진 지금은 황제의 힘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 군대와 경찰과 관료들의 충성, 든든한 국가 재정, 황제는 제아무리 강력한 오베론 공작가라 해도 일개 가문이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숙여야 한다는 루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자를 생각은 없었다.
울름 남작의 혐의를 인정하고 경찰의 수중에 넘기는 것은 단지 황제에게 숙이고 이번 위기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팔을 자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릎을 꿇는 것은 얼마든 할 수 있었지만, 훗날 다시 칼을 들기 위해서라도 팔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황제 앞에서 울름 남작의 혐의 하나하나를 따지고 변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베론 공작은 결전장에 들어가는 검투사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독대 요청을 받아들인 프리드리히 황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측근 비서 한 명만 남기고 경호를 위한 근위 기사들까지 모두 물린 상태였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했소?”
황제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관심도 없는데 귀찮게 해서 짜증이 난 신처럼 약간의 불쾌함을 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그때 오베론 공작이 황제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그것은 황제와 비서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체투지는 이반 황제의 개혁 헌법 이전에도 제국 법도에 없는 예법이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은 황제와 쌍무 관계에 있는 봉신이지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 앞에 황제조차 평등하다는 개혁 헌법이 수립된 이후에는 황제를 만났을 때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하는 예법조차 사라졌다.
그런데 제국에서 가장 힘이 센 오베론 공작이 황제 앞에 완전히 엎드린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얼른 일어나시오!”
놀란 황제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나 오베론 공작은 그 자세 그대로 애절하게 말했다.
“폐하, 소신은 능력의 부족함을 느끼고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원하옵니다.”
“뭐라? 방금 뭐라 했소?”
황제가 엉거주춤하게 선 채도 되물었다.
“폐하, 오베론 가문은 오랫동안 필센 제국과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선대 이반 황제께서 개혁 헌법을 제정하시고 그와 관련된 정책을 시행하셨을 때에는 가장 먼저 선황제의 뜻에 따라 가문의 토지 5분의 4를 내놓았고, 아우로라 연합과의 전쟁 때에는 가문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습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을 아우로라 땅에서 보냈지요. 전쟁이 끝난 뒤에는 폐하의 뜻에 따라 십수 년 동안 온갖 모욕과 불명예를 묵묵히 감내하면서 결국 반란 세력을 뿌리 뽑았습니다.”
최대한 절제하려하지만 비통한 심정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이처럼 평생 충성을 다해 왔음에도 준엄한 전쟁 시기에 내부 결속을 다지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분란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제국을 위해서라도 제가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사직을 청원하옵니다, 폐하!”
오베론 공작의 말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런 뒤에도 그는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자리에 다시 앉았다.
“흐음······.”
오베론 공작이 왜 이러는지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내무대신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였다.
그럼에도 그는 오베론 공작을 불러 사정을 묻거나 그를 배려하여 울름 남작을 풀어 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오베론 공작이 찾아와 사정하지 않는데 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스스로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엎드려 있는 오베론 공작을 보며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
‘저런 예법도 나쁘지 않군.’
개혁 헌법 제정 이전에도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었던 오베론 공작가는 개혁 정책 시행으로 많은 귀족 가문들이 몰락하거나 가세가 크게 기울었음에도 변화의 시대를 수월하게 적응하여 오히려 이전보다 힘이 더 커졌다.
유일하게 황제에 필적할 만한 가문.
그동안 제국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운 가문.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제국이 흔들릴 만큼 강력한 가문.
그런 오베론 공작 가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황제에게 크나큰 숙제였다.
그런데 이렇게 온몸을 땅에 붙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늙은 공작의 모습을 보니 마침내 난제가 풀린 것 같아 흡족했던 것이다.
이 복종의 태도가 자신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한 계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속마음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재상의 말처럼 이 어려운 시기에 내부가 분열되어서는 안 될 것이오. 따라서 재상의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소. 내부 혼란을 수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오. 재상이 아니면 누가 이 막중한 임무를 맡을 수 있겠소?”
“······!”
“재상의 마음은 알았으니 돌아가서 일하시오. 끝까지 충성을 다하시오. 짐이 그 마음을 잘 헤아릴 것이니.”
한참 후에 오베론 공작이 일어나 황제에게 절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황제가 비서에게 말했다.
“경찰에서 잡고 있다는 재상의 부하들을 풀어 줘.”
“하지만, 폐하! 몇몇 혐의들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여 이대로 풀어 주었다가는······.”
“공작이 엎드렸는데, 그에 대한 보답을 하지 않으면 칼을 뽑지 않겠나?”
“······!”
“전쟁 상황이야.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네, 폐하!”
“경찰도 물갈이를 한번 해야 하나? 누가 이런 큰일을 보고도 없이 벌이는 거야? 동부 공업 지구의 범인들은 아직도 붙잡지 못하면서 말이야. 쯧쯧쯧.”
“······.”
“경찰 쇄신 방안을 마련해 봐. 조용히.”
“알겠습니다, 폐하!”
울름 남작과 그 부하들은 다음 날 모두 풀려났다.
그리마와 노바 경찰청장은 크게 당황했지만, 까마득한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울름 남작이 한동안 면도를 못해 거칠고 초췌한 모습으로 경찰서에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부하가 그를 마중했고, 그는 자동차를 타고 오베론 공작으로 저택으로 갔다.
오베론 공작은 그를 질책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돌아가서 쉬게.”
“네, 각하!”
울름 남작은 본가로 돌아가 며칠을 보낸 뒤 숨겨 놓은 아들을 보기 위해 클로라의 집으로 갔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한밤중에 서재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가 그대로 쓰러졌는데,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황제에게 납작 엎드린 오베론 공작이나 그런 오베론 공작의 태도가 기꺼워 울름 남작을 풀어 준 황제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